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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이 된 말'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연대의 힘'

  • 김기철
  • 입력 : 2018.01.1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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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홍성수 지음, 어크로스 펴냄)

[김기철의 책으로 세상읽기-22] 중학생 때 보던 '성문기본영어' 비교급 편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펜은 칼보다 강하다.'

참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멋진 글을 쓰면 세상도 멋져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펜으로 세상을 정의롭게 바꾸겠다는 야망에 들떴을 때였다. 문장 하나가 장래희망에 '기자'라고 적게 했다.

홍성수 교수의 책 '말이 칼이 될 때'를 받아들고 30년 전 나를 흥분시켰던 저 문장을 생각했다. 부끄러워졌다. '칼보다 강한 펜'을 꿈꿨으나 나의 펜은 그냥 칼이 되어버렸다. 의사의 손에 들려진 칼이 아니라 강도의 손에 들려진 칼, 나의 펜은 그런 칼이 된 것은 아닌가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먼저 반성문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1

2001년 3월 29일이었다. 한 화장품 광고에 나오는 여자 모델이 사실은 '트랜스젠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를 추진했다. '트랜스젠더'라는 말도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합정동의 한 연예기획사 사무실을 찾아가서 그 여자 모델을 인터뷰했다.

다음날 아침신문에 '주민등록번호 790217-1xxxxxx. 그는 여자다'로 시작하는 기사를 썼다. 그 기사로 하리수 씨가 언론에 처음으로 소개됐다.

17년 전 그 기사를 다시 찾아 읽어보니 낯뜨거워진다. 기사 전체에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호기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고맙게도 하리수 씨는 사회적 편견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서 트랜스젠더의 법적인 인정 판결을 받아내는 등 한국 사회의 진보에 기여했다.



#2

2009년 기동취재팀장 시절 '다문화가정'에 대한 기획시리즈를 연재했다. 후배가 다문화 가정 출신으로 연희초등학교 회장이 된 한 어린이를 인터뷰해왔다. 후배가 쓴 인터뷰 기사 속 어린이는 지극히 평범한 어린이였다. '다문화가정 아이'라고 할 때 떠오르는 어떤 그늘도 없었다. 후배한테 그런 그늘을 기사에 녹일 것을 지시했다. '다문화가정'에 대한 편견을 없애자는 캠페인 기사를 쓰면서 정작 스스로 그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본 것이다.

3년 후 이 어린이의 엄마가 우리나라의 첫 이민자 출신 국회의원이 됐다. 바로 이자스민 전 의원이다. 이자스민 전 의원은 일베 등의 인격모독적 공격에도 꿋꿋이 견디며 다문화가정과 이민자의 권리 확대에 힘을 보탰다.



#3

2012년 4월 수원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귀가하던 한 여성이 끌려가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된 것이다. 처음 국민들의 분노는 경찰에게로 향했다. 피해 여성이 경찰에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전화로 신고까지 했으나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인 오원춘이 '조선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언론 보도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모든 원인을 '조선족'의 문제로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원춘이 몽골에서 도축 일을 했다는 사실까지 가져다가 토막살인의 원인으로 삼고, 조선족들이 상습적으로 장기 밀매를 한다는 것까지 더해 그들을 흉포한 집단으로 그렸다. 나 역시 후배들에게 '조선족에 의한 흉악범죄' 사례들을 발굴하고 조선족 범죄를 막을 수 있는 방안에 관한 기획기사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황해' '범죄도시'같은 영화 속에 그려지는 '중국동포'의 모습은 이런 언론 보도가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주류 언론들은 평소에는 인권 확대를 옹호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듯 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너무 쉽게 편견에 무릎을 꿇는다. 외부 압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선정적인 기사'를 위한 자발적인 투항에 가깝다.

중학생 딸의 친구를 살해한 '이영학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언론은 이영학과 그 중학생 딸이 갖고 있었던 '장애'에 집중했다. 그의 정신적 문제, 성적인 일탈행위 등 모든 원인을 '장애'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언론의 보도 태도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확대하고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문제의 올바른 해결까지 방해한다. 올바른 진단이 없으니 올바른 해법도 없는 것이다. 결국 그 피해는 소수자에게만 머물지 않고 모두에게로 향한다.

저자 홍성수 교수
▲ 저자 홍성수 교수

홍성수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는 혐오표현이란 무엇인지, 혐오표현이 왜 사회적 문제가 되는지, 혐오표현을 막을 수 있는 법적·제도적 방법은 없는지 쉽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책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인식의 지평 위에서 새로운 입장과 시작을 갖게 된다. 여기 저자가 그린 '혐오의 피라미드'가 있다.

혐오의 피라미드.(어크로스 제공)
▲ 혐오의 피라미드.(어크로스 제공)

혐오는 편견에서 자란다. 사람의 생각 속에서 자란 혐오의 감정이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이 혐오표현이고 혐오표현은 구체적인 차별행위로 이어질 수도 있고 이것들이 제시되지 않으면 증오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고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같은 집단학살로 발전할 위험도 있다.

