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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털모자(Winter Pile Cap)_하

  • 남보람
  • 입력 : 2018.10.3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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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남보람의 전쟁 그리고 패션-64]

1. '한국전쟁' 하면 미군 참전자가 떠올리는 것, 추위와 털모자

군인의 털모자는 '추위'와 '생존'의 상징이다. 그 이미지는 혹독하고 처절하다. 그러나 동시에 털모자는 따뜻하고 믿음직스럽다.

2013년 워싱턴에서 미군 참전자를 만났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추웠어요. 제기랄, 정말 추웠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그때를 잊으려는 듯 고개를 흔들다가 "그래도 피시 테일(M-51 파커)과 털모자는 정말 따뜻했지"라고 말했다.

2. 군밤·군고구마 장수의 필수템이 된 미군 털모자

그런데 이 미군 털모자는 한국에서 흥미로운 변용을 한다. 군대 밖으로 나와 겨울에 군밤·군고구마 장수들이 쓰는 일종의 통일된 유니폼이 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군밤 모자' '군고구마 모자'로 잘 알려져 있다.

군고구마 역사 자체가 흥미롭기에 한번 찾아봤다. 고구마는 조선 후기에 한반도에 들어왔다가, 일제강점기 때 주식 대용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고구마를 대량생산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부터였다. 1953년 늦여름, 정부가 '당밀' 수입을 금지하면서 고구마를 그 대용으로 생산하라고 지시했다. 정부는 술의 원료인 '주정' 생산에 국산 고구마를 쓰면 수입이 줄고 농가가 번영하니 일거양득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생산량은 전에 없이 급증했다. 정부 지시라고 하니 너도나도 고구마를 심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너무 많이 심은 것이다. 체계적인 유통 경로나 판로가 마련되지 않은 채 생산부터 늘렸으니 고구마가 남아돌 수밖에. 그래서 1954년 신문을 보면 '고구마를 김장에 쓰자'든가 '고구마 생산이 성공적으로 늘어 전분공장에 대량 납품하게 됐다' 등 정부 시책 호응 기사가 종종 눈에 띈다. '군고구마'는 남아도는 고구마를 활용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고구마를 길에서 구워 돈을 버는 '군고구마 장수'는 1954년경부터 거리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경향신문 1954년 10월 5일자를 보면 '거리에는 군밤·군고구마 장수가 등장하여 겨울을 재촉하고 있으니 물가고에 시달리는 시민들의 월동준비가 더욱 암담하다'고 써 있다.

자, 이제 군고구마 장수의 털모자 얘기로 돌아오자. 한겨울 길가에서 여러 시간 추위를 견뎌야 하는 군고구마 장수에게 구제 시장이나 암시장에 나온 미군 동계 군복은 믿음직스런 방한 대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다. '어둠의 통로'를 통해 피시 테일(일명 '스키 파카')이나 야전상의가 나오기도 했지만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래도 털모자는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미군들은 친한 한국인에게 털모자를 주기도 하고 외출 나갔다가 싼값에 팔기도 했다. 이렇게 민간으로 나온 미군 털모자를 동네 어르신, 귀한 종손, 시장 상인, 노점 군고구마 장수 등이 썼다. 한국 육군이 털모자를 생산·보급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대부분 이를 구해 쓰고 다녔다.

군밤 모자를 쓴 엑소 찬열 /출처=theqoo@엑소 펜페이지
▲ 군밤 모자를 쓴 엑소 찬열 /출처=theqoo@엑소 펜페이지

3. 군밤, 군고구마 모자의 이미지를 한방에 바꾼 엑소

글을 쓰다가 옛날 소재가 등장하면 아는 형님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고, 또 가끔은 젊은 세대에게 ‘이거 혹시 알아?’ 하고 물어본다. 이번에도 20대의 연구소 동료에게 군밤, 군고구마 모자를 보여주며 “이거 본 적 있어요?” 하고 물어봤는데, 이게 웬일인가. 잘 안 단다. 그러면서 “이거 엑소 찬열이 쓰고 나왔던 모자잖아요”라고 한다.

알아보니 최근 그룹 엑소의 찬열과 민석이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이 모자를 썼다. 내용은 자세히 모르지만 자막에 ‘군밤 모자’로 표시되어 나가면서 ‘군밤 모자’, ‘엑소 찬열 모자’가 검색어 순위에 오르기도 했단다. 특히 찬열은 이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동안 털모자를 쓰고 스케줄을 소화했다.

1951년 한반도 전장의 혹한을 견디기 위해 보급한 미군 털모자가, 2013년 한국 엔터 전쟁에서 승리한 엑소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순간이었다.

[남보람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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