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프리미엄스페셜리포트

낙랑군 소재 평양 아니라는 유사역사학이 왜 문제일까

  • 이문영
  • 입력 : 2017.07.03 15:01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물밑 한국사-54] 이른바 '영토 순결주의'라는 게 있다. 우리의 영토에는 일절 다른 민족의 '더러운' 손길이 닿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이 고대사에 투영되면 낙랑군이라는 '다른 민족의 더러운 손길'이 문제가 되고 만다.

그러나 유사역사학에서는 반대로 말한다. 사대주의와 식민사관 때문에 우리 역사를 축소시켜온 것이 한국 역사학계이고 그 대표적인 예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먼저 확인하고 가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역사가 무엇에 봉사하는가라는 문제이다. 과거 독립운동시기에는 독립에 기여하는 게 목표일 수도 있었다. 식민지를 벗어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절대적인 명제였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독립을 달성했다. 세계 유수의 국가 중 하나다. 그런 현재에도 역사가 무엇에 봉사해야 하는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있으나, 전통적인 교훈, 즉 과거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우리가 우리 민족으로부터밖에 뭔가를 배울 수 없다면 우리는 유럽사나 동아시아사 등등을 하나도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역사는 우리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비판적 사고 능력을 키울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비판적 사고 능력은 접어두고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스승의 말을 따라하는 꼭두각시라는 말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유사역사학에 빠진 사람들은 역사가 자국의 이익에 봉사해야 한다는 결연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국의 이익에 위배되면 숨기고 감춰야 한다고 태연하게 이야기한다.

"꼼꼼하게 사료적 근거를 따져서 작성했더니 결과적으로 중국 동북공정과 일제 식민사관의 주장대로의 결과가 나왔다면 하는 수 없다. 다만 그럴 경우 대한민국은 이런 지도 자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유사역사가들은 역사가 진리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에 봉사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애국한다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말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일본과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내는데, 우리는 있는 역사마저 없애버린다"라고 주장하게 된다.

국가를 위해 학문이 봉사하면서 위대한 민족을 노래한 경우가 있었다. 나치 독일과 일본제국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그들이 애국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사역사학 신봉자들은 "식민지로서 저항적 민족주의를 가꿔온 우리는 다르다"라고 말한다. 독일이 파시즘에 기울어진 것은 강한 시절의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베르사이유 체제 밑에서 허덕이던 때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정말 강한 나라는 개개인이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사역사가들은 일제의 식민사가들이 낙랑이 평양이라고 비정했고 그 후 식민사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계속 수용하고 있다고 오랜 세월 악선전해 왔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다. 없던 호랑이도 세 사람이 있다고 우기면 있는 걸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오랜 세월 모함을 해온 결과 없는 사라진 식민사학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다.

역사학자들은 우선 낙랑을 평양이라고 말한 것이 일제 식민사가들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했다. 유사역사가들이 조선시대 실학자들은 낙랑군을 요동에 비정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조선 실학의 후계자, 역사학계는 식민사학계 후계자처럼 프레임을 짰던 것이다. 하지만 정약용 등 실학의 거물이 낙랑군은 평양이었다고 고증한 것을 내밀자 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요동 비정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문명은 흔적을 남긴다. 만일 아무 흔적이 없는 문명을 찾아냈다면, 그건 내 차고에 분홍드래곤이 살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내 차고에는 분홍드래곤 한 마리가 살고 있는데,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 내 차고에 분홍드래곤이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유사역사학이 하는 말이 이와 같다. 요서의 어디가 낙랑군이었다고 말하는데, 수백 년을 유지한 그곳에는 아무런 유적·유물이 없다. 그렇지만 그곳이 낙랑군이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렇게 식민사학의 수괴라고 치를 떠는 이병도의 말을 인용해서 고고학보다 문헌을 중시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런 것은 이병도 시절의 낡은 이야기일 뿐이다. 고고학의 눈부신 성과에 대항할 방법이 없자 꺼내든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평양에는 엄청난 양의 낙랑군 유물과 유적이 나왔다. 2014년에 이 유물·유적을 정리한 책이 나왔다. 도서출판 진인진에서 나온 '낙랑고고학개론'이다. B4크기의 큼지막한 풀컬러책이다.

<낙랑고고학개론>, 중앙문화재연구원 엮음, 진인진, 2014
▲ <낙랑고고학개론>, 중앙문화재연구원 엮음, 진인진, 2014
동시대 어느 곳에서도 이와 같은 양의 유적·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 고조선의 왕검성과 낙랑군이 없었다면 왕검성은 외계인이 하늘나라로 들고 갔다고 보는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는 낙랑군 호구부 분석을 통한 고조선 유민의 분포 파악을 비롯하여 분묘, 토성, 토기, 청동기, 철기, 칠기, 금공예품 등의 유적·유물을 소개한다. 또한 낙랑군의 문화가 진한, 변한, 한반도 중부 지방, 고구려, 백제, 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분석하고 있다.


▲ '함녕원년삼월조'명 무덤벽돌. 함녕원년삼월조(咸寧元年三月造)라는 명문이 새겨진 전돌이다. 함녕 원년은 서기 275년으로 삼국시대 초기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전돌은 세워서 벽면을 만드는 것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출처=연세대 박물관
낙랑고분은 지금까지 3000여 기가 알려져 있다. 북한은 주체사관에 의해서 평양이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 무덤들을 최리의 낙랑국 무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한나라 유물들, 중국식 축조 방식 등의 명백한 증거들이 북한 주장을 허망하게 만들고 있다. 칠기와 와당에서는 명문들이 나온다. 후한 이후의 물건들만 나온다는 거짓 주장과 달리 전한 시대 물건들도 나온다. 낙랑 명문 수막새(기왓골 끝에 사용하는 기와)는 1식에서 4식까지 존재하는데 '명문'이라는 말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1식에는 낙랑부귀(樂浪富貴)라는 말이, 2식에는 낙랑예관(樂浪禮官), 4식에는 대진원강(大晉元康)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원강은 진나라의 연호이다.

유사역사가들은 흔히 낙랑 유물은 다 가짜라고 이야기한다. 가짜가 일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 가짜는 아니다.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이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는 것은 '낙랑고고학개론'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문영 역사작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