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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 의도 담아낸 만주원류고 일본은 식민사관에 재활용

  • 이문영
  • 입력 : 2017.06.2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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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서간행회에서 1916년 간행한 <만주원류고>.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만주원류고>를 만선사관에 이용했다./출처=서울시교육청 전자도서관
▲ 조선고서간행회에서 1916년 간행한 <만주원류고>.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만주원류고>를 만선사관에 이용했다./출처=서울시교육청 전자도서관
[물밑 한국사-53] <만주원류고>라는 역사책

유사역사학 쪽에서 아주 좋아하는 역사책이 하나 있다. 청나라에서 만든 <만주원류고>라는 책이다. 정식 명칭은 <흠정 만주원류고>인데 흠정이라는 말은 '황제가 직접 썼다'는 뜻으로 실제로 이 책은 건륭제가 직접 제작 지시와 검토를 한 책이라고 한다.

유사역사가들은 학문보다 권위에 기대기 때문에 황제 권력이 직접 개입한 이 책이 아주 훌륭한 책일 거라 생각한다. 정치가 학문에 개입하면 왜곡을 낳을 뿐이다. 하지만 유사역사학에서는 자기들 주장에 이용할 수만 있다면 다른 면은 살피지도 않는다.

이미 유사역사학의 난동이었던 1981년 국회공청회 때도 이미 <만주원류고>를 들고나온 바 있었다. 안호상은 <만주원류고>의 문제점을 역사학자들이 지적하자 이렇게 말한다.

"김철준 씨와 이용범 씨가 <흠정만주원류고>는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주장할뿐더러 이미 8년 전에는 그 책이 등외사료라고까지 신문에 혹평하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입니다. (중략) 이 <흠정만주원류고>는 역사자료 중에도 상자료입니다. 이것이 가치가 없다 잡동사니다 하는 것은 아마 이 책을 못 보신 탓입니다."

그러나 이 <만주원류고>는 조선 시대에도 잘 인용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만주원류고>가 작성되던 당시 청나라에는 <성경통지>, <대청일통지>와 같은 만주 지역을 다룬 지리서가 있었다. <만주원류고>의 지리 비정은 <성경통지>와 비슷하다. 비슷한 데는 사실 이유가 있다. <만주원류고>를 쓴 아계는 그 책을 쓰기 전에 <성경통지>를 수정하라는 명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칙명으로 <만주원류고>를 쓰라고 해서 1년 동안 <만주원류고>를 완성했다(청 건륭43년, 1778년). 그 뒤에 아계는 <성경통지>를 수정했다. 한 사람의 손을 탔기 때문에 두 책이 유사해진 것이다. <성경통지>는 우리나라 상고시기 지명들을 대부분 요동에 비정하고 있어서 조선 숙종 이후에 수입된 이래 요동에 고대 지명을 비정하고 싶어한 조선 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대청일통지>는 동북지방만 다룬 것은 아니어서 기록 자체가 소략하기는 하지만 조선에 대해서 따로 편목을 만들어 소개하고 있다. <성경통지>와는 다르게 한반도 안에 지명 비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은 모두 지명 고증이 잘못된 부분이 많아 <요사> 지리지와 함께 많은 비판을 받았다. <성경통지>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만주원류고>가 인용되지 않았던 것은 그 책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격 때문이었다. <만주원류고>는 부족조에서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백제, 신라, 말갈, 발해, 완안, 건주 순으로 숙신과 관련한 자료들을 열거한다. 책 제목 그대로 만주족의 원류를 파악하겠다고 쓴 책인데 여기에 부여, 삼한, 발해와 같은 한민족 국가들을 다 집어넣었다. 즉 부여, 삼한, 발해가 여진족의 변방 부족이 되도록 구성한 책이다. 언어와 음성적인 유사성을 통해 만주의 길림 지방이 신라의 계림이라고 말하는 등 학문적 신빙성과는 거리가 먼 책이다. <만주원류고> 강역조에서도 부여, 삼한, 옥저, 백제, 신라, 발해까지 다 만주에서 활동한 것으로 만들어 청나라의 전사(前史)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만주의 지배자였던 고구려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만주의 원류를 따지는데 만주를 통치했던 고구려를 쏙 빼놓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렇게 만들어진 책이 정상적인 역사책이라고 볼 수 있는가? 바로 이런 책이 <만주원류고>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고구려를 빼놓은 왜곡된 역사책을 만들었는가? 만주 지역의 역사적 주인공은 여진족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1981년 국회공청회에서 나온 김철준 박사의 만주원류고에 대한 평가를 보자.

