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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요동에 이름떨친 불패의 명장 태조 이성계

  • 이문영
  • 입력 : 2017.06.0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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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어진. 이성계는 불패의 명장이었다./출처=문화재청
▲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어진. 이성계는 불패의 명장이었다./출처=문화재청
[물밑 한국사-50] 공민왕 5년(1356) 5월에 기철이 제거되었다. 기철은 몽골 이름 바얀부카로 그의 누이가 원나라 순제의 황후, 기황후다. 그는 기황후의 권력을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았는데, 배원정책을 쓰는 공민왕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아버지가 처형당했으나 당시 원은 고려를 신경쓸 수가 없었기에 기철의 아들 기사인테무르는 울분을 삼켜야만 했다. 기철의 반란을 진압할 때 기철의 친인척을 모두 죽였지만, 그는 원에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원은 홍건적으로 완전히 뒤집힌 상태였다. 홍건적은 요동까지 진군했다가 원군의 반격을 받아 고려로 후퇴한다(1359년 11월). 약탈을 위해 압록강을 건너온 홍건적은 아예 고려를 병참기지로 생각했는지, 다음달 4만 대군으로 본격적인 침략을 감행한다. 난데없는 침략을 받은 고려는 개전 초기에 평양까지 내주며 밀리고 만다. 다행히 이방실, 안우 등의 활약으로 홍건적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361년 10월. 겨울을 맞이한 홍건적은 다시 한 번 고려를 약탈하고자 달려들었다. 홍건적 10여 만 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공민왕은 안동까지 달아나 숨을 돌려야 했다. 1362년 1월, 총병관 정세운이 최영 등을 거느리고 홍건적 토벌에 나섰다. 고려군은 총 20만 대군. 이때 동북면 상만호 이성계가 사병 2000명을 이끌고 적장의 목을 베어버리며 화려하게 등장한다.

홍건적의 무분별한 침입으로 공민왕은 명과 거리를 두고 다시 원과 친교를 맺는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문제는 기황후였다. 자기 오라비를 죽인 공민왕을 기황후가 그냥 내버려둘 리가 만무했다. 기황후는 순제를 꼬드겨 충선왕의 아들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임명하게 했다(1362년). 덕흥군은 요양에 군사를 이끌고 와서 고려로 곧 침공할 판이었다. 드디어 1364년 압록강을 건너 고려 국내로 진공했다. 의주가 함락되자 공민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보내 대응하게 했다. 이성계는 귀신 같은 활솜씨로 적장들을 무찌르며 승리를 거뒀다. 적은 불과 17명만이 다시 압록강을 건너갈 수 있었다. 이 패전으로 순제는 공민왕을 인정하고 분란을 종식시켰다. 하지만 공민왕이 원에 대해 만정이 떨어졌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1369년 4월 명은 사신을 보내 수교를 청해왔다. 일단 명과 수교한 공민왕은 이때부터 양 국 사이를 줄다리기 한다. 그러던 끝에 마음을 굳힌 것이 1369년 11월.

공민왕은 동녕부를 공격할 결심을 했다. 본래 동녕부는 원이 우리나라 평양에 두었던 기관이었다. 고려의 동녕부는 1269년 설치되었다가 1290년 폐지하고 요양으로 옮긴 바 있었다. 요양은 바로 고구려의 요동성이다.

평안남도 순천시의 요동성총에서 나온 요동성 성곽도. 내성, 외성의 이중성인 것을 알 수 있다./출처=동북아역사넷
▲ 평안남도 순천시의 요동성총에서 나온 요동성 성곽도. 내성, 외성의 이중성인 것을 알 수 있다./출처=동북아역사넷
출진 명령이 동북면원수 이성계에게 내려졌다. 동북면은 지금의 함경남도 일대라, 이성계는 보병 1만명, 기병 5000명을 이끌고 황초령을 넘어 강계를 통과해 압록강을 건넜다. 동녕부 동지 이우로티무르(우리 이름은 이원경)가 고려군에 맞섰다. 그러나 얼마 싸우지도 않고 이우로티무르는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말에서 내려 항복했다.

"나의 선대는 본래 고려 사람이온 바 신복되기를 원하나이다."

이원경은 300여 호를 이성계에게 바쳤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추장 고안위가 항복하지 않고 우라산성에 들어가 항거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이 전투에서 70여발을 모두 적군의 얼굴에 명중시키는 신위를 떨쳤다. 고안위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는 그날 밤 어둠을 틈타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이성계는 다음달 항복한 300여 호의 주민들을 이끌고 고려로 돌아갔다.

그러나 동녕부의 위협이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동녕부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은 살아남은 기씨 일족 기사인테무르였다. 기사인테무르는 원이 멸망하고 북쪽으로 쫓겨나자 동녕부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분사요심관리평장 김바얀 등과 함께 고려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본래 이성계의 출전도 기사인테무르를 제거하는 게 목적이었으나, 기사인테무르는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공민왕은 서북면 상원수 지용수와 동북면원수 이성계, 서북면부원수 양백연 등에게 동녕부 공략을 명했다. 공민왕 19년(1370) 11월. 요동 원정군은 의주에 도착했다. 원정군의 총책임자 도통사 시중 이인임은 안주에 머물러 있었다. 실질적인 총지휘관은 상원수 지용수였다.

고려군은 요동성 80㎞ 지점인 나장탑에서 베이스캠프를 차린 뒤, 비장 홍인계, 최공초 등에게 경기병 3000명을 주어 요동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뿐만 아니라 고려군은 요동성의 고려인들을 상대로 선무공작도 펼쳤다.

홍인계의 기병 3000명을 얕본 기사인테무르는 성밖으로 군사를 내보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계의 함정이었다. 이성계의 본대가 포위하자 성으로 후퇴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였다. 성밖으로 나온 장군 처명은 이성계와 대결한 끝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성계는 처음에는 투구를 맞춰 떨어뜨렸다. 처명이 여전히 항복하지 않자 넓적다리를 맞춰 말에서 떨어뜨렸다. 하지만 처명은 상처를 싸맨 뒤 세 번째로 다시 도전했다. 이성계가 다시 한 번 항복을 권유하자 처명은 그때서야 항복했다. 이성계의 마음에 감복하고 만 것이다. 그는 이후 이성계의 충실한 부하로 활약하게 된다. 이렇게 성 밖 부대가 항복하자 성 안에서는 혼란이 벌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맹공을 퍼부어 이성계는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요동성이 함락된 것은 중국인들에게는 꽤 큰 충격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성을 치면 반드시 떨어뜨리는 고려 같은 나라는 다시없을 것"이라는 말이 회자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 점령 시에 실수가 있었다. 본래 충분한 군량을 준비해서 온 것이 아닌데, 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성 안의 창고를 모두 불질러 버리는 바람에 성 내에 군량으로 쓸 양식이 없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어쩔 수 없이 본국으로 후퇴하기로 한다.

이 원정으로 기사인테무르는 놓치고 말았지만 그는 완전히 세력을 잃고 이후 역사에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동지 김바얀은 체포되어 고려 국내로 들어온 뒤에 바로 처형되었다.

이 무렵 요동은 힘의 공백 지대로 각 세력이 서로 으르렁대고 있는 것과 같았다. 누구도 결정적으로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면서 결국 천하를 통일한 명이 요동의 주인으로 등장하고 만다. 명은 요동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고려의 영토까지 넘보면서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게 이르는데, 이때 이성계는 다시 한 번 요동을 향해 떠난다. 그가 압록강에서 돌아선 것이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다.

[이문영 역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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