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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형 칼럼] 영화 남한산성 참회록

  • 김세형
  • 입력 : 2017.10.1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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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형 칼럼] 영화 '남한산성'은 청나라 10만 대군이 1636년 12월 14일 쳐들어오자 인조가 신하들과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복할 때까지 47일간의 역사를 다룬 영화다. 역사의 진실을 다룬 이 영화의 줄거리는 항복하여 훗날을 기약하자는 주화파 최명길과 오랑캐에 항복하느니 차라리 싸워서 죽음으로 산화하자는 척화파(주전론) 김상헌의 명분싸움으로 400년이 경과한 오늘날에도 시비가 오간다. 영화를 보고 난 국회의원들은 명(明)에 대한 의리와 청(淸)이라는 현실 인정을 두고 싸우는 장면이 북핵 문제 해결에서 미국과 중국을 택일해야 하는 한국의 처지에 비유하기도 했다. 야당은 당시 인조의 무능을 현재 사드를 두고 표류하는 대통령의 처지에 비교했다. 이런 주장들은 말싸움을 위한 논쟁일 뿐이다.

잠시 역사적 사실을 반추해보자. 선조임금 때 임진왜란(1592년), 정유재란(1597년)이라는 두 번의 큰 참화를 당한 후 광해군이 1608년 조선 15대 왕에 올랐으나 1623년 서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쫓아내고 인조를 등극시켰다. 광해군을 쫓아낸 명분은 명과 청 사이에서 양면외교를 함으로써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며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 존호를 폐하고 서궁(宮)으로 칭한 것은 불효라는 두 가지 죄목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의 진실은 서인들이 순전히 권력욕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사건이다. 그리고 인조를 내세운 후 배청(背淸) 정책을 펼침으로써 정묘호란(1627년), 그리고 병자호란이라는 두 번의 전쟁 참화를 자초한 것이다. 그로 인해 온 백성이 천형에 가까운 참화를 입었다. 임진란 전에 조선 인구는 500만명에서 300만명으로 줄었다는 통계가 있는데 병자호란 후 50만명이 청나라에 끌려갔다고 하니 전 국민의 6분의 1을 노예 신세로 전락시킨 것이다. 훗날 목숨을 부지하여 돌아온 여인들은 환향녀(還鄕女)로 불리며 화냥년의 주홍글씨까지 찍혔다. 개혁군주였던 광해군이 그대로 집권했더라면 병조호란은 없었다. 결국 당파싸움이 유죄였던 것이다.

영화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남한산성을 에워싼 용골대의 군사는 10만명, 그리고 성을 지키는 조선군사는 1만3000명, 지방에 흩어진 군사들과 연락망은 끊겼다. 주화파 최명길이 청군 측과 화해차 만나고 오면서 두 눈으로 보았듯 청의 대포는 조선 대포보다 배 이상 파괴력이 컸다. 요즘으로 치면 핵을 가진 군대에게 재래식 무기로 대들겠다는 격이었다.

싸우는 것은 곧 조선 군대의 몰살과 왕의 폐위였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차라리 그때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출발했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영화의 핵심 논쟁은 2017년 시각에서 보면 무엇이 문제였는지 몇 가지가 한눈에 드러난다.

첫째, 인조의 리더십의 철저한 무능이다. 조선정부는 왕신공치(王臣共治)의 논리로 다스려졌다. 그러나 왕은 장관(판서)들을 전문가로 키우지 않았다. 그래서 북문전쟁에 300명 군을 내보내 싸울 것이냐, 항복할 것이냐, 이런 군사적인 사안에서 인조 자신의 지식은 제로이며 늘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그러고는 왕 자신도 전문지식 없이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나중에 책임은 부하들에게 뒤집어씌운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을 했는데 그가 얼마나 책임의식을 가지고 영리하게 했는가를 비교해보라. 조선왕조는 임진, 정유, 정묘 등 3란을 당해봤으면 스파이를 파견하는 등 국제정세 파악에 나섰어야 했는데 너무 무능했고 군대 양성에 소홀했다.

둘째, 성리학의 자폐증에 함몰된 사고체계 문제다. 청나라를 시종 오랑캐라고 한다. 새로 태어난 강국은 아무리 힘이 세도 무시해야 한다는 억지 논리다. 오늘날로 치면 중국, 인도 같은 나라도 무조건 무시해야 한다는 편협한 사고다. 이 시기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지도 150년쯤 된 시점이 아니었던가. 훗날 영국의 파머스턴 경의 "국가 사이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정신은 광해군도 양면정책에서 보듯 알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서인과 인조가 유독 우물 안 개구리로 역사에 큰 죄를 남겼다. 당시 명나라는 이자성의 난으로 베이징을 함락시킬 때 거의 무혈입성할 정도로 명은 이미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김상헌이 청을 오랑캐 운운하며 최명길을 영원한 반역자로 뒤집어씌운 것은 참으로 아둔한 일이다.

