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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엘체(El Che) - '체 게바라'의 자존심 쿠바 의사들은 왜 브라질에서 짐싸야 했나

  • 김인오
  • 입력 : 2018.11.29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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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로 엿보는 중남미-1] <소개글> 김인오 매일경제신문 기자가 전하는 시끌벅적 중남미 이야기. 비행기를 타고도 30여 시간 떠나야 하는 머나먼 땅, 20세기 '냉전의 시대'와 식민지 시절 그림자를 털려는 중남미 나라들의 좌충우돌 사연을 전한다. 몽상가가 아닌 진짜 '혁명 아이콘' 체 게바라와 쿠바부터 '좌파 포퓰리즘 원산지'가 된 아르헨티나, '열대의 트럼프'가 사는 브라질, '마약상의 굴레'를 쓴 멕시코, '캐러밴'으로 유명해진 커피의 나라 과테말라·온두라스까지 '넷플릭스' 망원경으로 살짝 들여다보자.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엘 체(El Che)' /출처=넷플릭스 캡처

◆'열대의 트럼프' 브라질 극우파 보우소나루 대통령 당선인 등쌀에 쿠바 의사들 눈물의 쿠바 송환

24일 브라질에서 돌아온 의료진을 마중나온 라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출처=쿠바 관영매체 쿠바데바떼
▲ 24일 브라질에서 돌아온 의료진을 마중나온 라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출처=쿠바 관영매체 쿠바데바떼

지난 23일 금요일 새벽 5시께(현지시간),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 비행기 하나가 고단한 여정을 끝내고 미끄러지듯 활주로에 들어왔다. 브라질리아 국제공항에서 쿠바 아바나시 호세 마르티 공항까지 꼬박 일곱여 시간이 걸렸다.

23일 브라질에서 돌아온 의료진을 마중나온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의사들. /출처=쿠바 관영매체 후벤투트레벨데
▲ 23일 브라질에서 돌아온 의료진을 마중나온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의사들. /출처=쿠바 관영매체 후벤투트레벨데

쿠바 의사 211명이 복잡한 심경으로 '일류신(IL)-96-300' 기종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입국장엔 대통령 격인 미겔 디아스카넬 국가평의회 의장(58)과 호세 앙헬 포르탈 보건부 장관 등이 1차 귀국 의료진을 마중하러 나와 있었다. 감개무량한 듯 의장 손을 잡는 할아버지 의사나, 의장 옆에서 '셀카'를 찍는 아가씨 의사 모두 '열대의 트럼프(tropical Trump)' 라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당선인이 얄미울 터다.

일류신-96-300은 쿠바나 항공이 러시아에서 들여왔다. 사실상 은퇴한 여객기이지만 미국발 경제 제재로 힘든 쿠바에선 소중한 존재다.

많아야 200여 명을 태울 수 있는 비행기를 의사들이 차례차례 나눠 타고 들어왔다. 24일에는 아흔 세를 앞둔 라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87·현 쿠바 공산당 제1서기)가 201명 의료진을 맞이하러 비행장에 나와 섰다. 다음 날도 203명 의료진이 장관들의 마중을 받으며 공항을 나왔다. "역사가 나를 용서하리라"는 말로 유명했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가 90세로 사망한 지 2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지난 27일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범미보건기구(PAHO)는 23일부터 이날까지 '더 많은 의사들(Mais Medicos)'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브라질에서 활동한 쿠바 의료진 중 1307명이 브라질을 떠났다고 밝혔다. 쿠바데바테와 브라질G1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달 초 '더 많은 의사들' 차원에서 브라질에서 활동 중인 쿠바 의사는 8332명이다. 하지만 보우소나루 당선인의 원색적 비난에 자존심이 상한 쿠바 정부는 다음 달 중순까지 의료진을 철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좌)과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좌)과 '브라질판 트럼프'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당선인 /출처=buzzworthy.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가 쿠바·베네수엘라·니카라과를 '폭정의 트로이카'라며 추가 경제제재를 발동한 이달 1일 이후, '열대의 트럼프' 보우소나루 당선인은 부쩍 쿠바에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더 많은 의사들' 프로그램을 겨냥해 "우리나라에 있는 '쿠바 노예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쿠바 독재정권을 먹여 살리고 있다"면서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어 "의사들이 받아야 할 월급 중 75%가 쿠바 정부에 돌아간다. 과연 이런 나라와 외교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라면서 절교 가능성도 시사한 바 있다.

◆ 핑크타이드 속 피어난 브라질·쿠바의 의료복지作 '더 많은 의사들'

브라질 아마존 우림지역에 파견된 쿠바 의사가 아기를  검진하고 있다. /출처=Araquem Alcantara·쿠바 관영매체 그란마
▲ 브라질 아마존 우림지역에 파견된 쿠바 의사가 아기를 검진하고 있다. /출처=Araquem Alcantara·쿠바 관영매체 그란마

'더 많은 의사들'이 뭐길래 이런 걸까. 이건 사실 브라질 의료복지정책이다. 중남미 대륙에서 '핑크타이드(pink tide·사회주의 성향 좌파 정부 집권 물결)'가 남은 힘을 발하던 2013년 당시 좌파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이 쿠바 라울 카스트로 정부와 손잡고 시작해 5년째다.

좌파 정부 정책이라고 무조건 포퓰리즘인 건 아니다. PAHO에 따르면 2013년 당시 브라질에선 '읍' 정도 되는 4000곳 작은 마을 6300만명 주민이 전혀 의료 혜택을 받지 못했다. 힘만 들고 돈이 안 될 것 같은 곳엔 서비스가 없는 것이 시장 원칙이다. 브라질 보건부가 지난해 외딴 삼림 구역이나 작은 마을에 상주할 '더 많은 의사들'을 모집하기 위해 2320개 의사 일자리를 국내 공모했는데 6285명이 지원했다. 3대1 경쟁률이었지만 현장 배치 브라질 의사 중 3분의 1일이 1년도 되기 전에 그만뒀다.

