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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관련 다양한 학설 역사학계의 건강성 방증

  • 이문영
  • 입력 : 2017.06.1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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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의 <신수 국사대관>(1957)에 실린 고조선 지도
▲ 이병도의 <신수 국사대관>(1957)에 실린 고조선 지도
[물밑 한국사-51] 역사학계를 비난하는 목소리 중 하나는 역사학계는 스승의 말을 벗어나면 매장이 된다는 헛소리이다. 이런 식이라면 학문은 전혀 발전할 수가 없다. 다른 학설도 나올 수가 없다. 역사학계에 얼마나 많은 다양한 학설이 있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특히나 재미있는 점은 우리나라 역사학이 모두 이병도의 학설을 따르고 있다고 본다는 점이다. 20세기 중반까지 활동한 역사가 한 명의 힘을 이렇게 과대평가하는 이유는, 그런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아는 역사가가 이병도 하나뿐이라서 그런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스승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스승의 말을 안 따르는 나쁜 제자라는 비난을 함께 한다는 점이다. 같은 입으로 따라도 비난하고 따르지 않아도 비난한다면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기준이 스승의 말을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병도가 1957년에 낸 '신수 국사대관'을 보면 단군이 처음 평양 지방을 수도로 삼았고 그 뒤를 이은 한씨 조선 때는 대동강 유역을 근거로 하여 그 영토가 서쪽으로 요하 유역까지 뻗어나갔다고 적고 있다.

사실 이런 견해는 이병도의 독특한 설도 아니다. 이미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호사설'에는 이렇게 나온다.

"그 영토의 경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기자가 계속하여 나라를 세웠고 그의 후손인 조선후의 시대에 와서 연과 힘을 겨루었는데, 연이 그 서쪽 지역을 공략하여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반한(滿潘汗)까지를 경계로 정함으로 인하여 조선이 비로소 약해졌으니, 연에서 동쪽으로는 본래 땅이 얼마 없었은즉 만반한은 바로 지금의 압록강이다. 만(滿)은 만주(滿州)요, 반(潘)은 심(瀋)이 잘못된 것이다. (중략) 기자의 수도가 평양이었으나 연과 국경이 연접되었고, 고죽이란 나라의 유허도 그 가운데에 있었을 것이다."

요하에 이르렀던 고조선이 연나라의 침입으로 서방의 영토를 잃고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역시 이병도와 동일하다. 다시 말하자면 이병도의 주장은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주장과 다를 것이 없었다.

조선시대에 이런 견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 학계에서는 '기자'가 단군의 뒤를 이어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믿지 않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었다. 성인 반열의 기자가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자부심의 근원으로 삼기도 했다.

기자는 은나라에서 출발해서 단군의 조선으로 온 것이니 자연히 이동설의 주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이동설을 설명하고 있다. 기자조선은 처음에 요서 지방에 있다가 요동성으로 옮겨왔다가 연나라에게 패배한 뒤에 대동강 평양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동할 때마다 수도를 '평양'이라 불렀다고도 설명한다.

일제강점기 때 신채호도 이동설을 주장했다. 요동의 어니하를 패수로 보고 나중에 평양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일제의 역사가 오하라 도시타케(大原利武)는 '사기' 주석에 나오는 험독에 주목했다. 험독은 만주에 있었던 기자조선의 수도로, 왕검성은 위만조선의 수도로 구분해서 이동설을 주장했다.

광복 후에 북한의 리지린이 험독을 난하 유역의 창려군으로 보았다. 그곳에서 요동 어니하 유역인 개평의 왕검성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했다. 리지린은 연나라 진개의 침입 때 수도가 점령당하지 않았으므로 기원전 3세기 초에 이미 요동으로 수도가 옮겨졌다고 생각했다. 역시 북한 학자인 황철산은 난하에서 요동으로 이동한 설에 반대하여 요동에서 대동강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황철산은 험독은 왕험성(왕검성은 왕험성이라고도 쓴다)을 혼동한 것에 불과하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남한에서는 북한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김철준이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을 내놓았다. 요서-요동-평양으로 두 번 이동했다는 주장을 했다. 요동에서 평양으로 이동한 이유는 진개의 침공이었다. 중심지가 이동했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런 주장이 나오는 동안에도 이병도는 자기 입장을 바꾼 적이 없다.

1980년대에는 서영수가 이동설을 주장했다. 요동에서 평양으로의 이동이다. 중심지와 함께 주민들도 이동해왔다고 보는 것이 서영수 주장의 독특한 점이다. 서영수는 험독은 교치에 의해 후대에 와서 생긴 혼동으로 이해한다. 교치라는 것은 군명이 이동하여 다른 지역에 배치되는 것을 가리키는 역사 용어이다. 유사역사가들은 교치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지명이 변경되는 구조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고조선이 이동했다는 학설에는 연나라 진개의 침입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침공으로 영토를 일부 상실한 고조선의 중심지가 이동했다는 주장이 많다. 리지린만 그전에 이동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험독이 창려군에 있었다는 주장은 교치에 따른 착오일 뿐이므로 리지린의 주장은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다.

이동설의 경우 국내 학계 다수가 따르고 있는데 초기 위치에 대해서는 제각기 다른 비정을 하고 있다. 고조선의 경계를 알기 위해서는 서쪽의 경계를 이루는 패수의 위치가 중요한데 북한은 대능하를 패수로 본다. 북한의 주장과 대동소이한 주장을 한 남한의 윤내현은 패수를 난하로 보아서 더 서쪽으로 고조선의 국경을 밀어놓았다. 남쪽 경계도 북한은 원래 대동강까지 보았다가 나중에 예성강까지로 확장했는데, 윤내현은 청천강까지로 본다. 반면 이병도는 패수를 청천강으로 보고 있다. 고조선의 영토는 대략 청천강에서 예성강 위 정도로 보고 있다.

고조선의 대표적 유물인 비파형동검. 요녕식 동검이라고도 한다. 사진의 비파형동검은 부여 송국리 유적의 것이다./사진 출처=국립중앙박물관.해당 저작물은 국립중앙박물관(http://www.museum.go.kr/site/main/home)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 고조선의 대표적 유물인 비파형동검. 요녕식 동검이라고도 한다. 사진의 비파형동검은 부여 송국리 유적의 것이다./사진 출처=국립중앙박물관.해당 저작물은 국립중앙박물관(http://www.museum.go.kr/site/main/home)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대능하 부근의 조양시 일대를 고조선 중심지로 보는 견해가 많이 나온다. 박준형이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 부근의 비파형 동검 발굴을 증거로 삼는다. 여기에서 진개의 공격으로 물러나게 되는데 이때 경계가 되는 패수는 혼하라고 주장한다. 근거는 '전한서'의 기록이다. 국내 최초 고조선 박사인 송호정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고조선의 위치만 해도 여러 가지 입장이 등장한다. 최근에 박대재는 고조선의 수도는 쭉 평양이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이병도의 주장과 같은 것인가? 아니다. 이병도는 청천강과 예성강 사이의 좁은 지역을 고조선의 영토로 보았지만 박대재는 패수를 동요하로 본다.

학계의 입장은 다양하고 학자들마저 자신의 설을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을 하고 있다. 이 논쟁에는 각종 문헌자료는 물론 고고학적 성과가 해석되어 들어간다. 역사학계가 식민사학을 추종해서 스승의 말에서 한 글자도 고치지 못한다는 유사역사학의 주장은 엉터리 비방에 지나지 않는다.

[이문영 역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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