'혐오의 피라미드'에서 차별행위 윗 단계는 그다지 논란거리가 아니다. 현재 우리 법체계 안에서도 혐오표현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졌을 때에는 법적 처벌이 가능하고 피해구제의 수단도 있기 때문이다.

편견은 표현되지 않는 이상 이를 제지할 방법이 없다. 문제는 혐오표현이다. 혐오표현을 어떻게 처벌하고 궁극적으로 이를 방지하느냐에 있다.

저자는 두 가지 방식을 예시한다. 하나는 유럽 방식이고 하나는 미국식이다.

유럽 국가들은 주로 '혐오표현금지법'을 도입해 혐오표현 자체를 법으로 제지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여기에는 나치와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미국은 '혐오표현'을 법으로 금지하면 '표현의 자유' 자체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판단으로 혐오표현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있다. '더 많은 표현'과 '더 좋은 사상으로 맞서는 것'이 '최고의 복수'라는 믿음과 혐오표현을 시민사회의 힘으로 퇴출시킬 수 있다는 역사적 자신감이 함께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렇다고 미국이 혐오표현 문제에 대해 손놓고 있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학교, 기업, 언론 등 공공 영역에서 혐오표현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등 형사 규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규제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EBS가 방송프로그램에서 칼럼니스트 은하선 씨를 일방적으로 퇴출시킨 것과 같은 일이 미국에서 일어난다면 그 방송국은 엄청난 징벌적 배상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언론과 방송, 영화는 편견에 기대어 편견을 확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진은 조선족 범죄조직을 다룬 영화
▲ 언론과 방송, 영화는 편견에 기대어 편견을 확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진은 조선족 범죄조직을 다룬 영화 '범죄도시'의 한 장면.

한국은 '혐오표현' 문제에 있어서 세계적인 흐름에서 한참 비껴나 있다. 혐오표현에 관한 국가적인 차원의 조치가 전무할 뿐 아니라 소수자 인권 문제에 대한 논의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보수적인 기독교계가 '표'를 무기로 정치인과 지방자치단체가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의 인사청문회가 국회에서 진행될 때 기독교단체는 의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김이수 후보자가 동성애를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며 그를 낙마시키라고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보수 기독교계는 선거 때마다 후보자들에게 동성애 반대,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등을 약속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압박에 자유로울 수 없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지난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회였다. 당시 홍준표 후보는 문재인 후보에게 "동성애에 반대합니까?"라고 물었고 문 후보는 "그럼요"라고 답했다.

저자는 '혐오표현금지법' '차별금지법' 제정 같은 법적이고 상징적인 조치뿐 아니라 사회적인 연대의 힘으로 '혐오표현'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수자들에게 '당신들 옆에 우리가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동시에 혐오표현을 하는 사람이나 세력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서울대에서 벌어진 일을 예로 들었다. 2016년 서울대 성소수자 동아리 QIS가 '관악에 오신 성소수자, 비성소수자 신입생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교내에 붙였는데 이 현수막이 일주일 후에 찢어졌다. 누군가 일부러 훼손한 것이다. 동아리 학생들은 현수막을 다시 제작하는 대신 중앙도서관 앞에 찢어진 현수막을 걸어놓고 학생들에게 반창고로 붙여달라고 요청했다. 지지와 연대의 의사를 표명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혐오표현'을 사용하는 사람과 세력을 고립시키는 것은 백신으로 전염병 확산을 차단하는 것과 메커니즘이 같다. 율라 비스는 '면역에 관하여'에서 "자신은 백신을 맞았지만 미접종자가 많은 동네에서 사는 사람이 자신은 맞지 않았지만 접종자가 많은 동네에서 사는 사람보다 홍역(전염병)에 걸릴 가능성이 더 높다"며 "면역은 사적인 계좌인 동시에 공동의 신탁"이라고 주장했다.

소수자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사적인 계좌를 늘리는 동시에 공동의 신탁을 하는 행위인 셈이다. 소수자를 지키는 행위이고 공동체를 지키는 행위이고 결국은 나 자신은 지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혐오표현'을 '대남비방 삐라' 같은 존재로 전락시켜야 한다.

예전에는 동네 뒷산에 삐라만 발견돼도 겁이 덜컥났을 뿐 아니라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도심 한가운데에서 삐라가 대량으로 발견되도 대수롭지 않다. 삐라를 전혀 위협적이지 않을뿐더러 시대에 뒤떨어진 우스꽝스러운 물건으로 만든 것은 튼튼하고 건강해진 우리 사회다. 우리 연대의 힘이 '혐오표현'을 '삐라'처럼 만들 수 있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마사 누스바움을 인용한 의미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누스바움은 그의 저서 '혐오에서 인류애로'에서 "'인류애의 정치'란 존중과 상상력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며 "모든 존중에는 반드시 상상력을 동원해 타인의 삶에 감정적으로 참여하는 능력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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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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