브라질 아마존 우림지역에 파견된 쿠바 의사가  동네 아이들과 걷고 있다. /사진=Araquem Alcantara·쿠바 관영매체 그란마
▲ 브라질 아마존 우림지역에 파견된 쿠바 의사가 동네 아이들과 걷고 있다. /사진=Araquem Alcantara·쿠바 관영매체 그란마

쿠바 의사들이 없으면 괴로운 건 당연히 브라질 오지다. 원주민 주거지 34곳 의사는 총 372명인데 이 중 301명이 쿠바 의료진이라고 24일 가디언이 보도했다. 같은 상파울루주 소속이지만 수도 상파울루시와 달리 '오지'인 임부과수(Embum-Guacu)가 대표적인데 지난주만 해도 쿠바 의사 19명이 주민 7만여 명을 돌봤지만 주말 이후 남은 의사는 두 명뿐이라고 한다.

◆체 게바라 표 '혁명 의사'들이 만든 쿠바의 세 갈래 의료 외교

보우소나루가 '노예'라고 말했던 의사들은 사실 '쿠바의 자존심'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엘 체(El Che)'에서처럼, '영원한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가 의사 출신이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쿠바가 의사의 나라가 된 것도 1953년 7·26 혁명 이후 그를 포함한 '건국의 아버지'들이 교육·농업(부동산)·의료 3대 개혁을 우선 추진한 결과다.

의대생 체 게바라(오른쪽)가 남미 여행 중 페루 아마존 강가 한센병원에서 친구(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환자를 돌보던 시절 찍은 사진. /출처=넷플릭스 캡처
▲ 의대생 체 게바라(오른쪽)가 남미 여행 중 페루 아마존 강가 한센병원에서 친구(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환자를 돌보던 시절 찍은 사진. /출처=넷플릭스 캡처

체 게바라는 '의료 접근성'을 강조했다. 1969년 8월 '혁명의사' 연설에서 그는 "의사는 씨를 뿌리고 가꾸는 농부와 같다"면서 "몇 달 전만 해도 아바나에서는 신참 의사들이 수당부터 따지면서 시골 발령은 싫어했다. 어디서 무슨 일이 생겨도 의사는 환자와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하고 그들의 마음 깊은 곳까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의과대학 실습실에서 해부용 시신을 두고 찍은 단체 사진(세번째 줄 오른쪽에서 여섯번째가 체 게바라) /출처=넷플릭스 캡처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의과대학 실습실에서 해부용 시신을 두고 찍은 단체 사진(세번째 줄 오른쪽에서 여섯번째가 체 게바라) /출처=넷플릭스 캡처

미국·소련을 양 극단으로 둔 '냉전의 시대'인 1960년대, 쿠바는 '의료 국제주의'를 내걸었다. 1963년 알제리 독립전쟁 지원 차원에서 의사들을 보냈다. 2010년 아이티 지진 당시 피델 카스트로가 의사를 파견하며 "우리는 군대가 아닌 의사를 보낸다"고 했던 건 유명한 말이 됐다.

쿠바가 혁명정신으로만 가득찬 건 아니다. 의료 인력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외교수단이다. 하나는 앞서 알제리·아이티 사례 같은 '박애주의 혁명' 차원이다.

두 번째는 '우방국 간 무역·우정 다지기' 차원이다. 2013년 브라질과 한 '더 많은 의사들'도 여기에 속한다.

쿠바는 의료 서비스를 베네수엘라나 볼리비아, 과테말라나 감비아 같은 나라와 물물교환 형식으로 활용했다. '석유 부자' 베네수엘라 원유와 쿠바 의료 서비스를 맞바꾸는 식이다. 뜻이 잘 맞는 바람에 2004년 두 나라는 박애주의 차원에서 '기적의 수술(Operacion Milagro)'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베네수엘라가 돈을 대면 쿠바가 의료 인력을 채우는 식이다. 쿠바데바테는 "10년간 파키스탄과 인도네시아, 앙골라 등에서 300만 명이 안과 치료를 받았다"고 2014년 9월 10일 보도한 바 있다.

카타르 수도 도하에 있는 쿠바 병원 /출처=카타르 트리뷴
▲ 카타르 수도 도하에 있는 쿠바 병원 /출처=카타르 트리뷴

세 번째는 외화 벌이다. 카타르는 의료 체계가 마땅치 않던 차에 쿠바 의사와 의료 시스템을 돈 주고 들여왔다. 카타르는 석유 부국이지만 공산주의와 관련 없다.

거래가 잘 맞는 바람에 2012년 카타르 수도 도하에 '쿠바 병원(Cuban Hospital)'도 세웠다. 쿠바 의료진 450명이 일한다. 쿠바 외교부에 따르면 지난해 총 7만8867명이 이 병원을 이용했는데 개원 때보다 4.47배 늘었다. 두 나라는 카타르 남부에 쿠바 병원을 추가로 지을 계획이다.

쿠바 아바나 시내 말레꼰 도로 풍경 /사진=김인오 기자
▲ 쿠바 아바나 시내 말레꼰 도로 풍경 /사진=김인오 기자

시간이 흐르는 동안 '쿠바 의사'들은 혁명의 길 밖으로도 나갔다. 요즘 쿠바 청년층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체 게바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카스트로 형제를 '붉은 할아버지들(abuelos rojos·붉은 색은 공산주의 의미)'라고 부른다. 중남미 공산주의 혁명이 꿈꾸던 의료복지는 핑크타이드 퇴조 속에 흔들리고 있다.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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