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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형 칼럼]이제 광장을 비워둘 때다

  • 김세형
  • 입력 : 2017.03.3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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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형 칼럼] 광장이 왜 생겨났을까. 프랑코 만쿠조(Franco Mancuso·베네치아 건축대학)가 이 주제에 도전해 전 세계 60개의 유명한 광장을 해부했다. 광장은 아고라(agora)로 자주 풀이되는데 이는 '만나다(ageirein)'가 어원이다. 사람이 만나는 도시의 장소다. 고대에는 플라테이아(plateia), 오늘날 장소(place)를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 인간은 농촌에 살다가 도시가 형성되면서 모이기 쉬운 가운데에 빈터를 만들어 시장을 열고 때론 그곳에서 정치적 결정을 했던 게 광장의 유래다. 도시가 커지면서 광장 역시 웅장하게 대형화되고 문화적 작품이나 민족적 인물을 기리는 장소가 된다. 세종로에 이순신 장군 동상, 세종대왕 상을 갖다 놓는 식이다(이순신은 왕(선조)과는 사이가 안 좋은데 왕의 상을 갖다 놔서 세종로가 데모꾼으로 시끄럽다는 해석도 있다). 유럽의 대도시에서 광장은 심장의 위치에 있다(파리 콩코르드광장, 로마 포폴로광장, 런던 트래펄가광장을 상상해보라).

광장은 중세적 현상이다. 현대의 대형광장은 쇼핑센터, 컨벤션, 문화회관 등 시설이 더 중요하다. 서울만 보더라도 강남 신도시엔 광장이 없고 모(母)도심인 시청, 세종로에 광장이 있을 뿐이다. 전 세계를 둘러봐도 오랜 도시에 있을 뿐 신도시엔 광장이 없다. 고대 광장에선 정치 행위를 많이 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의회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알아서 정치를 해준다. 미국 월가에서 1대99의 데모가 있었으나 경찰이 가차없이 곤봉으로 때려서 해산시켜 버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반대시위가 있으나 산발적으로 시가지 행진이 있을 뿐이다. 태국 브라질에서 탄핵 때 광장의 시위가 있었으나 그리 오래지 않아 접었다.

광장(생각의 나무).
▲ 광장(생각의 나무).
 광장은 텅 빈 장소이다. 그러다가 군중이 갑자기 모여 여러 가지 판을 벌인다. 프랑스 혁명, 이탈리아 혁명에서는 왕을 처단하는 장소로 쓰였고 오늘날 공산주의 국가들인 중국의 톈안먼광장, 모스크바 붉은광장, 평양의 김일성광장은 통치자의 위용을 과시하는 장소다. 브라질의 리우카니발 같은 축제, 결혼식장으로도 쓰였다.

 2016년 11월부터 2017년 3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약 6개월 동안 세종로 광장은 의회와 사법기관을 위요하는 일을 해냈다. 국회는 광장에 권력을 넘겼다. 야당의 대선주자들은 촛불은 민심이라면서 곁불을 쬈고, 보수 측 풋내기 주자들은 반대로 태극기를 따라다니기 바빴다.

 원래 민심은 천심과 동의어인데 그것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헌법 1조에 명기돼 있다. 그러나 촛불을 민심으로 등치하는 것은 비약이다. 촛불이 하는 모든 행위에 국민의 대표성이 있어야 하며 촛불행사에서 이뤄지는 행위와 구호들이 국민 각계각층을 대표하고 투명한 의사결정 과정을 거치면 촛불=민심이라 할 수 있는데, 어디 그런가. 촛불을 앞세운 퇴진행동은 진보시민단체의 집합체임이 팩트다. 그래서 촛불에 이어 보수 측의 태극기가 나왔던 것이다. 퇴진운동과 탄기국은 박근혜의 탄핵과 저지가 목표였다. 헌재가 탄핵을 결정해버렸으므로 목표점은 지나갔다. 이제 광장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 마침 세월호도 인양됐다. 박근혜에 대한 구속영장까지 신청됐다. 광장을 메운 두 개의 힘은 대한민국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100만명씩 20번 집회했다고 2000만명도 아니다. 같은 사람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하니까. 10만 100만이 모이면 거기에서 이성의 힘만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기원전 450년에 아리스토파네스는 "나는 도시 한가운데서 만나 거짓된 맹세로 서로 기만하는 사람들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갈파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마틴 울프는 "광장에서 대중의 시위는 종국에는 폭군적(despotism)으로 전락한다"고 경계했다. 대표적으로 히틀러가 그렇게 대중의 힘을 악용했다. 그래서 광장에 모인 대규모 군중의 성격에 대해 아리스토파네스는 경계했던 것이다.

 광장은 유럽이 225년 전에 했던, 러시아가 100년 전에 했던 통치자를 날려버린 경험을 한국에 뒤늦게 선사했다. 광장의 함성에 헌재 검찰 판사들이 주눅드는 게 현실이다. 이제 서울시는 시청 앞, 세종로의 태극기, 세월호의 천막들도 거둬라. 의회정치도 제 본분을 찾아야 하며 새로운 대통령이 거버넌스를 확고히 할 시기가 왔다.

 광장의 정치적 역할은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정도면 끝났다. 아랍의 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 그리고 브라질 태국 외엔 장기간 시위를 경험하지 않았다. 촛불 측은 한국의 100만명 시위가 한 명의 구속도 폭력도 없이 종결된 것을 세계가 칭찬한다는 자랑을 한다. 아마 한국이 초스피드로 전개되는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은 잊고 광장정치에 넋을 빼고 있는 광경에 쾌재를 부르는 경쟁국이 더 많을 것이다. 속으로는 비웃으면서.

 오늘날 광장의 본분은 시민에게 명상과 휴식을 제공하는 도시의 거실이다. 어쩌다 용틀임할 때, 붉은 악마가 한 가지 합창을 드높이 올려보내는 축제였을 때 한국은 흥했다. 일본을 곧 따라잡을 태세였고 중국을 우습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광장의 힘이 정확히 두 개로 분열돼 주말마다 정치구호로 풀가동되면서 정치구호로 헐떡이며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를 때 한국 경제는 다시 일본에 뒤떨어지고 중국에 무섭게 추월당한다. 한국은 비행기로 말하면 추동력이 부족해 추락지점(stall point)의 임계치에 다가섰다. 망하는 길로 가고 있다. 최인훈 소설의 주인공 이명훈이 환생해도 이런 광장에서 답을 못 찾을 것이다.

 얼마 후면 새 정부가 탄생한다. 의회는 광장에서 정치를 되찾아 오라. 새 정부 들어서도 재벌 등 노무현 정권 때의 5적(재벌 서울대 법조 조중동 강남) 타파를 기치로 촛불을 또 높이들겠다는 말이 들린다. 안될 말이다. 광장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리스에서도 아고라는 이제 교역장소로 뜻이 바뀌었다. 만쿠조의 책에 광장정치란 말은 없다. 한국의 광장은 탄핵을 완료하고 농단세력을 옥에 가뒀다. 새 대통령은 곧 나온다. 다시 광장을 텅 비울 때다.

[김세형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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