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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싸운 고려군

  • 이문영
  • 입력 : 2017.05.29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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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성(1321~1367) : 원말명초의 농민봉기 지도자이다. 한때 주원장과 동지였으나 뒤에 배신하고 주원장에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출처 위키퍼블릭도메인)
▲ 장사성(1321~1367) : 원말명초의 농민봉기 지도자이다. 한때 주원장과 동지였으나 뒤에 배신하고 주원장에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출처 위키퍼블릭도메인)
[물밑 한국사-49] 공민왕 3년(1354년) 6월. 원나라에서 이부낭중 하라노하이와 고려인 강순룡(몽골명 빠이앤티무르)를 보내왔다. 그들은 중국 강소성에 웅거한 장사성 토벌에 원군을 보내라는 원나라 재상 토크타의 명을 전했다. 당시 강남 일대는 홍건적 한산동, 한교아, 장사성 등이 웅거하여 있는 상태였다. 이들을 홍건적이라 부르는 것은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기 때문인데, 그것은 송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뜻이었다. 음양오행을 따지면 송은 화덕(火德)으로 세워진 나라였기 때문이다. 1351년 한산동, 유복통 등은 한산동이 송 휘종의 8대손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반란이 전국을 휩쓸었다. 장사성도 그중 하나다. 1353년 소금밀매업으로 돈을 벌었던 장사성이 무뢰배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뒤 그의 세력은 순식간에 불어나 곧 대운하의 강북 중심지인 고우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고우성은 대운하 수송의 중심지로 당시 대도시에 속했다. 강남의 쌀과 소금이 이곳을 통해 전국으로 우송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만큼 원에서도 결코 내버려둘 수 없는 지역이었다. 장사성은 고우를 근거지로 나라를 세웠다. 나라 이름은 주(周). 자신은 스스로 성왕이라 일컬었다.

원은 원군으로 와야 하는 장수들도 지정했다. 원이 요청한 장수는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말로도 유명한 최영을 포함해 총 15명이었다. 이들 15명의 장군은 수군 300명과 효용군을 모집하여 8월 10일까지 연경(=북경)에 집합해야 했다.

원나라 반란을 치는 데 고려군을 부르는 일이 왜 벌어진 것인가? 여기에서 채하중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몽골명 하라티무르인 그는 일찌감치 원나라에 붙어 협잡질을 일삼던 자였다. 원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고 출세가도를 달리며 재상 자리까지 차지했으나 공민왕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공민왕 2년 10월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버린 뒤 불러들이지 않았다. 그는 원나라에서 다시 정승 자리에 복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장사성 토벌 건이 생겼다. 이에 채하중은 원 재상 토크타에게 고려에서 원군을 끌어오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하고 장수들 명단까지 제출했다.

공민왕은 분노를 느꼈을 것이지만 그 시점에서 원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다음달에 원군 2000명을 선발하여 고흥부원군 유탁, 우정승 염제신, 대호군 최영, 인당 등 40여 명의 장수와 함께 연경으로 출정시키고 말았다. 공민왕은 영빈관에 나아가 친히 열병하고 그들을 전송했다. 이때 출정한 고려군은 고려군의 최정예병이어서 공민왕은 신변 보호를 걱정할 정도였다. 공민왕은 서해도(=황해도)에서 따로 궁수를 모집하여 신변 보호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총지휘관 유탁은 일찍이 전라도 만호로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출세를 한 사람이다. 무용이 출중하고 말을 잘 탔다. 유탁과 염제신은 채하중이 강등되었을 때 좌상과 우상이었다. 이들이 지목된 것은 이들을 내보내야 자기 자리가 생길 것이라 여긴 채하중의 노림수였다. 드디어 채하중은 오매불망 그리던 정승 자리에 복귀했다.

병력 2000명이 무슨 대단한 원군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을 것 같다. 실제 고려인으로 동원된 병력은 훨씬 많았다. 원 통치 기간에 요동에는 고려인들이 엄청나게 살고 있었다. 고려국왕은 심양국왕도 겸한 적이 있으며 그 후에도 고려인이 심양왕에 있었으므로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원은 이 고려인들도 동원했다. 그리하여 총 규모는 2만3000명이 되었다.

용사들로 구성되었다고는 해도 난데없이 남의 전쟁에 출정하게 되었으니 불만들이 있었다. 염제신은 본래 무신도 아닌데 채하중의 원한 때문에 끌려가게 되었기 때문에 관직을 내놓고 강호로 물러났으나 채하중이 토크타의 권세를 등에 업고 끝까지 염제신을 출정군에 포함시키게 압력을 넣었다. 결국 공민왕도 굴복하고 말아서 원정군에 들어갔다. 하지만 연경에 도착하니 공민왕이 간곡하게 염제신을 돌려보내 달라는 청원을 해놓은 상태였다. 염제신은 귀국했다.

