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대신 고통 받는 여인의 절규 그린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 김연주
  • 입력 : 2017.11.2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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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테이지-99] '트로이의 여인들'은 헥토르,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등 유명한 영웅들이 자웅을 겨루는 트로이전쟁이 끝난 뒤 남은 이야기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의 사랑의 도피로 시작된 10년 전쟁. 결국 트로이는 그리스·스파르타 연합군과의 전쟁에 지고 왕비였던 헤큐바를 비롯해 트로이의 모든 여인들은 승전국 그리스 노예로 끌려가게 된다. 바로 그 직전, 몇 시간 동안의 이야기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에우리피데스의 동명 원작을 기본 틀로 하고 있는데 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트로이전쟁 이야기 속에서도 위대한 전쟁 영웅들의 포효가 아니라 고통받는 연인들의 가냘픈 신음에 귀 기울였다. 길고 긴 전쟁이 끝났지만 여인들은 더 긴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남아 있는 한 조각 희망은 더 큰 절망으로 불어 돌아올 뿐. 적의 아내로, 노예로 전락한 여인들이 울부짖는다. "정의는 어디에도 없구나. 언제나 어리석음이 지혜를 이기고, 비열함이 용기를, 추함이 아름다움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우리가 이 비극을 보면서 느끼는 이유는 '너무하다'보다는 '그러하다'이다. 이 이야기로부터 수천 년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어리석음, 그로 인한 고통을 도처에서 목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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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낳는 겹겹의 아픔이 쌓여 응축된 한이 극 내내 몇 번이고 터지고 또 터진다. 극작가 배삼식이 비극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려낸 덕분이다.

"지옥이 또 다른 지옥으로 바뀌었을 뿐."(코러스) 배삼식은 헤큐바, 카산드라, 안드로마케 등 이름이 주어진 트로이의 왕족 여성들뿐만 아니라 '코러스'라고 뭉뚱그려진 무명의 트로이 하층 여성들에게도 목소리를 부여했다. 주인만 바뀔 뿐 똑같은 지옥이라고 외치는 여인들의 노래에는 위정자들의 잘못된 판단에 아무 죄 없이 휘둘려야 하는 민초들의 한이 서려 있다. "우리는요? 우리는 어떻게 되지요?"라고 불안에 떠는 목소리에는 왕족이었던 여성들이 겪어내야 하는 적군에게 몸을 바쳐야 한다는 모욕에서 오는 불명예란 복에 겨운 비극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실존의 비극을 그린다.

"천지는 무정이요/목숨은 유정이라/무정한데 유정하니/어리석고 어두워라."

하지만 아직 슬퍼하기엔 이르다. 머리와 가슴을 치는 비극은 아주 마지막에 남아 있다. 바로 에필로그다. 이날 명창 안숙선이 부르는 고혼(孤魂)의 창은 이 '여인들'의 비극을 전인류의 비극으로 승화시킨다. 우리는 언제나 선이 승리하리라 믿고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지만 세상은 보기 좋게 기대를 배반한다. 그래서 '트로이의 여인들'은 하늘과 신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그러나 이 또한 의미 없다. 세상은 원래 인간사에 무심하다. 정의도 선도 모두 인간의 것일 뿐이다. 그 무심한 세상에 한을 만드는 건 인간의 유정함이라는 고혼의 조용한 노래는 하늘에 닿지 않는 여인들의 곡소리를 우리 개개인의 이뤄질 수 없는 소망과 동일선상에 놓는다.

우리 고유의 장르인 창극과 서양 문명의 뿌리라는 그리스 비극의 만남이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고 나면 그리스의 비극의 본질로 꼽히는 '카타르시스'의 다른 이름이 '한(恨)'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자아내는 감동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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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에서 비극의 본질을 '카타르시스'라 말한다. 표현이 불명료해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분분하지만, 쉽게 말하자면 비극이 그리는 주인공의 비참한 운명이 관중들 마음에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을 유발하고 격렬한 감정적 작용 속에서 무의식의 상처가 해소되는 일종의 감정적 정화작용이다.

과연 당대 그리스 사람들이 원형극장에 모여 단 위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비극을 보며 어떤 감정을 혹은 전율을 느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아흐으." 가끔 배우들이 내뱉는 이 추임새가 어떤 대사보다 전율과 소름으로 다가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카타르시스'란 것이 이 창극의 '한'과 매우 비슷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아주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오장육부를 긁으며 올라오는 소리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요동이 느껴진다. 사람이 고통에 내뱉는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슬픔에 쏟아내는 눈물 같기도 하고 혹은 주체할 수 없는 흥처럼 들리기도 한다.

예컨대 이런 대목이다. 적장의 첩이 될 운명에 처한 예언자 카산드라의 노래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적에게 다가올 (그녀 자신이 미리 내다본) 비극에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신에게 기도를 바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세 개의 음색이 하나로 표현될 수 있는 게 '창'이다.

창극은 그 이름처럼 소리로 이끌어가는 극이고 그런 소리를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힘은 배우를 통해 나온다. 음악의 힘을 최고조로 이끌어가는 데는 배우의 공이 컸다. 김금미, 김지숙, 이소연, 김준수 각기 다른 나이대의 이 네 사람은 모두 다른 매력의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다. 특히 헬레네를 연기한 김준수의 변화무쌍함이 앞으로를 더 기대하게 한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안숙선 명창이 작창했으며 옹켄센이 연출을, 정재일이 음악을, 배삼식이 극작을 맡았다. 12월 3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오른다.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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