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프리미엄스페셜리포트

벌써 흐릿한 1982년의 봄 임을 위한 행진곡의 유래

  • 이문영
  • 입력 : 2017.05.2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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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지금 불리는 노래와는 가사가 약간 다르다. 구전을 통해서 노래가 전달되면서 더 부르기 쉬운 쪽으로 변형된 것이다./출처=광주광역시 홈페이지
▲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지금 불리는 노래와는 가사가 약간 다르다. 구전을 통해서 노래가 전달되면서 더 부르기 쉬운 쪽으로 변형된 것이다./출처=광주광역시 홈페이지
[물밑 한국사-48] 지난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있었다. 이 노래를 모르는 젊은이들이 있기도 할 만큼 오래되었지만,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끊임없이 불릴 우리 역사와 함께한 노래라 할 수 있다.

이 노래는 백기완(시민운동가, 13·14대 대통령 후보)의 시 '묏비나리'의 일부분을 소설가 황석영이 개사하고 전남대 학생이었던 김종률(1979년 MBC 대학가요제 3회 은상)이 작곡했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간단한 사실 하나에도 세월의 부식이 들어가면 정확하고 명징한 사실들이 흐릿해지고 알쏭달쏭해진다.

상당히 여러 군데에서 이 노래가 1981년 5월에 만들어졌다고 나온다.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1981년 5월에 혹은 그 여름에 황석영은 광주민주화운동 때 도청에서 끝까지 항쟁하다가 사망한 윤상원과 전남대 출신으로 노동운동을 하다가 1978년 12월에 사망한 박기순의 넋을 기리는 노래굿을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 노래굿의 이름은 '넋풀이'. 광주의 극회 '광대'에서 활동하던 문화운동가들이 모여서 지하방송 '자유광주의소리' 첫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당시 정권의 탄압으로 공연은 할 수 없었지만 만들어놓은 테이프를 통해서 노래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노래는 1982년 2월 20일 망월동 묘지에서 치러진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불렸다고 한다. 윤상원과 박기순은 1978년 7월에 함께 들불야학을 세워 못 배우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왔던 동지였다. 박기순은 이미 그전에도 꼬두메 야학에서 강학(교사) 일을 하기도 했다. 박기순은 들불야학의 강학 일도 하면서 10월에는 공단에 위장취업을 했다.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뜻을 펴기도 전인 12월 25일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노래의 작곡자 김종률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1982년 2월 20일에 서로 알고 지내던 윤상원과 박기순의 친지 가족들이 망월동 묘지에 모여 조용히 영혼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광주의 문화운동가들은 황석영의 집에 모여 이들의 결혼을 축하해 줘야 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했고 그 결과 노래극을 만들기 시작했고 1박2일에 걸쳐 녹음을 했다. 김종률은 자기 기억에는 4월이었는데 누군가는 5월이라고 말하기도 한다고 했다.(2013년 5월 12일 한국일보 인터뷰 내용) 이 노래극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만 창작곡이었다. 곡을 먼저 썼고 가사를 붙이기 위해 노력하다가 황석영이 백기완의 시를 고쳐서 가사를 만들어냈다.

김종률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조연출 역할을 한 극단 광대 출신 소설가 전용호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영혼결혼식을 마친 한 달 후쯤에 황석영의 집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서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을 기리면서 5월 항쟁에 돌아가신 분들의 혼을 달래주고 영령을 달래는 그런 어떤 노래극을 만들자고 했다.(증언 내용은 뉴스타파의 '목격자들' 10회에서 들을 수 있다)

관계자들의 대부분이 살아 있고 그들의 증언도 녹취되어 있는데도 이런 오류가 나온다. 역사학이라는 학문이 얼마나 섬세한 것을 다루는 일인지 이런 예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박기순은 1978년 12월 25일에 들불야학에 사용할 땔감을 모으기 위해 손수레를 끌고 고된 몸을 이끌고 오빠 부부의 집으로 왔다. 그 작은 방에서 지낼 때보다 들불야학 강의실에서 잘 때가 더 많았지만 몸살 기운이 있어서 집으로 왔던 것이다. 이날 그 방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수배자가 되었던 윤한봉이 머물고 있었다. 박기순의 오빠 박형선과 윤한봉의 동생 윤경자가 부부였다. 윤한봉은 그날 박기순이 오지 않았다면 그 방에서 죽을 사람은 자신이었다고 한탄했다. 그는 평생 그 부채감을 지니고 살았다.

