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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꿈꾸는 붕어' 정고암 새김아티스트 인터뷰

  • 문광민
  • 입력 : 2018.10.04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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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정병례 전각예술가(72)가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해례본을 새긴 작품 ‘하늘땅사람물불바람’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영상제작인턴
▲ 고암 정병례 전각예술가(72)가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해례본을 새긴 작품 ‘하늘땅사람물불바람’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영상제작인턴
[뉴스&와이] '인장(印章)은 왜 밑면에만 새길까?'

당연해 보이는 사실을 뒤집는 데서 고암(古巖) 정병례 작가(72)의 예술 인생은 비롯했다. 의류 공장에서 일하던 1970년대 초, 그는 우연히 접한 인장 작업에서 영감을 얻었다. '아랫면뿐 아니라 육면에 걸쳐 글씨와 그림을 입체적으로 새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을 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품어 온 예술인으로서의 삶을 드디어 펼쳐낼 기회를 포착했다. 전각에 입문하던 그해, 그의 나이 27세였다.

예술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고독했다.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기 위해선 굳은 다짐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고암의 작품 세계를 알아주지 않았다. 작가들 사이에선 '정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당했다. 더러는 "전각이 아니다"며 고암의 작품 그 자체를 부정했다. 무관심과 몰이해 속에서도 고암은 꿈을 놓지 않았다. 포기하는 대신 그는 '바다를 꿈꾸는 붕어'를 자처하며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전각에 몰두하는 그 시간이 그저 벅찼다.

고암은 '주인으로서의 삶'을 강조한다. 이미 만들어진 길을 그대로 답습하기만 하는 것은 예술인이 아닌 기능인의 자세라는 게 고암의 지론이다. 예술가라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자기만의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탄생하고 변화했다. 그는 밑면만 새긴 인장을 보고 육면의 작품을 떠올렸다. 2006년 '새김아트'를 창시하면서, 전서체(篆書體) 한자만 새겨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전각(篆刻)을 '새김'의 예술로 끌어올렸다. 한글이 제아무리 뛰어난 문자 체계라도 전각예술 특성상 표음문자인 한글은 상형문자인 한자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명제가 잘못됐음을 그는 작품으로써 증명해 보였다. 모두 기존의 것들을 뒤집은 결과물이다. 아이디어의 원천이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반전시키는 데 있다는 그의 말은 평소 지론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늘 아래 서면 가을이 느껴지던 지난 9월 서울 종로구 삼청동 작업실에서 고암을 만났다.

―새김아트란 무엇인가?

▷'새김'이라는 것은 '마음에 새기다' '가슴에 새기다' 등 어떤 것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걸 뜻한다. 그걸 모아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거나 발견하기 위해 만든 게 '새김아트'다. 새김은 단순히 물질에다만 새기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전각이란 무엇인가?

▷한자의 서체 중 가장 조형성이 짙은 전서체(篆書體)를 구사해 인(印)이라고 하는 한정된 세계에, 한정된 공간에 사람의 정성을 심는 동양 순수예술을 가리켜 전각이라고 부른다. 전서를 새긴다는 그 어원 때문에 혹자는 전각을 서예의 아류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전각은 전서뿐만 아니라 그림, 문양 모든 걸 새길 수 있다. 또 한자만 새기는 게 아니라 한글, 영문도 새길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전각이다.

―새김아트와 전각의 뿌리는 서예인가?

▷아니다. 전각은 문자 이전에, 원시 미술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게 맞는다. 암각화가 일례다. 어쩌면 전각은 문명 이전부터 시작했는지 모른다. 어떤 문양이나 부호를 새긴다든가 작대기를 긋는다든가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전각에 입문한 계기는?

▷나는 아티스트가,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일러준 사람은 없었다. 그저 내가 찾은 것이다. 어느 날 인장을 이렇게 새기는 걸 봤다. 밑면만 새기는 걸 보고서 의문이 들었다. '옆에다가도 새길 수 있고, 그림도 새길 수 있고, 꼭대기에 조각도 할 수 있고 다 할 수 있는데 왜 밑면만 새길까.' 이걸 내가 좀 극대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역량을 다 담아낼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존과 다른 걸 시도하면서 어려움이 많았겠다.

▷항상 있었다. 지금도 있다. 이해를 못하니까. 그리고 주변이 다 이해하고 수집가가 다 이해하면 그건 이미 예술이 아니고 '기술'이다. 이미 지나간 거다. 그러니까 이해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걸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은 믿음이다. 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수집가들이 작가의 삶의 행적을 보기보다 그 사람의 학력이나 배경을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을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몰라보던 때 고민이 상당했겠다.

