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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사별, 사업실패에 뇌종양까지 딛고 일어선 오뚝이 여성CEO

  • 박수호
  • 입력 : 2018.03.0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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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인사이드-105] 지독한 가난, 사별, 사업실패, 뇌종양…

한 여성에게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지금은요? 1500여 명의 청소관리 인력, 연매출 100억원에 달하는 굿모닝대양 대표 명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임희성 대표 얘기입니다. 특별히 기사 송고일을 3월 8일로 염두에 둔 것도 이런 극적인 스토리가 이런 날에 읽혔으면 해서였습니다.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인데요. 기본적으로 남녀 차별의 '흑역사'를 극복하고 여성의 권리 신장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여기에 더해 저는 임 대표로부터 여성 기업가정신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한 달 전쯤이었습니다. 우연히 서점에서 임 대표가 직접 쓴 '계단을 닦는 CEO'란 책을 접했는데요. 잠시 들었던 책은 한시간여 저를 그 자리에 잡아두었습니다. 사연 하나하나가 그렇게 기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성으로서 약자로서 좌절할 만한데도 또 그걸 그때마다 악착같이 극복해가고 있어 활자임에도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상황이 그려지더군요. 그래서 대뜸 출판사에 연락해 임 대표를 소개받았습니다. 직접 만나 그간의 인생 역정을 들어봤는데요.

내용은 이랬습니다.

원래 임 대표네는 전북 익산에서 소문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아버지는 지적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대 사업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제대로 꾸려가지 못했고 결국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습니다. 장녀인 그와 동생들에게 가난은 크나큰 멍에였습니다.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왔지만 집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그에겐 큰 비전이나 목표를 둘 시간이 없었답니다. 그는 "그저 제 인생 목적은 '삶을 살아내는 것'이었고 저뿐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를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나의 지상 과제였다"고 회고합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 전자부품 만드는 회사에 취업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외삼촌의 소개로 잠시 관공서 임시 공무원으로 일하기도 했지요. 그 시기 친구 소개로 만난 대학생 남편은 그에게 적잖은 위로가 돼 주었답니다. 행복도 잠시, 얼마 안 가 임신을 하게 되면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갑니다. 양쪽 집안의 질시와 반대가 당연히 컸고요. 혼인신고를 하고 작은 단칸방에 신혼살림을 차리기는 했지만 당시 대학생 신분 남편은 임신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방황했고 오히려 임신부인 아내에게 거친 폭언과 폭력을 휘두를 때도 많았다고 합니다. 남편은 아이 출산 후 얼마 안 돼 군대를 가버렸고 시댁에 혼자 남겨진 그는 눈칫밥을 먹느니 차라리 독립하자며 다시 친정으로 돌아오게 됐답니다.

생업을 다시 책임져야 했으니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해서 무작정 찾아간 곳이 남대문시장에 있는 옷가게 '옥동자'였답니다.

"남대문 장사는 아침부터 초저녁까지의 소매장사(소비자에게 직접 물건을 파는 것)가 있고, 밤부터 새벽까지의 도매장사(소매상들에게 물건을 파는 것)가 있어요. 소매장사 직원과 도매장사 직원을 따로 두지만 그때는 생계가 절박했기 때문에 소매, 도매를 모두 맡아 일하는 점원들이 많았어요. 제가 딱 그런 직원이었지요. 매출 기여도만큼 집에 더 갖고 갈 돈이 생겼기에 도매용 옷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훨훨 날아다녔고, 화장실 갈 시간, 식사 시간을 줄여가며 일했어요. 손님이 있든 없든 자리에 앉아 있지 않고 옷 정리를 하며 바쁘게 움직여서 장사가 잘되는 가게처럼 보이려고 노력했고 우리 가게에 한 번 들른 손님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기어이 우리와 거래를 트도록 유도했지요. 손님을 대할 때마다 '내 말을 꼭 들어주세요. 우리 물건을 꼭 사주세요' 하고 빌었는데 그게 통했던 거 같아요"

실제 그의 노력은 매출로 이어졌고 가게 주인은 그를 '복덩이'라 했습니다. 어느 정도 일이 손에 익고 집안 사정도 나아지는 게 보여갈 즈음 돌연 사건이 터집니다. 아이를 안고 면회를 가도 시큰둥하던 남편이 결국 군대에서 자살을 했다는 겁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살아내기 위해' 일을 하긴 했지만 상처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일터를 오가다가 군복 입은 사람을 따라서 버스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었다는군요. 가슴 찢어지는 사건이었지만 그는 '내가 기를 쓰고 하루를 살아내면 우리 가족은 밥다운 밥을 먹을 수 있다'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답니다.

그리고 1989년 마침내 남대문에서 본인 명의의 가게를 내며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때를 회상하며 책에 '성녀로 추앙받는 마더 테레사는 "고통은 성장의 법칙이고, 우리의 인격은 세계의 폭풍우와 긴장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참으로 근사하고 멋진 말이지만 막상 고통을 겪으며 살 때는 그것이 사람을 성장시켜준다는 이야기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살다 보니 정말 다른 길이 있었다'고 썼습니다.

임 대표가 지금의 일을 하게 된 건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대문시장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즈음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새시 사업을 하던 여동생 남편(제부)에게서 아파트나 빌딩을 청소하고 관리해주는 용역사업 제안을 받았답니다. 강남에 대규모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서는 것을 눈으로 목격한 그의 제부가 생각해낸 아아디어였습니다.