"만주원류고는 뭐냐 하면 청이 명나라를 멸하고 중국을 점령했지만 원래부터 문화적인 콤플렉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여진족이 자꾸 중국문화에 의해 해체당하고 흡수당하고 그러니까 자기의 어떤 전통을 세우기 위하여 만주 지역에서 일어난 흥망성쇠의 기록을 전부 종합하고 그 안에 있었던 민족은 다 자기 부족이라고 주장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에요. 그 여진족의 이름 아래 신라, 백제가 있고 부여가 있는 것입니다."

이용범 교수의 일갈도 들어보자.

"청에서 <만주원류고>의 편찬이 문화적 전통이 없는 이 소수의 만주족이 높은 이 문화가치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수십 배 인구를 가진 한족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자기네들이 지녀야 하는 열등감을 감추지 못해서 지금 전 세계의 인류학자 사학자 고고학자들을 총동원해서도 해결할 수 없는 중국 고전에 이 숙신을 비롯해서 읍루, 말갈, 여진뿐만 아니라 한반도 역사까지도 그들의 것으로 여기다가 만들어 그들의 문화전통의 역사를 가식하려는 의도가 숨겨 있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의 역사를 송두리째 빼앗아서 그들의 것으로 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가 식민지사관 쫓아내자고 그래놓고 이제 와서 <만주원류고>를 믿으면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이것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이런 왜곡을 조선 학자들도 당연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원류고>는 이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그 내용의 대부분은 <성경통지>에 들어있으므로 <만주원류고>처럼 여진족을 미화하려고 만들어진 책을 굳이 이용할 필요도 없었다. <성경통지>와 같은 책을 이용한 사람들은 우리 역사의 강역을 확대하고 싶어한 학자들이었다. 남구만, 이세구, 김륜, 이동준, 신경준, 이만운 등이다. 이리하여 영·정조대의 <동국문헌비고>, <증정문헌비고>의 '여지고'에 적극적으로 이들 자료가 인용되기도 했다. 박지원, 유득공, 김정호 등도 긍정적 입장의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료들이 결국은 <만주원류고>처럼 우리 역사를 여진족의 역사에 집어넣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학자들도 등장했다. 정약용, 한진서, 윤정기 등이다. 그리고 이들의 뒤를 김택영, 장지연 등 개화기 역사지리 연구를 주도한 사람들이 이어나갔다. 이렇게 잘못된 역사지리 연구가 배척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때 <만주원류고>를 주목한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

<만주원류고>가 우리 역사를 여진족의 역사에 종속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을 간파했던 정약용의 초상화./출처=위키피디아 퍼블릭도메인
▲ <만주원류고>가 우리 역사를 여진족의 역사에 종속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을 간파했던 정약용의 초상화./출처=위키피디아 퍼블릭도메인
만주국을 중국과 분리시켜서 일본제국주의의 만주 진출을 합리화하는 침략논리를 개발하고 있었던 일본 학자들에게 <만주원류고>는 딱 입맛에 맞는 책이었다. <만주원류고>는 식민사관인 만선사관에 딱 어울렸던 것이다. 이 만선사관은 만주를 차지해야만 한민족의 영광이 있다고 생각하는 유사역사학에 계승되어 있다.

(이 글은 박인호, <명·청대 중국 지리서에 나타난 대조선 역사지리인식>, 경북사학 제21집, 1998.을 크게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이문영 역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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