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에서 즐기는 뮤지컬, 그 발상의 전환

  • 원종원
  • 입력 : 2014.12.03 05:02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뮤지컬 읽기 - 17]파랗고 노란 조명이 켜졌다. 공연이 시작되면서 역사적인 문화재들이 하나둘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학창 시절 배낭여행에서 만났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극장의 밤 공연 풍경이다. 멀리 산 정상의 파르테논 신전도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날 밤 만났던 작품은 레온 민쿠스와 마리우스 페티파의 발레극 ‘돈키호테’였다.

흑인 돈키호테의 화려한 춤사위나 풍차를 향해 달려들던 익살스러운 몸짓도 간헐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바로 공연장 그 자체 풍경이다. 역사는 과거의 유물일 뿐 아니라 현재의 자원이라는 말을 여실히 실감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그리스나 이탈리아가 왜 선조들 덕에 살고 있는 나라라는 말을 듣는지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들에게 문화재는 보존해야 할 가치 못지않게 활용의 미덕이 더해진 관광자원이자 삶의 현장 바로 그것이었다.

뮤지컬
▲ 뮤지컬 '아이다' 공연장면 /매경DB
몇 년 뒤 로마를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번에는 카라칼라 욕장터에서 공연된 야외 오페라다. 해마다 여름이면 로마 구시가지 외곽에 위치한 이 역사적 유물에는 특설 야외무대가 설치된다. 거대한 유적 사이로 무대가 들어서고, 그 앞에는 1000석 넘는 계단형 간이 객석이 만들어진다. 마침내 공연의 막이 오르는 날 버스와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도착해 사람들을 쏟아놓으면 떠들썩한 축제는 시작된다. 그때 아름다운 여름밤을 수놓던 것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렇게도 사랑한다는 작곡가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였다.

특히 2막의 유명한 개선 행진이 등장할 때면 객석에서는 탄성과 박수가 연신 쏟아졌다. 하늘을 향한 천장이 개방된 카라칼라 욕장터 야외무대에는 실제 말을 탄 군인들이 줄 맞춰 무리지어 등장해 분위기를 고조시켜 준다.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나 봄직한 화려한 개선 행진의 웅장함이 무대 위에 그대로 재연되는 셈이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브라보!’라는 외침과 함께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는 것도 이탈리아이기에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카라칼라 욕장터의 역사적 무게감도 감흥을 폭발시키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요인 중 하나다.

◆역사의 현장에서 문화를 노래하다

우리에겐 그저 신선하게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사실 세계 각국에서 역사의 현장을 활용하는 공연물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파리 베르사유궁 정원에서는 계절에 맞춘 음악 페스티벌들이 해마다 열리고, 런던 하이드 파크 로열 앨버트 홀 부근에서도 유사한 야외공연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페스티벌도 마찬가지다. 하이 스트리트 길거리를 막고 관객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갖가지 의상과 소품을 들고 눈길을 끄는 프린지의 공연 홍보도 볼거리지만, 무엇보다 백미를 이루는 것은 역시 궁 정문 앞에서 펼쳐지는 대형 퍼포먼스인 밀리터리 타투(Military Tattoo)다. 17세기 벨기에나 네덜란드와 전쟁을 할 때 타악기로 시간을 알리는 전통에서 시작됐다는 이 공연은 군인들이 북을 치며 행진을 벌이는 일종의 타악 퍼포먼스다.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밀리터리 타투가 시작된 것은 1950년부터인데, 스코틀랜드 특유의 백파이프 음악과 타악기의 조화는 역사적 유적지인 에든버러 캐슬의 장엄한 풍경과 어우러져 백미를 이뤄낸다. 해마다 공연은 반복되지만 밀리터리 타투는 언제나 어김없이 입장권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몇 해 전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와 문화 유적지에서도 갖가지 행사와 공연들이 기획된 적이 있다. 특히 인기를 끌었던 문화행사는 단연 뮤지컬들이었다. 2006년 서울에서는 경희궁을 배경으로 정조 임금 이야기가 담긴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가 막을 올려 화제가 됐고, 이듬해에는 ‘공길전’이, 그리고 몇 년 동안 ‘명성황후’ ‘대장금’ ‘왕세자 실종사건’ ‘천상시계’ 등이 무대에 올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계절 좋은 봄이나 가을, 탁 트인 문화유적지 야외 공연장에서 뮤지컬 공연을 보는 것만큼 호사스러운 체험도 드물다.