창비에서 발간한 <윤한봉>. 저자는 안재성. 표지 그림은 걸개 그림 <세월오월>로 유명한 홍성담 화백이 윤한봉을 생각하며 그린 것이다.
▲ 창비에서 발간한 <윤한봉>. 저자는 안재성. 표지 그림은 걸개 그림 <세월오월>로 유명한 홍성담 화백이 윤한봉을 생각하며 그린 것이다.
윤한봉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는 전남대 71학번으로(군대를 다녀와 늦은 나이에 입학했다) 1972년 유신체제 선포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1974년 4월 민청학련의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체포되었다. 1976년에는 부활절사건(3·1 민주구국선언-김대중, 윤보선, 함석헌 등 민주인사들이 발표한 시국선언-을 전남대에서 낭독한 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렀다.

윤한봉은 이때 석방 조건으로 사상전향서를 쓰라는 요구를 받았다. 공산주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을 사상전향하라고 하니 윤한봉은 펄쩍 뛰었다. 자유민주주의자인 자신이 전향하면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되라는 이야기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전향서와 관계없이 석방된 뒤에 윤한봉은 함평고구마사건이라는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후 1978년 6월에 전남대에서 유신에 반대하는 교수들의 '우리의 교육지표' 발표 사건이 있었을 때 윤한봉은 후방 지원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이때 박기순은 전주의 한 교회 청년회에서 교육지표 사건을 강연하고 유신 정권을 맹비난했다가 무기정학에 처해졌다. 박기순은 학교에 미련이 없다며 자퇴하고 노동운동에 헌신하기로 했다. 그녀는 광주 최초의 여성 위장취업자였다.

윤한봉은 1980년 5월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저항을 한 윤상원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지기 사흘 전인 5월 15일 광주 두암동에서 윤한봉과 만난 후배들 중에 윤상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누군가 엿들을까 싶어 비닐 위에 필담으로 의견을 교환할 정도로 당시 분위기는 이미 삼엄했다. 전두환이 정권 장악을 위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더 빨랐다. 1980년 5월 18일 전남대에서 계엄군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윤한봉이 체포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 후배들은 윤한봉에게 광주를 벗어나라고 충고했고 우여곡절 끝에 윤한봉은 광주를 벗어났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후배들은 광주에서 여러 명이 죽음을 당했고 특히 도청에서 죽은 윤상원은 그의 뜻을 따르다 죽은 것이라 생각해 더욱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는 1981년 미국으로 밀항했고 미국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1993년 귀국하여 2007년 사망할 때까지 사회운동을 쉬지 않았다. 그에 대한 전기가 최근에 창비에서 나왔다. 생존자들의 녹취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은 윤한봉 한 개인의 전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 민주화에 대한 빚쟁이 문서이기도 하다. 윤한봉에 대해서 잘 모른다면 이 책을 읽어보자. 여러분이 아는 이름도 지나가고 처음 보는 이름도 지나갈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인혁당 사건 때, 광주항쟁 때, 그리고 그 후의 민주화운동 속에서 스러졌다. 살아남은 자들은 기억되고 죽은 자들은 잊히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 책의 단점이라면 수많은 인명이 지나가기 때문에 그들 개개인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는 점이겠다.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이들이 흘린 피에서 자라난 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시간에 의해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이와 같은 책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이문영 역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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