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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장수했다면 조선의 운명도 바뀌었을까

  • 배한철
  • 입력 : 2018.04.0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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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39]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영남과 호남의 사림이 중앙정치 무대를 장악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서울·경기와 충청 일원의 기호지방에서 권력을 독식한다.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년·재위 1776∼1800년)는 인물이 고르게 쓰이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인묘조(인조) 이전에는 조정에서 호남과 영남의 인재를 모두 등용하였으니 호남의 기대승, 고경명, 김인후와 영남의 김종직 등 여러 현인은 논할 바도 없다. 영남과 호남의 인재를 등용하지 못한 것이 이미 100여 년의 고질병이 되었으니 어찌 인재가 옛날만 못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문인으로 반석평과 무인으로 유극량은 원래 천한 종의 신분이었다. 그런데도 한 사람에게는 감사(관찰사)의 직책을, 한 사람에게는 병사(병마절도사)의 직책을 맡기어 한 시대의 성대한 영걸이 되었다. 근세에 와서는 감감하게 그런 소문이 없으니 이것은 인재를 등용하는 길이 넓지 못하고 문벌에 국한되어서 그런 것이다."(1792년·정조 16년)

'일득록(日得錄)'은 규장각 학자들이 정조의 언행을 수록한 수상록이다. 1814년(순조 14년) 간행된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 실려 있다. 정조 자신의 학문관, 국가 운영의 문제점, 태조에서 당대까지의 인물평 등을 섭렵한다. 한 인간으로서, 학자로서, 정치가로서 정조의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정조의 모습은 이 책을 토대로 굳혀졌다.

인조반정 이후 우리 역사에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사대부들이 조세와 병역의무에서 면제된 것도 이때부터다. 1799년(정조 23년)에 왕은 "옛날에는 종1품 이하가 모두 군포(軍布)를 냈다. ~ 인조반정 후에 연평부원군 이귀 등 여러 훈신들의 말로 인해 혁파하였다. 지금 군역에 응하는 자는 어디에도 호소할 데 없는 소민(小民)들 뿐이니 양인 장정을 어떻게 충원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정조는 인과 덕으로 백성을 다스린다는 맹자의 왕도정치에 심취했던 인물이다. 그의 애민정신은 지극했다. 그의 침실 동쪽과 서쪽 벽에 재해를 입은 고을명과 수령의 이름을 3등급으로 나눠 나열해놓고 그위에 조세를 면하거나 구호품을 제공한 사실을 친히 기록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성이 굶주리면 곧 나도 배고프고 백성이 배불리 먹으면 나도 배부르다. 흉년의 재해를 구제하여 돌보는 것은 더욱이 빨리 서둘러야 할 일인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는 백성의 목숨이 달려 있는 바이니 잠시라도 중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1783년·정조7년)

지방 백성들은 군역의 의무를 지면서 서울에 올라와 근무하기도 했다. 향군(鄕軍)을 말한다. 추운 겨울에 제대로 된 옷도 걸치지 못하고 밖에서 고통스럽게 근무하는 모습이 정조는 무척 안쓰러웠다. "집과 고향을 멀리 떠나 옷도 없고 거친 베옷도 없으니 눈 오는 밤에 밤새워 지키는 노역과 한데서 문을 지키는 괴로움이 마치 내 눈 안에 있는 듯하다. 각영의 장수들은 나의 이러한 마음을 체득하여 삼군에 추위에 떠는 이가 있으면 마치 자신이 추운 듯이 여기도록 하라."(1793년·정조 17년) 임금은 그와 동시에 향군들에게 목화솜을 내주라고 지시했다.

1789년(정조 13년) 봄 왕이 파주 영릉(정조의 양아버지인 효장세자 무덤)을 찾아가다가 고양에서 냇물을 건너는데 부교가 끊겼다. 경기 관찰사가 이를 만든 자들을 찾아내 처벌하려고 했다. 왕은 "저들이 어찌 정성을 다하려 하지 않았겠는가. 비가 내리고 물살 또한 빠른데 군사와 말이 앞 다투어 건넜으니 부교가 밑으로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관찰사를 꾸짖으며 죄를 묻지 말라고 했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호학군주로 키우려고 했다. 사도세자는 그런 아버지의 바람을 거역하다가 끝내 죽임을 당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던 세손 정조는 공부에만 전념했다. 왕위에 올라서도 책을 늘 곁에 뒀다. 빼어난 학문을 앞세워 신하들을 심하게 다그치기도 했다. "나는 젊어서부터 독서를 좋아해서 바쁘고 소란스러운 와중에서도 하루도 정해 놓은 분량을 읽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읽은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을 대략만 계산해 보아도 그 수가 매우 많다."(1790년·정조14년)
정조시대에 종2품 어영대장, 총융사 등을 지낸 이창운 초상화. 정조는 스스로 성리학자를 자부해 학문이 못 미치는 무인을 낮게 평가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정조시대에 종2품 어영대장, 총융사 등을 지낸 이창운 초상화. 정조는 스스로 성리학자를 자부해 학문이 못 미치는 무인을 낮게 평가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조는 사상적으로는 완고한 보수였다. 성리학을 맹신했다. 나라를 지탱시킨 것은 군대가 아니라 성리학이라고 인식했다.