사실 우리 고궁 뮤지컬은 외국의 유사한 공연 전통들에 비한다면 다소 늦은 감마저 있다. 생각과 실행이 늦어진 데는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그중에는 역사나 유물에 대한 우리의 고루한 인식 탓도 있고, 아직 공연이나 문화행사가 일반 대중에게까지 미치지 못함에 기인한 규모의 영세성도 존재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역사나 문화재를 보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야말로 과감한 시도를 가로막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다. 원형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에 큰 가치를 둔 우리 문화행정과 인식 그리고 전통 때문이다. 물론 여러 차례 큰 전쟁을 겪으면서 역사와 유적의 손실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선험적으로 알게 됐다는 점도 이면에 있다. 게다가 몇 해 전 서울에서 발생한 숭례문 화재사건 같은 돌발성 사건사고 등도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또 다른 원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틀어서 다시 바라본다면 반대로 그렇게 ‘꽁꽁 감춰둔’ 역사의 흔적들이 우리 생활에 얼마나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역사의 의미는 과거 기록만을 의미한다기보다 현재와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의미 부여에서 다시 규정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주장한다 해도 한국은 그저 다이내믹한 ‘공장’과 ‘사무실’, ‘아파트’의 나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발상 전환이 필요

역사적 유적지에서 올려지는 작품들의 가장 큰 매력은 고궁이라는 무대 배경이다. 특히 역사극이라면 그 파급효과는 상상 이상이다. 고궁이라는 공간적 배경의 효율적인 분할과 선택, 시각적 재미의 활용은 극의 리얼리티 재연 측면에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광 자원화에도 유리한 부분이 있다. 드라마나 유명 영화가 원작일 때 고궁에서 무대화하는 뮤지컬 버전은 충분히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근본적인 장점을 지니게 해 준다.

물론 야외무대에서 펼쳐지는 뮤지컬 공연에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극장이라는 약속되고 통제된 공간과 달리 야외무대는 태생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몇몇 단점들이 있다. 대표적인 어려움이 바로 날씨와 음향이다. 사계절이 분명한 기후는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덕분에 관객들은 특히 늦가을이나 겨울이라면 차가운 밤공기는 피할 수 없는 문제점이 된다. 게다가 비가 내리는 날에는 공연을 취소해야 하는 단점도 있다. 관객으로서는 보다 나은 환경에서 관극하기 위해 일반적인 극장 나들이 때보다 조금 더 따뜻한 옷차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때에 따라서는 무릎을 덮을 수 있는 개인용 모포를 준비하는 등 세심한 배려가 필요할 수도 있다. 반면 야외인 데다 고궁 주변이 대개 녹지(綠地)여서 느껴지는 신선함은 고궁 뮤지컬에서나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역사 유적지가 서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수준급 공연장 수가 제한적인 지방 문화 환경을 감안하자면, 연례적인 고궁 뮤지컬 개발과 지역 순회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물론 객석 배치 방법이나 보다 입체적으로 고안되는 무대 디자인 등은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보완해야 할 과제들이다.

고궁 뮤지컬의 가장 큰 매력은 발상 전환에 담겨 있다. 모든 예술의 진보가 그러하듯, 닫힌 사고를 열고 선입견을 버리며 긍정적인 발상 전환을 덧붙일 때 문화는 비로소 만개할 수 있다. 이런 공연 부류의 개발과 성장을 꿈꾼다면 ‘사람 하기 마련’임을 잊지 말고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꾸준히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에 가면 그 공연은 꼭 보고 가야 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콘텐츠가 등장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관계자들 인식 전환을 기대해본다.

[원종원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뮤지컬 평론가]

style=padding-bottom:2px 옛 것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크박스 뮤지컬
style=padding-bottom:2px 뮤지컬의 주인공은 원래 한 명이다
style=padding-bottom:2px 뮤지컬 시장 아줌마 관객의 돌풍
style=padding-bottom:2px 복고 뮤지컬의 향수 마케팅, 그 성장 가능성은?
style=padding-bottom:2px 뮤지컬전용관을 확충해야 하는 까닭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