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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상속세가 무려 55%... "일본에선 도저히 못 죽어"

  • 박대의
  • 입력 : 2018.02.0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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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꺼풀 벗긴 글로벌 이슈-97] "이 나라에서는 도저히 못 죽겠습니다."

지난해 6월 도쿄의 한 회의장에서 영국 투자신탁 회사 슈로더 일본법인의 가시와기 시게스케 사장이 던진 발언은 참석자들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이날 회의는 도쿄도가 해외 자산운용회사를 유치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가시와기 사장은 당시 회의를 주재했던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앞에서 "일본의 상속세 제도가 외국인 투자자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며 노골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블룸버그는 가시와기 사장의 발언을 제목에 내걸고 최근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중심으로 상속세 제도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2013년 일본 정부는 국적에 관계없이 일본에 주거지를 보유한 자가 사망했을 경우 사망자가 가진 모든 자산에 상속세 55%를 부과하는 법을 제정했다. 당초 법의 목적은 일본인이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국적을 포기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일본에 체류하는 외국인들까지 과세 대상에 포함되면서 장기체류자를 중심으로 비판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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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뒤늦게 지난해 3월 단기체류 외국인의 피해를 막는다며 상속세 부과 대상 외국인의 체류 기간 기준을 기존 5년에서 10년으로 늘려 대상자를 축소했다. 그러나 반발은 여전하다. 폴 헌터 일본 국제은행협회(IBA) 사무국장은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에게 10년은 결코 길지 않다"면서 "일본은 외국인이 오래 머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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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은 도쿄가 '국제금융도시' 계획을 추진하면서 더욱 확대됐다. 국제금융도시는 2016년 7월 도쿄도지사에 취임한 고이케 지사의 공약이었다. 고이케 지사는 도쿄를 뉴욕·런던 등에 버금가는 국제 금융 중심도시로 만들겠다며 개혁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지난해 11월 발표한 '국제금융도시 도쿄' 구상에는 자산운용회사 육성프로그램 등 파격적인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얻은 것은 법인사업세, 법인도민세 등 지방세 2개를 인하하는 내용이었다. 고이케 지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세제개혁 내용을 언급하면서 "(감세 정책이) 국제금융도시 실현을 향한 스타트라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16일에는 싱가포르에서 "도쿄 내 기업의 법인세율을 최대 10%까지 내리겠다"고 밝히면서 주목도를 높였다.

도쿄는 현재 개인이 보유한 자산을 활용해야만 국제금융도시 계획이 힘을 얻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은행(BOJ)에 따르면 지난해 6월 말 기준으로 현금과 예금·주식 등 일본 가계가 보유한 금융자산은 1832조엔(약 1경7863조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현금과 예금은 945조엔(약 9220조원)으로 전체의 51.6%를 차지했다. 다이이치생명 조사에 따르면 가정에 보관하는 일명 '장롱예금'은 43조엔(약 419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가계금융자산이 외국 자산운용회사를 끌어들일 수 있는 매개체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BOJ가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 이후 자금 운용이 어려워진 일본 시중은행들은 잇달아 보통예금 금리를 낮췄다. 현재 일본 시중은행 보통예금 금리 중 가장 낮은 곳은 0.001%까지 떨어졌다. 1년 동안 은행에 100만엔을 맡겨 얻을 수 있는 이자가 10엔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도쿄도는 장롱예금에 의존하는 고령자들에게 매력적인 투자처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도쿄를 자산운용기업 밀집지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외국 자본이 들어오면 지자체의 경제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도 내비쳤다.

그러나 현재의 세금 제도 아래에서는 외국인 투자자들을 유입시킬 수 있는 동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국세인 상속세를 없애지 않고서는 국제적 경쟁력의 상실이 우려된다.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 대표 금융도시들은 1980년대 이후 상속세를 폐지했으며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주요 국가들도 최고 세율이 30~45%로 일본보다 낮다. 고이케 지사는 "정부 측에 이미 상속세를 개정해 달라고 요구한 상태"라며 "지속적으로 협의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기본적으로 증세가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도쿄도와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상속세에 대해서도 사업 승계가 어려운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일정 기간 보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나 폐지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정치적 앙숙 관계인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고이케 지사의 관계도 영향을 끼칠지 주목된다. 지난해 9월 중의원 선거에서 아베 총리는 소비세 10% 인상을 주장한 반면 고이케 지사는 소비세 인상 중단을 주장해 정반대의 공약으로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결국 아베 총리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고이케 지사가 정치적 동력을 상실한 점도 도쿄의 국제금융도시 구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일본 경제 전문가들은 비현실적인 상속세 제도의 개정이 필요하다며 일관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나가하마 도시히로 다이이치생명 경제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현재 일본에 체류 중인 외국인은 2016년 말 기준 238만명으로 역대 최고"라며 "인구 감소에 외국인 인재 확보에 힘쓰는 정부 정책과도 상충되는 상속세 제도는 일본 경제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대의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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