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로 건너온 고대의 마녀 '메디아 온 미디어'

  • 김연주
  • 입력 : 2017.10.14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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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테이지-93] 짙은 선글라스를 낀 메디아가 마이크 앞에 선다.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남편 이아손의 비리를 폭로하기 위해서다. 적절한 과장과 호소를 섞어가며 기자들의 동정심을 얻으려 애쓴다. 다음 장면, 갑자기 비장한 음악이 흐른다. 크레온 왕이 "내일 아침까지 그리스를 떠나라"고 명령하자 메디아는 멜로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쓰러져 눈물을 쏟는다.

에든버러가 21세기로 건너온 고대의 마녀에게 열광했다. 극단 성북동비둘기가 '2017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선보인 연극 '메디아 온 미디어'는 그리스 비극 '메데이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젊은 공주와 바람이 난 이아손, 이에 아들을 죽여 복수하는 메디아를 각각 멜로, 액션, 토크 프로그램 등 9개의 TV 프로그램으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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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열린 세계 최고 연극 축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메디아 온 미디어'의 개막 첫날, 영국 최고 권위의 연극평론가 린 가드너가 예고 없이 극장을 찾았다. 관람 후 그는 "내가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을 사랑하는 이유는 '메디아 온 미디어' 같은 작품이 있기 때문"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후 연극전문지 브로드웨이 베이비와 리스트가 "프린지 정신인 경계를 부순 작품" "미디어가 지배하는 현대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했다"고 연이어 호평했다. '메디아 온 미디어'는 가디언이 선정한 '2017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추천작 27편' 중 하나로 선정됐는데 이 중 연극은 단 여덟 작품에 불과해 그 의미가 남다르다.

메디아온 미디어를 선보인 김현탁 연출은 "메디아가 당한 처절한 배신, 끔찍한 친족 살해는 사실 오늘날 대중문화에서 너무 자주 다뤄져 진부해져 버린 소재다. 그걸 대중문화 틀에 담아 다시 보여줌으로써 일상화된 폭력과 비극을 관객 스스로 깨닫게 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대중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 세계가 공감하는 주제고, 또 이를 대중문화의 다양한 어법으로 풍자해 형식적으로 새로우면서도 재미도 갖춘 지점에 해외 연극인들이 주목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게임 프로그램에 집중하다 보면 갑작스레 애니메이션의 세계가 펼쳐지고 애니메이션 속에 빠져들면 다시 액션영화 한 편이 질펀하게 이어진다. 채널이 계속될수록 메디아의 비극은 어느 사이 잊힌다. 메디아의 비극은 그저 오락거리로 전락한다. 화려하고 농염한 가요무대가 한판 벌어지고 나면 메디아의 모든 이야기는 어느새 증발해버린다. 아무도 메디아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한다. 무대 위에는 살인이 벌어진 사건 현장만이 남는다. 극이 끝을 향해 갈수록 관객들은 왜 메디아가 복수를 결심하게 됐는지, 이 비극의 시작은 무엇이었는지, 심지어 이게 무슨 이야기였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연극 '메디아 온 미디어'는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문제의 본질은 온데간데없고 자극적이고 표면적인 이야기만 남게 되는 현대 사회의 민낯을 까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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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성북동비둘기는 2005년 창단해 연극과 연극 바깥 사이의 경계 위에서 다양한 실험을 거듭해왔다. 이 극단은 근대 도시화로부터 살아남은 성북동 비둘기처럼 동시대 연극의 상업화와 표준화 물결에 맞서 연극성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올해 초 극단은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는 '성북동 비둘기' 시구절처럼 오랜 터전이었던 서울 성북구 성북동을 떠나게 되고 말았다. '메디아 온 미디어'는 용산구 한남동에 새로 둥지를 튼 연극실험실에 오른 첫 무대기도 했다. 김 대표는 "극단 성북동비둘기가 수년간 연극실험실로 운영했던 성북동 소재의 '일상지하'에서 내몰리듯 나온 지가 벌써 1년이 됐다"며 "새로 옮긴 연극실험실은 객석도 40석에 불과하지만 연극의 본질과 새로움에 목마른 관객께서 앞으로도 이 공간을 뜨겁게 달굴 것"이라고 자신했다.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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