▷그걸 못 견디면 작가가 아니다. 훤하게 밝혀진 길은 누구나 가는 길이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길이고. 예술가는 길이 없는 길을 자기가 만들어서 가야 한다. 어디서 끝날지도 모르고 제대로 갈지도 모르는데 모호한 꼭짓점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것이다. 거기서 살아남는 놈이 작가다.

―작가로서 새김아트에서 느끼는 매력은?

▷이건 멀티예술이다. 새김아트와 전각은 크게 세 요소로 이뤄진다. 글씨를 쓰는 자법(字法), 문체를 만드는 장법(章法), 칼로 새기는 도법(刀法) 등 3요소가 어우러져 작품이 완성된다. 자법·장법·장법은 각각 지적 기능, 감성적 기능, 육체적 기능을 필요로 한다.

이 중에서 칼로 새기는 게 제일 어려운 작업일 거라는 오해가 있는데 사실은 그게 제일 쉽다. 서예도 나중엔 고민거리가 안 된다. 문제는 장법이다. 이것 때문에 고민한다. 설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할 일이 많다.

전각 작품 하나를 '한 과'라고 부른다. 크지도 않다. 보통 3㎝ 이내다. 이걸 한 과 만드는 데 대궐 한 채를 지은 만큼의 공력이 든다고들 그랬다. 큰 집을 한 채 지을 만큼의 공력이 든다고. 과장이 좀 심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 정신적 에너지가 많이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본인이 생각하는 '새김'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

▷동양의 음양(陰陽)과 허실(虛實)이 전부 다 들어맞는다. 전각은 원래 허실의 싸움이라고 한다. 새김에는 찰나만이 존재한다. 시작점을 특정할 수 없다. 최초의 시간, 최초의 찰나에서 창조가 나온다. 돌에 홈을 파낼 때를 생각해봐라. 이랑은 고랑 때문에 생기고, 고랑은 이랑 때문에 생긴다. 어떤 것이 먼저라고 할 게 없다.

―한글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

▷한 25년 됐다.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처음에는 기역, 니은, 디귿 등 자음만 가지고 했다.

―한글을 모티프로 삼게 된 계기는?

▷한자를 쓰면 '차이나 알파벳'이라고들 하는 게 싫었다. 사실 한자도 우리 문자라지만 작품을 세계에 내놓았을 때는 그게 어필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글 'ㄱ' 'ㄴ' 'ㄷ' 등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자니 획 사이에 빈 공간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다들 시도하지 않았다.

―전각에서 한글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했나?

▷역발상적으로 했다. 글자의 빈 공간에 물고기나 다른 그림을 채워 넣었다. 배경을 문양으로 보이게 하고, 글씨를 배경으로 바꾼 것이다. 한글로 한자의 상형성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이런 시도를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의 주인으로서의 삶이다. 잘나가는 무언가를 본뜨지 않고 내 힘으로 걸어갈 수 있는 에너지를 드리워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나의 정체성이 뭐냐, 세계 무대에 날 내놔도 내가 정고암이고, 한국놈이고, 코리아놈이라는 걸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뭐냐, 바로 이거다. 말로만 세계 어느 문자보다도 한글이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작품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작품으로 드러내는 게 제일 쉽다.

―요즘 이런 것들 덕분에 행복하다, 꼽아보면?

▷제가 드디어 현대미술이라고 하는 데서 이름이 언급됐다. 말하자면 70대 신예 작가가 됐다. 그동안 나는 소위 주류라고 하는 곳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왔다. 그동안 계속해 온 작업이지만, 유명 평론가와 다른 작가들로부터 새롭게 늦게나마 인정받은 것이다.

―아이디어의 원천은?

▷아이디어는 일상에서, 그리고 자신의 성찰에서 온다. 자신의 생각을 계속해서 반전시키는 것이다. 나는 무식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

―40여 년간 흔들림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배경은?

▷나는 거르는 걸 잘했다. 지엽적인 것을 자꾸 쳐냈다. 나는 내 능력으로 소화하지 못할 것은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 크게 보고 멀리 보려고 했다. 자꾸 딴짓을 하다보면 그 재미에 빠져서 가고자 하던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건강하게 작품 열심히 하는 것. 날마다 한 시간씩 삼청동 성벽을 한 바퀴 돌고 있다. 북악산 성벽을 손바닥으로 치고 내려오는 데서 에너지를 찾으려 한다.

[문광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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