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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위대한 실패자였다

  • 김기철
  • 입력 : 2018.01.3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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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일생 최대의 실수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이덕환 옮김, 까치 펴냄)

[김기철의 책으로 세상읽기-23] 이 책을 펴든 것은 순전히 아들녀석 때문이다. '이론 물리학자'를 꿈꾸는 녀석은 '증명할 수 없는 난제' 앞에 자주 좌절한다. 그럴 때마나 "과학은 수많은 실패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라며 조언과 격려를 해주지만 사실은 녀석이 느끼는 좌절감을 실감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아들 녀석에서 "문송합니다(문과여서 죄송합니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과학자들이 겪는 실패와 좌절을 이해하고 싶어, 그래서 과학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녀석의 곁을 따라 걷고 싶은 마음에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아인슈타인 일생 최대의 실수'를 읽었다.

이 책은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일대기를 다루면서도 주로 그의 과학적 성공과 실패에 초점이 맞춰졌다. 아인슈타인의 삶 속에서 대체로 작은 핸디캡이나 실패는 그를 성공으로 이끄는 징검다리였고 큰 성공은 보다 큰 실패의 불씨였다.

저자 데이비드 보더니스
▲ 저자 데이비드 보더니스

책은 1953년 노년의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대 연구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쓸쓸한 퇴근길에서 시작된다. 현대 물리학의 모든 것이었으면서도 아인슈타인은 왜 말년에 물리학계의 핵심에서 멀어졌는지, 그와 대조적으로 그의 친구였으나 과학적 업적에서는 비교가 안되게 뒤떨어진 닐스 보어는 그 나이까지 물리학계의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는지 그 이유를 역추적하는 방식으로 서술됐다.

"천재가 어떻게 절정에 도달하고 어떻게 무너지는가? 우리가 실패와 노화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신뢰의 습관을 잃어버리게 되고 과연 그런 능력을 다시 되살릴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가 이 책의 주제들이다."(15쪽)

아인슈타인의 젊은 날은 실패와 실수로 가득했다. 고등학교를 자퇴했고 스위스 폴리테크닉대에 지원했지만 프랑스어와 화학 점수 때문에 낙방했다.

재수를 해서 폴리테크닉에 입학했지만 처음 만난 물리학 지도 교수인 하인리히 베버는 최악이었다. 베버는 물리학적 지식은 이미 세상에 다 나와 있고 미래의 물리학자들이 새롭게 밝힐 법칙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스위스의 대학들은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유대인 차별이 아인슈타인을 이론물리학의 세계에 남게 해줬는지도 모른다.

당시 교수들은 졸업 후 취직도 잘되고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공학이나 응용물리학과 같은 곳은 스위스 학생들을 보내고 유대인 학생들은 주로 인기도 없고 위상도 낮은 이론물리학 같은 전공을 선택하도록 했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었지만 대학원 진학에 실패했다. 여러 교수에게 "당신의 조교로 받아달라"고 편지를 썼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 와중에 또 4살 연상의 대학 친구 밀레바 마리치와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기 전에 애부터 낳게 됐다.

자기 힘으로 대학원 입학도 못하고 직장도 구하지 못하다가 친구인 그로스만의 아버지 추천으로 특허사무실에 일자리를 잡는다. 그마저도 2급 기술직에 응모했지만 그의 기술 능력에 실망한 소장이 3급 기술직을 제안해 겨우 자리를 구했다.


▲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한 에르빈 슈뢰딩거

그런데 역설적으로 대학원 입학 실패와 특허사무소 취직이 또 아인슈타인의 성공의 발판이 됐다.

특허사무소에 다니면서도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연구를 계속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깊이 파고들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당시 대학원에 있었다면 반드시 연구 결과들을 내놓아야 해서 어설프고 불안전한 결과를 성급하게 논문으로 발표해야 하는 압력을 느꼈을 텐데 아인슈타인은 연구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그런 압력을 "의지가 강한 사람만이 물리칠 수 있는 천박함에 대한 유혹"이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특허사무소에서 주로 전기공학 분야의 새로운 장치들에 대한 평가업무를 했는데 그 경험 또한 전자 공학의 최신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26세가 될 무렵 획기적인 일이 일어났다. 여러 문제를 동시에 연구하고 있었는데 1905년 갑자기 교착 상태가 깨지면서 물리학의 역사를 바꿔놓은 5편의 논문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을 밝혀낸 그 유명한 'E=mc²'이 들어 있는 논문을 발표한 것도 바로 1905년이다.

하지만 물리학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의 논문의 형식이 다각적인 각주를 사용하는 일반적인 과학 논문과 달랐기 때문이다.

논문에 자신감을 얻은 아인슈타인은 다시 학교에 자리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역시 실패의 연속이었다. 취리히의 한 고등학교 교사 자리에 지원하지만 21명의 지원자 중 면접에 오른 3명에도 들지 못했다.

