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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서 술 취해 인사불성 된 세종대왕, 정말 사실일까?

  • 배한철
  • 입력 : 2018.02.2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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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서 신하들과 취해 인사불성 된 세종대왕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36]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에서 독보적 성군에 꼽힌다. 그런 세종대왕이 밖으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해 한 달 이상 대궐을 비우기 일쑤였고 대궐 밖에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하는 날이 많았다는 게 사실일까.

북학파의 영수인 연암 박지원. 박지원은 기재잡기를 지은 박동량의 7대손이다./사진=실학박물관 소장
▲ 북학파의 영수인 연암 박지원. 박지원은 기재잡기를 지은 박동량의 7대손이다./사진=실학박물관 소장

선조에게서 "영창대군(선조의 14남)을 잘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유교(遺敎) 7신' 중 한 명인 박동량이 쓴 역사서 기재잡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내 일찍이 세종 때 주서(注書·승정원의 정7품 벼슬)의 사초(실록 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를 보니 상감께서 친히 양성(안성), 진위(평택), 용인, 여주, 이천, 광주 사이를 사냥 다녔는데 때로는 한 달이 지나서야 돌아오셨다가 이튿날 또 떠나곤 하였다. 길가의 시골 백성들이 더러는 푸른 참외를 드리기도 하고 더러는 보리밥을 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면 (상감께서는) 반드시 술과 음식으로 답례하였다." 기재잡기는 조선 초기부터 명종에 이르는 역대 일화를 기술했다. 정사에 빠진 채 구전되는 역사를 포함해 명인들의 전기, 시사 등도 다룬다.

세종대왕 일행은 흥에 취해서 자주 과음했다. "사초 앞에 여섯 사람의 대언(代言·승지)과 두 사람의 주서의 성을 써 놓으면서도 그 이름은 쓰지 않았다. 좌대언(左代言·좌승지) 밑에 진한 먹으로 '종일토록 취해 누워서 인사불성이니 우습도다'라는 글씨를 크게 써 놓았다." 박동량은 "푸른 참외와 보리밥이라면 (농번기인) 봄가을로 정상적으로 사냥할 때가 아니며 중요한 정무를 맡은 승지는 취해서 일을 폐하는 직책이 아니다"라며 비꼬았다. 그는 아무리 태평성대라지만 군신 간에 서로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할 것이라고 못마땅해했다.

이유태 화백이 그린 퇴계 이황의 상상화. 퇴계는 당파를 초월해 존경받았지만 적이 많았던 형 이해는 모진 고문끝에 죽었다./사진=한국은행 소장
▲ 이유태 화백이 그린 퇴계 이황의 상상화. 퇴계는 당파를 초월해 존경받았지만 적이 많았던 형 이해는 모진 고문끝에 죽었다./사진=한국은행 소장

퇴계 이황(1501∼1570)은 학문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었지만 인품도 뛰어나 당파를 가리지 않고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형인 이해(1496∼1550)는 많이 달랐다. 성격이 불같았고 공명심이 강했다. 미운 사람은 기필코 탄핵해 파직시켜야 직성이 풀렸다. 벼슬을 사양하는 동생(퇴계)이 늘 불만이었다.

"(이해가) 퇴계에게 글을 보내어 '언제나 한가하게 물러서 있기만 하면 일평생 배운 것을 언제 펴 보게 될 것이냐'고 책망하자 퇴계가 답서를 보내어 '고향으로 돌아와 분수지키십시오'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이해는 청홍도(충청도) 관찰사 시절 역모 고변자를 처형했다가 곤경에 처한다. 그와 대립했던 이홍남이 대간을 부추겨 "이해가 역모를 은폐하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고 탄핵했다. 이해는 의금부에 붙들려와 모진 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당하여 도중에서 죽었는데 때가 마침 한여름이어서 시체가 불어터졌다. 예로부터 화를 받는 참상이 이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퇴계 선생이 영원히 벼슬에서 떠나려는 뜻은 이때에 더욱 결연하여졌을 것이다."

5공 때 석사장교라는 제도가 일시적으로 생겼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들이 모두 석사장교로 복무해 두 전 대통령의 아들에게 특혜를 줄 목적이었다는 논란이 일었다. 왕조국가인 조선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명종이 잠저에 있을 때 신희복(1493~1565)에게서 글을 배웠다. 명종은 신희복을 스승의 예로 깍듯하게 모셨다. 신희복이 60세의 뒤늦은 나이에 과거에 응시하자 스승을 합격시키기 위해 점수를 대폭 낮춰 유례없이 많은 수의 과거 합격자가 나왔다. "무오년(1558년)의 별시에서 (신)희복이 전시에 응시하였다. 시관이 채점을 마치고 합격한 시권(답안지)을 올리는데 희복의 이름이 없었다. 특명을 내려 차중(次中·중간) 이상의 사람을 모두 넣어 급제를 주게 하니 희복이 비로소 방에 끼게 되었다."

이렇게 무리수를 두다 보니 시중에는 별의별 말이 다 돌았다. "그때 노(老), 미(微), 약(弱)과 공사천(公私賤)이 모두 합격하였다는 말이 있었으니 신희복은 나이가 60이 넘어 노요, 유조순(柳祖詢)은 문벌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미요, 윤근수(尹根壽)는 나이가 22세이니 약이며, 강문우(姜文佑)는 갓 양민이 된 사람이니 천인이었다." 가까스로 과거를 통과한 신희복은 대제학에 이어 경기도관찰사, 정2품 우참찬 등 조정 요직을 두루 거쳤다.



