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프리미엄비하인드스토리

파렴치범 몰린 지난 5년 누명 털어낸 남구현 박사

  • 원호섭
  • 입력 : 2017.09.14 15:01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남구현 박사 /사진=이승환 기자
▲ 남구현 박사 /사진=이승환 기자
[뉴스&와이] "지난 5년 동안 파렴치범 취급을 당했습니다. 이제 마음 편히 연구하고 싶습니다. 떳떳하게요."

2012년 5월, 남동공단 출신 용접공이 세계적 과학 학술지 '네이처' 표지 논문을 게재해 화제가 됐다. 미국 UC버클리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남구현 씨(37)가 주인공이었다. 무작위하게 일어나는 균열을 제어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낸 남씨의 논문은 국내 과학자로만 이뤄진 연구진이 네이처 표지를 장식한 첫 연구로 꼽힌다. 대구 능인고 재학 시절 수석을 다퉜음에도 IMF 외환위기로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점, 이후 서울대 물리학과에 진학한 친구에게 미적분학과 물리학 책을 얻어 공부했다는 점 등이 알려지면서 남씨는 화제가 됐다.

오래가지 못했다. 논문이 발표되고 한 인터넷 웹사이트에는 남씨가 자신의 연구 성과를 가로채 논문을 쓴 뒤 자신의 이름을 저자에 넣지 않았다는 이화여대 대학원생 A씨의 글이 올라왔다. A씨는 "균열 제어 방법을 발견했으며 실험을 모두 직접 진행했다"고 적었다. 여론은 들끓었다. 교수가 권위를 이용해 제자의 성과를 가로채는 일이 종종 벌어졌던 만큼 용기 있게 이를 고백한 A씨에게는 응원의 글이, 남씨에게는 비난의 글이 쏟아졌다. 남씨는 교수라기보다는 박사후연구원이었고 A씨는 지도교수 B씨가 따로 있었다. B교수는 A씨와 함께 남씨를 비난했다. 이미 여론은 돌아섰다. 이화여대는 자체 조사를 통해 남씨에게 네이처 논문에 A씨의 이름을 넣으라고 권고했다. 남씨는 "A씨의 글은 거짓"이라며 "이화여대 조사위원회는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법원'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5년이 지난 2017년 7월 21일, 대법원에서 최종 선고가 내려왔다. 남씨의 승리였다. 남씨는 "1심, 항소심, 대법원을 거치며 판결이 날 때마다 기쁨보다는 한숨이 나왔다"고 이야기했다. 남씨가 원했던 것은 대학원생 A씨와 지도교수 B씨의 사과였다. 하지만 항소심이 끝날 때까지도 두 사람은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남씨는 이들을 상대로 민사소송까지 시작해야만 했다.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A씨의 글은 허위였다. 남씨와 A씨 사이에 오고 간 이메일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법원은 "남씨가 A씨에게 실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시한 점, A씨의 연구노트에는 남씨가 이야기한 점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는 점, A씨가 독자적인 연구를 한 적이 없고 이 논문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A씨가 인터넷에 올린 글은 남씨를 비방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고 인정된다"고 밝혔다.

남씨를 최근 국민대의 한 연구실에서 만났다. 그는 국민대에서 시간강사를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래는 일문일답.

-대법원 판결이 났습니다.

▷모두 이겼지만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제가 조금이나마 가르쳤던 대학원생인 만큼 학생을 상대로 형사소송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림돌이었습니다. 하지만 A씨가 올린 글로 파렴치범이 됐습니다. 연구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 과학기술계는 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제 말을 들어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떳떳한 마음으로 연구를 해도 되지 않을까요.

-5년 전부터 A씨는 저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A씨의 글이 허위라는 사실을 입증할 이메일이 있었습니다. 실험을 진행했을 때 제가 지시를 내렸고 A씨는 그것을 따랐습니다. 판결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균열을 제어하는 아이디어는 제가 미국 박사과정에 있을 때 이미 구상했던 연구였고 실험도 상당히 진행된 상황이었습니다.

-실험을 했다면 저자에 넣어주는 것이 학생을 가르치는 '선배 연구자'로서 당연한 일이라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논문에 기여했다면 넣어주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A씨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실험도 A씨만이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디어를 제시했다고 하는데 판결문에 나와 있듯이 그렇지 않다고 밝혀졌습니다. A씨는 논문의 내용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공판에서 논문의 내용과 실험에 대한 재판장의 기본적인 질문에도 A씨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고, 이는 판결에 중요한 근거 중 하나로 인정되었습니다. 논문을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저자에 들어가는 것이 맞는 것인가요? 처음 논문을 쓸 때도 저자들끼리 "FM으로 하자"고 이야기가 된 상태였습니다. A씨는 '사사(감사의 글)'에 이름을 넣었습니다. A씨도 저와 일하면서 배운 것이 있는 만큼 사사에 넣는 것이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저자에는 논문 실험을 하지 않은 B교수(A씨의 지도교수)의 이름이 2저자로 들어가 있습니다.

▷B교수와는 제가 미국에서 오기 전에 저자에 넣기로 이미 약속을 한 상황이었습니다. B교수는 저의 실험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도 학생인 A씨에게 함께 연구하라고 한 것이고요. 처음 B교수는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회의에도 참석했고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B교수의 이름을 2저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이메일에 남아 있듯이 B교수는 '정치적 이유'로 제게 교신저자를 요구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교신저자에 넣지 않자 B교수 역시 저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유명한 교수들이 A씨를 도왔다고 들었습니다.