베른대학교에 강사 자리를 얻으려고 지원하면서 노벨상의 가치가 있는 특수상대성 이론 논문을 첨부하지만 대학 측은 "이런 잡다한 논문 말고 박사학위 논문이 필요하다"고 반려한다.

프린스턴대에서 귀가 중인 노년의 쓸쓸한 아인슈타인
▲ 프린스턴대에서 귀가 중인 노년의 쓸쓸한 아인슈타인

유럽 물리학계가 서서히 아인슈타인의 연구성과들을 인정하기 시작해 1909년 베른대에 겨우 자리를 잡는다. 베른대 교수회가 아인슈타인 임용을 거부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가장 유력한 물리학과 교수 후보이자 폴리테크닉 시절 친구였던 프리드리히 아들러가 자진사퇴하면서 어렵게 임용이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아들러는 이렇게 말하면서 사퇴했다. "우리 대학이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을 임용하는 것이 가능한데도 나를 임명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 될 것이다."



일반상대성이론 'G=T' 공식의 탄생 과정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독일의 천문학자 에르빈 프로인틀리히는 아인슈타인에게 일식 때 성능 좋은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찰하면 별빛의 휘어짐을 입증할 수 있다고 얘기하고 그 관찰 계획을 세운다.

당시 독일의 세계적 무기 거래상인 크루프 가문의 지원을 받아 프로인틀리히는 성능 좋은 천체 망원경을 가지고 일식이 예정된 1914년 7월 크림반도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며칠 뒤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1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러시아군이 크림반도에 진주해버린다. 독일인이 엄청 좋은 망원경으로 먼 곳을 관찰하고 있고 더구나 그의 가방에는 무기거래상과의 후원 계약서까지 있었다. 당연히 러시아군의 포로가 돼버렸고 아인슈타인의 증명계획도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일반상대성 이론 'G=T'는 아인슈타인의 최대 업적인데 이것은 또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 돼버렸다.

'G=T'라는 아름다운 공식에 대해 천문학자들은 이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끊임없이 팽창하고 변하는 것인데 자신들의 관찰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아인슈타인은 현실적인 힘 앞에 굴복하고 공식을 수정한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양보해야만 하고 만약 우주에 대해서 관찰할 수 있는 사실들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도 역시 그렇게 생각해야만 한다고 결심했다. 자신의 1915년 방정식이 우주가 변화하고 있다고 예측했다면 그는 방정식을 수정해서 그런 예측을 하지 않도록 만들어야만 했다……(중략)……결국 아인슈타인은 1917년 2월 베를린에서 개최된 프로이센 과학원 학술회의에서 '사실은 내가 여기서 발표했던 중력의 방정식들은 이런 근본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수정되어야한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선언했다……(중략)……그렇게 아름답고 그렇게 대칭적이었던 방정식 G=T 대신, 이제 절뚝거리는 G-Λ(람다)=T로 수정한 것이다."(164~165쪽)



그런데 문제는 나중에 관찰에 의해 자신이 처음에 제기했던 G=T가 옳았음이 입증된다. 여기에 기여한 사람 중 한명이 '허블망원경'을 발명한 에드윈 파월 허블이다. 허블은 관찰을 통해 별들은 더 멀리 있을수록 더 뚜렷하게 붉어진다는 것을, 외계 우주 영역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상관없이 실제로 우리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즉 우주가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이에 대해 데이비드 보더니스는 "아름다운 단순성을 가진 아인슈타인의 본래 방정식은 되살아났지만, 그의 심리 상태는 회복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주류의 지적에 의해 자신의 이론을 한번 수정했으나 결국 자신의 이론이 맞았다는 이 경험이 그를 도그마에 빠지도록 만들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 이것은 그의 두 번째 실수의 원인이기도 하다.


▲ '양자론'으로 논쟁을 벌였던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그의 두 번째 실수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과 무작위성을 수용하지 못한 것이다. 1927년 10월 24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열린 5차 솔베이 회의에서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로 양자역학의 가능성을 부인했다. 아인슈타인이 주사위 놀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양자론이 세상을 확률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계에서 범접할 수 없는 위상을 차지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섣불리 대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닐 보어는 "신의 주사위 놀이는 자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네. 신이 왜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지 잘 생각해보게나"하며 당당하게 맞섰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양자론 논쟁은 결국 보어의 승리로 끝났다.

아인슈타인은 이후 여러 차례 자신의 오류를 수정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직관에 대한 믿음이 너무 완고했다. 자신의 직관이 옳다는 믿음에서의 시작이 그를 현대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만들어준 원동력이었지만 그것이 또한 그를 독선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게 했다.

양자역학의 최신 결과들을 멀리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은 원자의 내부에서 새로운 입자들을 찾아내는 시대적 돌파구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그건 아인슈타인의 실패로 그치지 않았다. 인류의 손실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으려면 움직여야 한다(Life is like riding a bicycle. To keep your balance you must keep moving)"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그의 도그마에 너무 일찍 멈춰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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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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