셋째, 인조 자신의 비도덕적 인간성이다. 영화에는 다 나오지 않지만 전쟁이 끝나고 소현세자가 바로 인질로 청나라로 끌려갔다. 봉림대군, 인평대군과 함께였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군대가 베이징에 쳐들어가 명의 궁궐을 함락시키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현지에 머물면서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서양 신문명을 전수받았다. 청나라에서 9년 만에 삼십대 중반의 나이로 조선을 개명해 보겠다는 꿈을 안고 소현세자가 귀국한 게 1645년 2월의 일이다. 그러나 두어 달 만인 4월 하순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고 만다. 청나라가 세자를 왕으로 세우고 인조를 폐위할 것이란 두려움에 인조가 독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인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며느리인 소현세자빈, 두 명의 손자도 모조리 죽이는 잔악함을 보였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인조의 국정농단과 살인죄에 해당하는 적폐는 국왕자리에서 폐위되는 것은 물론 살아남기 어려운 중죄에 해당하리라.

최명길, 김상헌이 열띤 논쟁을 벌이는 그 순간에도 인조의 인간성은 그렇게 후안무치하고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은 비도덕적 인물은 지도자가 돼선 안 된다고 갈파했는데 인조를 두고 한 말 같다.

넷째, 김상헌의 선명주의는 오늘날의 포퓰리즘과 똑같다. 선명주의는 인기를 추구하는 한 개인의 문제이면 몰라도 국민, 국가의 운명이 달리는 사안이면 무책임의 극치다. 청의 군대와 싸워봤자 몰살인데 오랑캐의 가랑이를 기어가느냐는 대책 없는 논리는 오늘날 탈(脫)원전, 사드 반대와 흡사한 맥락이다. 김상헌은 자결하지 않고 청에 끌려갔다 와서 여든세 살까지, 당시 나이로는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가늘고 길게 살았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을 생각하는가.

임진란부터 병자호란까지 40여 년간 네 번의 전화를 당했으면 조선의 부국강병책의 화신이 되는 개혁군주가 왜 나오지 않았느냐는 아쉬움이다. 와신상담, 포빙악화(捕氷握火·겨울철에는 얼음을 껴안고 여름엔 화로불을 껴안는)의 절치부심으로 기어코 원수를 때려부수고 마는 월나라의 구천 같은 인물 말이다. 혹은 러시아를 중세에서 근대로 완전히 탈바꿈시켜 버린 표트르 대제 같은 개혁군주의 도래를 조선은 꿈꾸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구한말 일본·청·러시아에 찢어 발겨지고 왕비마저 살해당하는 그 참담한 비극은 없지 않았을까. 역사에 가정법은 한낱 공상이거늘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으로 안타깝게 그려보게 된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 즉 자신의 손자인 석철을 세손으로 앉히기는 커녕 척살하고 동생 봉림대군을 간택해 그가 효종으로 즉위하는데, 정통성이 없는 두 명의 군주는 조선의 정치를 완전히 버려놓고 말았다. 왕에 오른 계기에 하자가 있으니 인조와 효종은 사림(士林)들의 권위에 기대려 했다. 사림들은 두 왕의 약점을 철저히 이용하고 벼슬길에 나가면서도 퉁기면서 거절하거나 금방 관직을 내동댕이치고 돌아와 다음엔 직급을 더 높여서 부를 때까지 기고만장했다.

봉림이 세자 시절 송시열이 가정교사였는데 그 인연으로 중책에 스카우트하여 노론의 태두가 되고 훗날 송시열은 김상헌의 후예들(안동 김씨)을 자자손손 출세 길을 달리게 한 반면 최명길의 자손들은 벼슬길에서 완패하고 말았다. 역사에서 사필귀정은 진정 무엇이던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의 김상헌은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끌려가고 그곳에 후일 끌려온 최명길과 해후하고 화해하였다. 김상헌은 최명길보다 열여섯 살이나 많았으나 포용력은 한 수 아래였다. 김상헌은 귀향하여 일흔여섯 살에 좌의정에 제수됐고 죽어서는 영의정에 추증됐으며 안동 김씨 후손 여러 명이 정승길에 올랐다.

이 모든 일의 씨앗은 동인-서인으로 갈라 첫 당파를 일으킨 이황(퇴계)-이이(율곡)가 원죄다. 그들은 선조 때 벼슬했던 사람들로서 오늘날 선조의 치적이 과연 무엇이던가. 그저 조선을 자폐증 속에 가둔 성리학을 떠받들고 백성을 힘들게 하고 왕의 치세논리를 튼튼하게 해준 것 외에 뭐가 있는가. 인조반정은 율곡의 직계수하들이 벌인 일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화폐(돈)에 이황, 이이의 초상이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인지 묻게 된다.

남한산성 영화를 보고 오늘의 시점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나. 정말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떠올린다. 첫째는 최고 리더(대통령)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둘째, 국회의 좌우파 대립은 400년 전 주화파-척화파 대립과 별 차이가 없으니 청산 좀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또 고뇌한다.

세계는 미래로 달려가고 있거늘 왜 한국 문재인정부는 영화부터 적폐청산까지 모조리 과거로 과거로 몰려가고 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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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형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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