▷모두 한국 과학기술계에서 유능하신 분들입니다. 이들은 "대학원생이 실험을 했다면 관행적으로 저자에 넣어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판사는 "잘못된 관행이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논문의 사사에는 KAIST 학생들의 이름도 들어가 있습니다. 이들은 A씨와 비교할 때 더 많은 연구와 실험을 했습니다. 이들은 저자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강압적으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관행이라고 합니다.

▷"네가 한국에서 연구를 안 해봐서 그런 것 같다. 한국은 원래 이렇게 한다. 저자 한 명 늘리는 게 뭐가 어렵냐"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저자 수가 적어야 교수 임용에 유리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저자에 대한 제 원칙은 변함없습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A씨의 이름을 넣지 않았을 것입니다. A씨와는 논문이 발표되기 1년 전인 2011년 1월부터 함께 연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A씨가 있던 연구실에 문제가 있었고, 저는 그 실험실에서 사실상 왕따를 당했습니다.

-이화여대 조사위원회는 A씨의 이름을 논문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이화여대는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지만 B교수는 이화여대 조사 과정에서 저를 음해하는 발언까지 했습니다. 이화여대는 저와 A씨가 주고받은 이메일조차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저와 A씨, B교수의 말만 듣고는 제가 잘못했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번 판결은 논문의 저자에 오르려면 연구에 어떤 기여를 해야 하는가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전 교수의 지위(교수도 아니었습니다만)를 이용해서 강압적으로 연구 성과를 뺏은 적이 없습니다. 연구논문의 저자에 오를 수 있는 범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민사도 진행했다고 들었습니다. 민사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A씨는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민사라도 하면 A씨와 B교수가 사과할 줄 알았습니다. 진정 어린 사과와 인터넷에 올린 글의 삭제, 이것이 제가 원한 전부였습니다. 돈은 제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민사에서 이겨서 얼마의 돈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모두 이화여대에 계신 청소 노동자들의 복지를 위해 기부하겠습니다. 제가 바란 건 사과입니다.

-5년 동안 무엇을 하며 지내셨나요.

▷사건이 터지고 집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2012년 9월쯤 되니까 연구가 하고 싶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박사후연구원에 지원했습니다. 처음에 "논란이 있는데 받아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좌절했습니다. 두 달 동안 무적자로 KIST에서 일을 했습니다. 마침 임태훈 KIST 센터장(현재 부원장)이 "논란이 된다는 이유로 똑똑한 친구가 연구를 못하게 하면 안된다"며 절 받아주셨습니다. 우덕하 KIST 박사님도 절 도와주셨습니다. 센서, 회로와 관련된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야 하는 연구가 끝나면 실험실에 남아 홀로 균열 연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밤을 새운 적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3년이 흘렀습니다. 균열과 관련된 논문도 한 편 썼지만 많은 연구를 할 순 없었습니다. 이후 시간강사를 했습니다. 학교에 있어야 논문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파렴치범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못한 일들이 많았나요.

▷모 대학 교수 제의를 받았지만 제자의 성과를 가로챘다는 소문을 듣고 계약 조건을 바꿨습니다. 5년 뒤 모든 교수들의 동의가 있으면 정교수로 임용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친한 연구자에게 물어보니 "굴욕적"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고민 끝에 거절했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절 도와주신 분들도 많았지만 전 여전히 파렴치범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터넷에 제 이름을 검색하면 금방 나옵니다. 심지어 한 교수는 이번 사건이 실험 윤리 위반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했습니다. 제 이름과 얼굴 사진이 그대로 노출된 채로요.

-그 시간 동안 법학을 공부했다고 하셨습니다.

▷사이버대학에서 학사를 받고 방송통신대에서 석사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판결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인공지능을 떠올렸습니다. '계산인권과 인공지능 법 판단'이라는 주제의 석사 논문을 쓸 수 있던 이유였습니다. 8월 30일 방송통신대를 졸업했습니다. 올해부터 UC버클리 법학 석사과정에 진학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균열 연구는 뭘 하고 있나요.

▷밀링머신과 작은 현미경을 구매한 뒤 집에 작은 실험실을 차렸습니다. 중국에서 거북이 등껍데기도 샀고요. 과거 은나라에서는 거북이 껍데기에 나타나는 균열로 나라의 중대사를 정했습니다. '갑골점'이라고도 합니다. 은나라의 왕이 균열을 조절할 수 있다면, 통치 과정에 이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련 연구를 했던 숙명여대 양동숙 교수님을 찾아가 관련 연구 내용을 묻고 조언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한국에서 계속 연구를 하실 건가요.

▷한국에 남아서 연구하고 싶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제가 정말 한국에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혹자는 제 성격이 이상하다고 말합니다. 미국의 지도교수와도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균열 아이디어를 지도교수에게 처음 이야기했고, 지도교수는 부정적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제게 말했습니다. 지금 지도교수는 학생들에게 "과거 내가 거절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네이처 표지를 쓴 제자가 있다. 그러니 너희들도 교수들이 아이디어가 좋지 않다고 해도 연구를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판결이 난 뒤에 가장 먼저 연락을 드린 사람도 지도교수였습니다.

[원호섭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