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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년 일촉즉발 화룡성 대치…고구려사 극적 명장면

  • 임기환
  • 입력 : 2017.12.2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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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35] 436년 5월, 북연(北燕)의 수도 화룡성(和龍城) 일대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화룡성을 둘러싸고 동쪽에서 진군한 고구려군, 서쪽에서 다가온 북위군이 서로 군세를 자랑하며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룡성은 지금 중국 요령성 조양시 일대다. 고구려군이 요하, 대릉하를 건너 요서 깊숙이 북연의 심장부까지 진격한 것이다. 왜 고구려군은 이곳 화룡성까지 출병한 것일까?

북중국을 차지한 북위(北魏)는 432년부터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계속 북연을 압박하였다. 한때 요서와 일부 화북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북연은 북위의 공세에 밀리면서 영역을 빼앗기고 세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북연의 풍홍(馮弘)은 북위와 휴전을 원하였지만, 북위는 압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435년 곤궁해진 북연은 남조 송(宋)에 신하를 칭하면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송나라도 북위를 견제하고 싶었지만, 풍홍을 연왕(燕王)으로 책봉하는 외교적 제스처 수준 이상은 어려웠다.

풍홍은 오히려 고구려로부터 현실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고구려에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보내 원병을 청하면서 동시에 위급 시에는 고구려로 망명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그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오던 북연의 위기에 나 몰라라 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서부전선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북연에 대한 북위의 본격적인 공세를 의식한 장수왕은 435년 6월에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북위 역시 북연을 고립시킬 의도로 장수왕을 책봉하면서 화답하였다. 이때가 양국이 서로의 존재를 비로소 분명히 인식한 첫 접촉이었다. 북연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의중을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양국은 속생각이 서로 달랐다. 고구려는 북연의 존립을 원했고, 북위는 북연을 병합하고자 했다.

북위는 북연에 대한 최종 공략을 앞두고 외교 전략을 구사했다. 그동안 충돌이 잦았던 북방 유목국가 유연(柔然)과 434년에 화친을 맺었다. 436년 2월에는 고구려 등 동방의 여러 나라에 사신을 보내 북연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그리고 4월부터 북위는 북연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북위의 기대와는 달리 군사행동에 나섰다. 장수왕은 장수 갈로맹광(葛盧孟光)에게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풍홍을 구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화룡성 밖에서 고구려군과 북위군이 대치하게 된 것이다. 이때 화룡성 안에서는 친고구려파와 친북위파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서로 자기 편 군대를 성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먼저 친북위파가 성문을 열어 북위군을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북위군은 의심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이 틈을 타 고구려군이 먼저 화룡성 내로 진입하여 성을 장악하였다.

고구려군이 들어오자 그제야 안심한 풍홍은 화룡성에 남아 있던 백성들을 이끌고 고구려로 망명하고자 했다. 풍홍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화룡성 밖으로 탈출하였는데, 갈로맹광은 북연의 군민을 앞세우고, 고구려군을 거느리고 뒤를 지켰다. 이때 북연군민과 고구려군이 이루는 대열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회군하는 고구려군의 위세에 압도된 북위군은 감히 이를 저지하거나 맞서 싸울 생각을 못하고 멀리서 고구려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북연의 재상 풍소불(馮素弗) 무덤에서 출토된 금장식. 당시 선비족 국가 삼연(三燕)과 고구려와의 문화 교류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다.
▲ 북연의 재상 풍소불(馮素弗) 무덤에서 출토된 금장식. 당시 선비족 국가 삼연(三燕)과 고구려와의 문화 교류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다.

이 화룡성 출병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필자는 이 대목을 고구려 역사에서 매우 극적인 명장면의 하나로 꼽고 싶다. 왜냐하면 국제관계에서 전쟁과 외교라는 양면 전략을 적절하게 구사한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북중국의 패자로 떠오르는 신흥 강국 북위에 대해 군사적으로 맞서 전쟁까지도 불사할 수 있는 결단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직접 공격을 받는 상황이 아니라 이웃나라 북연에 대한 구원 문제인데 말이다. 물론 당시 북위의 공세를 놓고 볼 때 북연은 고구려에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일 수 있다.

하지만 북위가 직전에 사신을 보내 북연을 공격한다는 뜻을 알리고 이에 개입하지 말라고 은근히 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대규모 군대를 화룡성에 보낸다는 것은 북위와의 전쟁도 꺼리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북위에 표시한 셈이다. 또 수만의 대규모 정예군을 보냄으로써 북위군에 고구려군의 위세를 보여주어 결과적으로 양국의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을 피하게 한 점도 장수왕의 계산 속에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그리고 화룡성을 먼저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포기하고 북연의 주민과 재화만을 이끌고 회군하였다는 점도 전략상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화룡성을 지키려고 했다면 아마도 북연군의 대규모 공세에 직면하였을 것이다. 풍홍의 온갖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연에 대한 공격에 집착하고 있던 당시 북위의 태도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고구려군이 북연의 영토를 북위에 넘겨주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북위도 고구려와 전쟁을 벌일 직접적인 구실이 없어진 셈이다.

이에 북위는 곧바로 풍홍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장수왕은 사신을 보내 "멀리서 풍홍과 함께 왕의 가르침을 받들 것"이라고 답하였다. 말은 공손하지만 북위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한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북위 세조(世祖)는 대규모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고자 했지만, 후일을 기약하자는 반대가 많아 중단되었다. 왜냐하면 북방의 유연이 2년 전에 맺었던 화친조약을 깨고 북위를 침공하여 양국 사이에 다시 충돌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구려가 화룡성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사정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이런 정세를 염두에 둔 듯 이듬해 437년 2월 고구려는 북위에 사신을 보냈다. 아마도 북위의 입장을 탐색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장수왕은 북연으로부터 이끌고 온 풍홍과 주민들을 요동에 안치하였다. 풍홍은 곧이어 고구려 조정과 분란을 일으키는데 이에 대해서는 차회에서 살펴보겠다. 애초 화룡성 출병 시부터 고구려는 북연 주민집단의 이주에 관심이 많았던 듯하다. 북위와의 충돌을 불사하면서도 화룡성에 출병한 실제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었던 것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고국양왕, 광개토왕대에 요동 지역을 확보하였지만, 보다 확고한 영역 지배를 구축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연으로부터 사민해온 수만의 대규모 주민을 집중 투입하여 요동 지역 개발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북위와의 외교 교섭을 시작으로 전쟁도 불사하는 화룡성 출병이라는 과감한 결단, 일촉즉발의 군사적 대결을 피하고 주민을 거느리고 철군하는 실용적인 전략, 다시 외교를 통한 대응 전략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면 효과적인 외교 전략이란 전쟁도 두려워하지 않는 군사력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가능함을 배우게 된다. 외교와 전쟁, 양날의 검을 효과적으로 구사한 것이 장수왕의 전략이었고, 당시 국제 정세에서 장수왕은 첫 시험무대를 성공적으로 통과한 셈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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