"우리 왕조가 나라를 세운 규모는 송나라와 비슷하며 오로지 유술을 숭상하였다. 신라나 고려에 비교하였을 때 병력의 강하고 약함이나 재물의 넉넉하고 부족함을 함께 놓고 논할 수 없다. 밖으로는 변경의 근심이 없었고 안으로는 고집이 세어 굽히지 않는 무리가 끊어져 400년의 예악과 문물이 중국의 성대함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은 유술로 인한 것이다. 명분이니 의리니 기세니 절개니 하는 것이 빈말 같다고 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라를) 유지하고 지탱시킨 데에는 병력이나 재용으로 미칠 수 없다. 근래에 보면 조정 신하들은 매번 외적을 막는 것이 소홀하고 나라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는 것을 갖고 근심한다. 내가 실로 우려하는 바는 올바른 학문이 미미해져 선비의 발전이 날로 낮아지는 데 있다."(1789년·정조13년)

문학도 경계했다. "오직 문장에만 주력하고 경술에 근본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이단이다. 사대부가 경서에 통달하지 못한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면 다른 것은 논할 가치도 없다."(1794년·정조 18년) "문장이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은 음란한 음악이나 아름다운 여색보다 더 심하다. ~ 내가 젊었을 적에 문학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매우 후회스럽다."(1791년·정조 15년)

무신은 좋은 점수를 받을 리 없다. "근래 무신이 세력을 믿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너무 심하니 이 또한 기강에 관계되는 바이다. 조정에서야 한결같이 본다는 의미로 가차(假借)를 내리기도 하지만 문을 귀히 여기고 무를 천히 여기는 것은 곧 우리 왕조의 가법이다. 조정에서는 이를 몰라서는 안 된다." (1786년·정조10)

정조는 일벌레이기도 했다. "나는 한밤중이 되기 전에는 일찍이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고 날이 밝기 전에 반드시 옷을 준비시켜 입는다. 위로 보고된 서울과 지방의 문서와 서찰을 일찍이 하루도 책상에 적체시켜 놓은 적이 없었고 매일같이 조정 신하를 접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1797년·정조 21년)

인물로는 유교적 이상정치를 구현하려고 했던 조광조와 대유학자이자 경세가였던 이율곡을 가장 높게 쳤다. "이충무공(이순신)이 등자룡과 함께 시마즈 요시히로(노량해전의 왜장)를 협공할 때 창해가 치솟아 오르고 풍운이 아연실색하였으니 수전의 장대함이 이보다 큰 적이 없었다. 일찍이 그에 대한 기록을 보았는데 초라하여 보잘것없었다. 내가 그의 비문을 지어 그의 공로를 기술하여 드러내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인물 중에 문무를 겸비한 사람을 꼽는다면 충무공 한 사람만이 해당된다 . ~ 우리나라의 유현 중 재능을 두루 가진 사람은 조광조과 이이 뿐이다. 김인후와 조헌 같은 이는 절의가 도학보다 높았던 사람들이고 서경덕은 소강절(송나라 유학자)과 비교하여도 불가하지 않을 사람이다."(1792년·정조 16년)

그는 조선의 낙후성에 낙담했다. 조선은 벽돌조차 제조하지 못했다. "중국의 축성에는 대부분 벽돌을 쓰나 우리나라는 전적으로 돌만 쓴다. 우리나라 습속은 벽돌 굽는 것에 대해 잘 몰라 벽돌을 굽고자 하면 그 비용이 돌을 캐오는 것에 비해 갑절이나 들어 감히 벽돌을 써서 축성할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죽은 상신 이항복도 이에 대해 일찍이 깊이 개탄하였다."(1793년·정조 17년)

정선작 경교명승첩 중 송파나루. 당시엔 한강의 수심이 낮아 배가 들어왔다가 갇히기 일쑤였다. 간송미술관 소장
▲ 정선작 경교명승첩 중 송파나루. 당시엔 한강의 수심이 낮아 배가 들어왔다가 갇히기 일쑤였다. 간송미술관 소장
한강은 준설이 안 돼 배가 갇히기 일쑤였다. "경강(한강)이 예전에 비해 점차 얕아지고 있다. 조운선이 얕은 여울을 만나면 반드시 밀물을 기다렸다가 올라가니 만약 한번 쳐낸다면 어찌 백세토록 이익이 되지 않겠는가. 포구를 파냈던 김안로 같은 큰 역량을 지닌 사람이 없으니 한스러워할 만하다."(1792년·정조 16년)

식목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벌목이 매일같이 행해져도 재배하는 사람에 대해서 들을 수가 없어 점차 처음만 못해지고 있다. 살림을 꾸려 나가는 개인 가정에서도 10년 계획으로는 나무를 심는 것만 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더구나 나라의 만년을 내다보는 계획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1793년·정조17년)

수원화성. 왜적의 침입시 대로에서 맞아 싸우기 위해 수원화성을 축성했다. 사진 문화재청
▲ 수원화성. 왜적의 침입시 대로에서 맞아 싸우기 위해 수원화성을 축성했다. 사진 문화재청
정조는 왜적을 방어하려면 그들이 쳐들어오는 길목에 성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결과물이 바로 수원화성이다. "우리나라는 산성이 많다. 산성은 들어가 지키기에는 유리하지만 적의 진로를 차단하여 끊는 데는 불리하다. 지금 화성은 삼남 대로의 요충에 자리 잡고 있으니 이 성이 끓는 못에 둘러싸인 무쇠 성의 견고함을 지니게만 된다면 실로 나라 안에서 첫째가는 요새가 될 것이다."(1793년·정조17년)

우리는 흔히 정조를 개혁군주로 지칭하며 그가 좀 더 오래 통치했다면 조선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정조가 백성을 아끼고 사회제도를 바꿔보려는 의지가 강렬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만으로는 깊어질 대로 깊어진 조선의 병폐를 근원적으로 치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당시 조선사회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고 현실 속에서 그러한 싹들이 움트고 있었지만 정조는 이를 장려하기는커녕 오히려 성리학 근본주의에 집착하면서 사상 발전을 저해하기까지 했다. 정조가 장수해서 할아버지 영조처럼 오래 통치를 했다면 조선의 운명도 바뀌었을까.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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