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프리미엄비하인드스토리

대표 공업도시 울산, 조선시대엔 유명했던 소금 생산지

  • 서대현
  • 입력 : 2018.05.02 06:01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1930년대에 사라진 울산 남구의 옛 삼산염전 전경 /사진=울산 남구
▲ 1930년대에 사라진 울산 남구의 옛 삼산염전 전경 /사진=울산 남구


[전국구 와글와글-38] "죽령 이남 사람치고 울산 소금 안 먹은 사람 없다."

음식을 만들 때 빼놓을 수 없는 소금과 관련해 울산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혹자는 죽령 대신 추풍령 이남이라고도 한다. 이 말을 통해 과거 울산에서 소금이 생산됐고, 영남 지역에 유통될 만큼 그 양도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울산 소금은 국가에 납부하는 공납 품목일 정도로 유명했다. 소금 장수는 무거운 소금 가마를 등에 지고 해발 1000m가 넘는 험준한 산들이 모여 있는 영남알프스를 넘어 울산 소금을 전국 각지에 전달했다.

울산의 염전은 태화강 하구와 해안가에 주로 위치했다. 1934년 '울산읍지'에 따르면 염전은 삼산동, 명촌동, 돋질산 부근, 청량면 마채에 있었다. 특히 높은 빌딩과 백화점 등 상업시설이 몰려 있는 울산 최대 번화가 삼산동은 울산 소금의 주요 생산지였다.

삼산동은 상업지역으로 개발되기 전 '삼산들'로 불렸던 거대한 농지였고, 그 이전에는 염전(소금밭)이었다. 울산 소금 연구가 배성동 씨(소설가)는 "울산에서 가장 큰 상업지역이 염전이었다는 기록을 감안했을 때 울산 염전은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울산에서 생산된 소금은 굽는 과정을 거쳐 만드는 자염(煮鹽)이었다. 원영미 울산대 교수가 쓴 '소금포구의 전설, 염포 이야기'에 따르면 자염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얻어진다. 먼저 모래와 바닷물을 섞어 소금모래를 만든 뒤 물을 부어 소금물을 얻는다. 이 소금물을 염막(소금막)의 솥에 옮겨 담는다. 마른 소나무 가지로 소금물이 들어 있는 솥에 불을 지피면 수분이 증발돼 소금이 나온다. 소금에서 수분을 빼기 위해 굽는 과정을 반복한다. 염막에서 소금을 굽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이틀 정도였다. 소금 생산은 주로 음력 3월에서 7월 사이에 이뤄졌다. 이 시기는 멸치잡이 시기와 겹친다. 멸치 젓갈을 만드는 데 소금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울산 소금은 1906년 천일염 제조 방법이 들어오면서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서해안과 남해안이 주요 소금 생산지가 되고, 일제 강점기에 삼산동 염전이 수리조합 사업을 통해 농지로 개간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1928년 일제가 삼산들에 비행장을 설치한 뒤 염전은 눈에 띄게 사라졌다. 그나마 남은 염전도 1960년 이후 산업화 과정에 없어졌다.

소금은 울산 경제력을 뒷받침하는 자원이었고, 개인적으로는 부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배성동 씨에 따르면 산업화로 사라진 명촌염전 염주(염전 주인) 김택칠 씨는 울산의 거부 김홍조 씨의 조카였으며, 1800년대 후반 울산의 소금 거상 김규한 씨의 손자였다.

50년 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울산 소금은 최근 울산 남구청이 문화관광 자원으로 개발키로 하면서 재조명받고 있다. 남구는 과거 삼산동과 돋질산 염전이 있는 울산 최대 소금 생산지였다는 것에 착안해 소금을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에 대한 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24일에는 용역 중간 보고회를 열었고, 오는 8월 최종 보고회를 개최해 울산 소금을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세부적인 추진 방안을 수립할 예정이다.

서동욱 울산 남구청장은 "울산의 소금 역사와 전통 제염법, 소금길과 소금 이야기가 사라지기 전에 기초 자료를 확보해 소금을 새로운 문화관광 자원으로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울산/서대현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