손순효(1427~1497)는 1453년(단종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성종 치세에 대사헌, 우찬성, 종1품 판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는 임금에 대한 충성이 여러 신하 중에서도 각별했다. 맛있는 것 하나라도 생기면 임금부터 생각했다. "손공은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쇠와 돌을 꿰뚫을 정도였다. 그가 경기관찰사가 되어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한 가지 채소나 한 개의 과실이나 한 가지 맛있는 것이라도 입에 맞는 것이 있게 되면 바로 가져다가 임금께 바쳤다."

성종도 그런 그를 무척 아꼈다. "어느 날 상감께서 느지막이 두 사람의 내시와 함께 경회루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남산 기슭에 두어 사람이 수풀 사이에 둘러앉아 있었다. (성종은) 그것이 손공임을 짐작하고 바로 사람을 시켜 가보라고 하였다. 과연 손공이 손님 2명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쟁반 위에 누런 오이 한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상감께서 바로 말 한 필에다가 술과 고기를 잔뜩 실어다 주게 하였다. 공과 손님들이 머리를 조아려 감격하고 배불리 먹고 취하게 마셨다." 손순효의 옛 집터가 명례방동(명동) 위쪽에 있었다고 박동량은 썼다. 흥미로운 일화이기는 하지만 과연 경회루에서 남산자락의 술 마시는 사람 모습이 보였을까.

세종대왕과 비 소헌왕후 합장릉인 여주 영릉(英陵) 전경. 세종대왕은 대궐밖에서 신하들과 술을 즐겨 마셨다.
▲ 세종대왕과 비 소헌왕후 합장릉인 여주 영릉(英陵) 전경. 세종대왕은 대궐밖에서 신하들과 술을 즐겨 마셨다.

음식문화만큼 변화무쌍한 것도 없지만 대표적인 한식인 비빔밥은 이미 조선 중기에 먹었다. 계유정란의 핵심 공신인 홍윤성(1425∼1475)은 세조의 신임을 배경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런 그의 집에 도둑이 들 뻔했다. 포도청조차 집 근처에 얼씬 거리지 못하는 점을 노렸다. 홍윤성 집 근처를 순찰하던 포도부장 전임(田霖)이 이들을 잡아 홍윤성에게 넘겼다. 홍윤성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공이 크게 기뻐하며 뜰에 내려와 그의 손을 붙잡아 끌어 올리면서 '이런 좋은 사람을 어찌 이제야 알게 되었는가. 자네 술은 얼마나 마시며 밥은 얼마나 먹는가'라고 물었다. 전임이 대답하기를 '오직 공께서 명하시는 대로 먹겠습니다' 하니 곧 밥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 세상에서 말하는 혼돈반(混沌飯)같이 만들고 술 세 병들이나 되는 한 잔을 대접하니 전임이 두어 숟갈에 그 밥을 다 먹어 치우고 단숨에 그 술을 들이켰다." 여기서 혼돈반이 바로 비빔밥이다. 채소와 생선을 밥에 섞어 먹는 것을 박동량이 살던 시대에 유행하던 혼돈반에 비교했던 것이다.

황해도 일대를 무대로 활약했던 도적 임꺽정(?~1562)도 상세히 소개된다. 박동량은 백부 박응천이 황해도 봉산군의 군수를 지내 임꺽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강포한 도적 임꺽정은 양주 백정으로서 성격이 교활한 데다가 날쌔고 용맹스러웠다. 그 도당 몇 명도 모두 지극히 날래고 민첩했는데 그들과 함께 일어나 적단이 되어 민가를 불사르고 마소를 닥치는 대로 약탈하되 만약 항거하는 사람이 있으면 살을 발라내고 사지를 찢어 죽여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임꺽정은 알려진 대로 신출귀몰했다. "경기와 황해도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그와 비밀리 결탁되어 관에서 잡으려고 하면 언젠가 내통되었다. 이 때문에 거리낌 없이 날뛰었으나 관에서 금할 수가 없었다."

홍명희의 소설에는 임꺽정의 모사 서림이 관군에 붙잡힌 임꺽정의 처를 구하려다가 체포돼 임꺽정을 토벌하는 데 참여하는 것으로 기술된다. 하지만 박동량은 서림이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잡힐 것으로 우려해 스스로 투항했다고 소개한다. "남치근(토포사)이 군마를 많이 모아 점점 산 밑으로 좁혀 들어가 한 놈의 도적도 감히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니 도적들의 주모자 서림이 결국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산에서 내려와 투항하여 도적들의 허한 데와 실한 데의 상황을 모두 말하여 주었다."

결국 관군에게 쫓기다가 빗발치는 화살을 맞고 쓰러진 임꺽정은 죽어가면서 "서림아, 서림아 끝내 투항할 수가 있느냐"고 원통해했다. 박동량은 말미에서 "도적들이 발동하게 된 3년 동안에 다섯 고을이 피폐해지고 관군이 패하여 분산되었으며 여러 도의 병력을 동원하여 겨우 한 명의 도적을 잡았다. 죽은 양민은 한이 없었으니 그 당시 군정의 해이됨이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평했다.

▶박동량(1569~1635)=반남 박씨. 1590년(선조 23)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로 호종했다. 1603년 아들(박미)이 선조의 5녀인 정안옹주와 혼인해 금양위에 봉해졌다. 형조판서와 종1품 의금부판사를 지냈다.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선조의 부탁을 받았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대북파가 영창대군·반대파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역모사건) 때 모반에 연루된 혐의로 심문을 받았으며 유릉저주사건(대북파가 영창대군 친모 인목대비의 궁녀들이 광해군의 양모인 의인왕후 능에서 저주를 퍼부었다고 조작한 사건)을 시인해 폐모의 구실을 줬다. 그 죄로 인조반정 후 유배형을 받았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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