"지금이야 고상하게 '아웃소싱'이라고 표현하지만 당시만 해도 청소용역업은 너무나 생소한 업종이었어요. 입찰에 참여해야 하는데 대부분 알음알음이거나 아니면 '주먹'이 끼어 있다는 오명도 있었고요."

그런데 대형 아파트단지가 계속 들어서는 걸 보니 '말이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993년 대양기업(현 굿모닝대양)을 세우고 특유의 사교성과 성실함을 앞세워 청소 일감을 하나둘 늘려나갔지요.

"우리 일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이 공들인 만큼 보상을 받는다는 겁니다. 한번 수의계약을 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면 계약이 유지될 확률이 높아요. 무심하게 관리하면 계약이 파기되지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절대 밥을 굶지 않아요. 어떤 업도 마찬가지로 청소용역업 역시 거래처 확보가 성패를 좌우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는 게 좋더라고요. 예컨대 내가 관리하는 큰 아파트단지 옆에 작은 빌라가 있어 덤으로 청소해주다 보면 훗날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소독 용역이라도 따 올 수 있었어요."

그렇게 그는 서울·수도권은 물론 인천·제주·수원·수안보 등 전국으로 거래처를 늘려나갔습니다. IMF 외환위기 때도 이 업종은 특별히 영향을 받지 않았고 무난히 매출액 100억원을 돌파했다네요.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아름다운 얘기인데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다시 시련은 찾아옵니다.

첫 번째는 건강 이상. 어느 날 운전 중 눈이 침침해 병원을 찾았더니 뇌종양 판정이 나왔답니다. 시신경을 누르고 있어 이후 5번의 크고 작은 수술을 했지만 완치보다는 뇌종양을 친구처럼 여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급했나 봅니다. 신사업에 손을 댔는데 이게 또 훗날 발목을 잡았다네요.

"뇌종양 발병 후 내 인생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가족의 미래를 탄탄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겼어요. 내가 이대로 죽으면 딸과 친정 식구들은 먹고살 길이 없어질 거라는 걱정 때문에 외식업에 손을 댔습니다."

그는 서울 면목동의 어머니가 소유하고 있는 건물 1층에 매운갈비 전문점을, 뒤이어 서초동 사무실 자리에 막국수 전문점을 차렸습니다. 음식이 꽤 맛있으니 곧 입소문이 났고 두 식당 모두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땀 흘린 만큼 장사가 잘되자 신바람이 났답니다. 그래서 추가로 가산디지털단지에 1000여 명이 동시에 이용 가능한 구내식당을 냈습니다.

"어차피 나는 새벽시장에 나가 장을 봐야 하니까 하나 더 해보지 뭐, 물 들어올 때 배 젓자 하는 생각에 시작했는데 이게 패착이었습니다. 구내식당 자리에 뷔페식당을 차렸는데 식권으로 식사를 하는 공장직원들의 생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콘셉트였어요. 한 끼 식사 간단히 하는 게 구내식당 성공 공식인데 뷔페는 인당 체류 시간이 길었던 거죠. 기업 단체 구매도 안 들어오니 원래 잘되던 기존 2개 식당까지 처분해 이쪽에 올인을 했는데 '밑 빠진 독'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20억원 이상 손실을 내고 개인 재산은 거의 없다시피 잃었습니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신용불량자 신세가 된 겁니다. 그래도 청소용역업은 법인 형태로 남아 있어 그나마 버티고 있었기에 재기할 수 있었지만 그때 그는 "실패는 누구의 삶에도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특히 세상일이 내 뜻대로 되는구나 하고 신바람이 났을 때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패라는 결과에 매달리지 않아서"라고 회고합니다.

"그 이후에도 환경을 탓하며 주저앉기 싫어서 여러 가지 시도를 많이 해봤어요. 하지만 부푼 꿈을 안고 시작했던 방법들은 내 기대를 채워주지 못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빵빵한 인맥을 앞세워 큰소리치며 영업 계약을 맺었던 사람이 한 건의 계약도 따오지 못해 몇 개월간 몇천만 원의 손실을 보기도 했어요. 어떤 이는 믿고 손을 잡았는데 회사의 정보를 쏙 빼먹고 떠나기도 했고요. 시장에서 흔히 말하는 테크닉은 내 기대를 배반했습니다. 대신 기대를 배신하지 않은 건 제가 흘린 땀방울이 유일했습니다. 누구나 성공 노하우를 좇아요. 하지만 그보다 실패를 하지 않는 방법, 실패하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마음 근육을 키웠을 때 힘든 일을 맞닥뜨려도 주저앉거나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런 뜻과 마음을 담담히 정리해 책을 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임 대표는 한번 망해봤으니 언젠가 다시 한번 식당에 도전해보겠다네요. 장사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단지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시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보다도 고비를 넘길 줄 아는 뚝심이 있어야 한다는 지론이 생겼답니다. 또 '꼭대기, 봉우리만 보면 안 된다. 밑바닥과 땅 밑까지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더군요.

그 외 행보는 어떤 게 있을까요?

"청소용역업을 하다 보니 새롭게 연계할 수 있는 사업이 무궁무진하더군요. 아파트 경비, 청소를 하다 보면 개별 가정의 청소 대행 수요도 생기고 요즘 유행하는 꼬마빌딩 대행 수요도 보여요. 대형 아파트단지는 보안 경비 때문에 방문판매원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데 저희 같은 회사는 오히려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우니 연계 마케팅, 영업을 할 수 있는 플랫폼 역할도 할 수 있겠더라고요. 이처럼 새로운 일거리를 제공하는 창직자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박수호 매경이코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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