마요르가의 '비평가' 예술을 사랑하는 방식

  • 김연주
  • 입력 : 2017.11.1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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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테이지-98] 방금 성황리에 첫 공연을 마친 희곡작가 스카르파가 볼로디아를 방문한다. 볼로디아는 10년 전 스카르파의 첫 작품에 혹평을 가한 비평가. 작품 평을 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스카르파 앞에서 볼로디아는 오늘 공연에 대해 짧은 비평문을 쓰지만 스카르파는 그의 신랄한 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볼로디아는 스카르파가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며 설득을 시작한다.

스카르파의 작품은 늙은 권투선수와 그의 제자 젊은 권투선수의 이야기다. 스승은 어린 제자를 혹독하게 가르친다. 작품의 1막의 클라이맥스는 스승과 제자가 벌이는 권투시합. 스승은 제자에게 모든 것을 전수하기 위해, 동시에 또 질 수 없다는 마지막 자존심을 가지고 링에 선다. 제자는 자신의 눈앞에 선 거대한 벽을 뛰어넘겠다는 호승지심에 또 진정한 권투선수로 거듭나고 싶다는 욕망을 온 주먹에 실어 휘두른다.

극작가와 비평가가 이 작품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그런데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꼭 권투 경기 같다. 공격과 방어가 오가고 상대를 녹아웃시킬 한 방을 찾으려 애쓴다. 작품 속 권투사범과 권투선수, 작품 밖 비평가와 작가 인생을 건 두 대결이 극중극 형식으로 빛난다. 작품에 관한 이견이 치열하게 오간다. 둘은 직접 대본을 리딩하며 작품에 진정한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혹은 허점을 찾기 위해 서로에게 말을 쏟아낸다. 비평가와 작가가 펼치는 대화는 작품을 넘어 연극 전반에 대한 토론으로 확장된다. 연극의 역할, 연극이 다루는 진실의 성격, 그리고 연극과 현실의 관계를 반추하게 한다.

관객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연극이 훌륭한 연극인가? 볼로디아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관객은 자신이 믿는 거짓에 열광할 뿐이며 진실한 연극은 거부감을 일으켜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에 대한 연극, 사람과 그 신비로움에 대한 연극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공허와 가짜 신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연극은 없는 걸까요? 우리가 저항하도록 도와주는 그런 연극 말입니다!"(볼로디아)

"오! 볼로디아. 용감함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실제 삶에서 완벽한 겁쟁이들이고, 무대에서 자유를 외치는 연출들은 실제 삶에서는 끔찍한 폭군들이지요. 작가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쓰는 단어들을 날마다 수백 번은 어기며 살지요. 연극은 절대 그 누구도 바꾸지 못해왔습니다. 당신은 바뀌었나요?"(스카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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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연극 자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본질적으로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비평과 작품, 관객과 창작자 등 극장이란 특수한 공간을 통해 맺어진 관계.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모자라지만 동료라고 부르면 딱 적절하지 않을까. 알고 보면 스카르파의 작품은 볼로디아와의 이야기다. 자신은 어린 권투선수고 볼로디아는 혹독하지만 따뜻한 늙은 권투 스승인 셈. 두 사랑은 10년 동안 만나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때로는 채찍질하기도하고 또 어떤 때는 따뜻하게 위로하며 함께 예술작품을 만들어 온 동지다. 그래서 스카르파는 볼로디아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볼로디아는 쉽사리 인정해 줄 수 없다. 사랑하는 만큼 절실하고 혹독하다.

후안 마요르가도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이 작품의 커다란 주제는 예술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사랑하는 방식으로서의 비평이다." 모든 연극은 수많은 비평을 불러온다. 앉아 있는 관객의 머릿속을 짧게 지나가는 생각의 편린도 비평이라 할 수 있다. 비평은 작품에 대한 애정이고 또 세상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비평가'의 작가는 '맨 끝줄 소년'으로 한국 관객들에게 친숙한 후안 마요르가(Juan Mayorga)다. 한국에 그의 작품이 소개된 건 '비평가'가 여섯 번째다. 후안 마요르가는 연극이 철학, 수학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믿으며 그러한 극 세계를 추구해나가고 있다. 대학에서 철학과 수학을 전공하고 발터 벤야민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의 이력도 이에 한몫하다. 철학이 인간과 세상의 원리에 대해 궁금해 하고 질문하는 것에서 출발하듯 마요르가의 연극도 질문을 던진다. 허구적이지만 있음직한 세계를 만들어,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거나 우리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주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그야말로 연극으로 철학하게 하는 작가인데 이번 '비평가' 역시 그렇다.

볼로디아 역의 김승연 배우와 스카르파 역의 이종무 배우 역시 호연을 보여준다. 2인극인 만큼 두 사람 사이 팽팽한 긴장감이 작품의 성패를 가르는데, 100분간 두 사람이 함께 빛났다. 다만 두 사람의 공간이 조금만 더 밀착됐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서로 시선을 마주치는 시간이 좀 더 길 수 있도록 말이다. 19일까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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