이들 2000군이 연경으로 가는 동안 길거리에서 행패가 대단했다. 민가의 말을 약탈하고 다녔는데, 오직 염제신, 나영걸, 손불영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행동도 국가의 명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려사>를 따르면 원나라는 장사성 토벌에 800만 대군을 동원했다고 한다. 다소 과장이 섞였을 것이다. 원군의 총지휘관은 태사 토크타였다. 서번과 회회에서도 지원군이 왔다.

목표는 장사성이 있는 고우 성이었다. 9월에 출정이 이루어졌다. 800만은 아니어도 대군이긴 했던 모양인지 고우에 도착했을 때는 11월이 되었다. 도착 4일 후 첫 접전이 벌어졌다. 성 밖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장사성군은 대패했다. 장사성군은 성으로 물러났다. 공방전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무려 27회의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성은 건재했다.

토크타는 병사를 나누어 고우 성 인근의 육합 성을 치게 했다. 이 육합 성을 공략했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에 특별히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전투에도 고려군이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육합 성은 고우 성의 서남쪽에 있는 성으로 그다지 전략적 가치가 크지 않지만 그 동쪽에 있는 저주를 위협하게 되는 효과를 가지는 성이었다. 저주 방면에서 오는 원군을 막을 수도 있었다. 육합 성을 지키던 장수는 원군의 침입에 놀라 다른 반란 세력인 곽자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곽자흥은 육합으로 출전하는 것을 꺼렸으나 곽자흥의 참모 주원장(뒷날의 명태조)은 육합을 잃으면 저주도 함락된다고 설득해서 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육합은 무너진 뒤였고, 원군은 승리에 도취하여 저주 성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주원장은 패주하는 척하며 원군을 유인하여 원군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작은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어도 저주 성을 지키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주원장은 약탈한 원군의 말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화친을 제의했고, 장사성과 싸워야 하는 원군은 이 화의를 받아들였다.

최영(1316~1388) : 고려말의 충신, 명장. 원나라 원군에 나섰을 때는 38세의 한창 나이였다. 훗날 이성계에 맞서다 참수되었다.
▲ 최영(1316~1388) : 고려말의 충신, 명장. 원나라 원군에 나섰을 때는 38세의 한창 나이였다. 훗날 이성계에 맞서다 참수되었다.
물론 이러는 동안에도 고우 성 공략은 계속되었다. 고려군이 선두에 서 있었다. 유탁이 지휘를 하고 최영이 독전한 끝에 성의 한 곳이 무너졌다. 그러자 고려군에게 성을 함락시키는 영광을 줄 수 없다며 원나라 장수들이 반발하여 더 이상의 공격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원나라 장수들의 핑계는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날 밝은 뒤 다시 공격하자는 것이었으나, 그 하룻밤의 시간을 준 것 때문에 고우 성은 다시 무너진 곳을 복구하고 방비를 단단히 해서 버텼다.

더구나 연경에서 토크타를 참소하는 사건이 일어나 토크타는 12월 한겨울에 유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예전에 토크타 때문에 승진에서 누락된 적이 있는 하마라는 자가 모함을 한 것이다. 하마는 토크타가 나가 있는 틈을 타서 기황후(고려 여인으로 황후 자리에 오른 바로 그 여자)에게 토크타가 3월에 출병한 이래 전공이 전혀 없으니 군사비만 헛되이 내다버린 것이라고 참소해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토크타는 다음해 재산을 몰수당하고 더 외지로 쫓겨난 끝에 실의 속에 죽고 말았다.

고우 성은 외성도 무너지고 거의 쓰러지려던 참이어서 장사성도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총사령관의 경질로 원군이 풀 죽은 것을 알고 맹공으로 나와 원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장사성 토벌은 실패했지만 고려군은 돌아갈 수 없었다.

고려군은 회안로 수비에 동원되어 여러 차례 반란군과 싸웠다. 고려군이 회안 성(고우의 북쪽에 해당하므로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말은 회수 이남을 모두 빼앗겼다는 뜻이 된다)을 지키고 있는데 장사성이 사주(홍택호 동북에 있다)와 화주(안휘 성에 있다. 장강 바로 위에 위치하며 남경의 서쪽 방면이다)의 군사를 동원하여 회안 성을 포위했다. 8000척의 배가 강가에 위치한 회안 성을 포위하고 공격에 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아친 것이다. 최영은 선두에 나와 싸우며 여러 차례 창에 찔렸지만 끝까지 적을 추격 섬멸하는 무시무시한 위용을 보여주었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고려군은 드디어 귀국할 수 있었다.

장사성은 이후 세력을 절강, 서주까지 뻗쳐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게 된다. 고려와도 공민왕 6년(1357년) 7월에 수교하여 공물을 주고받았다. 장사성이 사신을 보낸 것은 그 전전달인 5월에 공민왕이 기황후 일파인 기철을 처단하고 6월에는 원나라 연호를 폐지하는 등 반원정책을 표면에 드러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바로 장사성이 봉기했던 초년에 고려군에게 혼쭐이 났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문영 역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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