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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분가치 이상의 의결권 행사 가능한 집중투표제, 왜 기업 경영권 화살로 돌아오나

  • 문일호
  • 입력 : 2018.05.0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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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매경DB
▲ /사진=매경DB


[돈이 보이는 기업지배구조-173] -입맛대로 이사 선임해 단기 경영 이익 추구로 기업 흔들어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지난 3월 의결권 행사지침에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주주 지분율이 상대적으로 낮고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업종 대표 기업들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의 섣부른 결정이 최근 현대자동차 등 국내 기업들을 흔들어 투자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투기자본 '엘리엇'에 좋은 미끼를 던져줬기 때문이다.

집중투표제는 주주총회에서 이사진을 선임할 때 1주당 1표씩 의결권을 주는 방식과 달리 선임 이사 수만큼 투표권을 갖고 특정인에게 몰표를 주는 제도다. 지분가치 이상의 의결권 행사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 제도는 엘리엇과 같은 투기자본이 항상 기업들을 상대로 내거는 조건 중 하나다. 이들 외국계 자본은 다양한 이름으로 해당 기업 주주 명부에 올라 있지만, 투자 수익 극대화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뭉친다. 긴밀한 사전 협의를 통해 주주총회에서 힘을 합쳐 입맛에 맞는 이사를 선임해 기업 경영에 영향을 미친다. 중장기 투자 목적으로 주식을 갖고 있는 일부 주주와 달리 이들은 단기 이득을 추구하기 때문에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식 전략을 취한다. 가령 해당 회사가 중장기 투자를 위해 공장을 짓기 위해 투자금을 모으려 해도 당장 "배당을 늘려라"며 압박을 가한다. 일부 소액 주주가 단기 배당 증가라는 '달콤한 과일'에 취해 외국계 자본의 편을 들었다가 중장기적으로 주가가 하락해 큰 손해를 보는 경우가 속출하곤 한다.

증권업계에선 엘리엇이 현대·기아차와 현대모비스에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라고 압박하고 배당을 늘리라고 하는 요구 조건을 내건 것도 이런 목적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엘리엇 등 외국인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은 48.34%에 달한다. 오너 등 특수관계인(30.17%)을 압도한다. 현대차의 경우에도 외국인(46.44%)이 오너 등 우호 지분(28.24%)에 크게 앞서 있다. 이런 외국계 투기자본의 공격을 받는 기업 입장에선 경영권이 크게 흔들리고, 중장기 사업 계획을 짜기 어려워져 기업 가치가 크게 훼손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대기업들이 이 같은 위험에 취약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폐해 때문에 미국은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고 있는 지역이 크게 축소됐고 일본의 경우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포기한 상태다. 이재혁 상장사협의회 팀장은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되면 지분율이 작은 외국계 주주들이 한두 곳 연합해 주요 기업의 경영권을 크게 위협할 수 있는데 엘리엇이 현대차를 향해 이를 요구한 것도 바로 이런 목적 때문"이라며 "이들 헤지펀드의 목표는 경영권을 위협해 단기수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들이 집중투표를 통해 이사들을 손쉽게 선임하면 상장사들은 이들의 단기 목표 추구에 따라 장기 투자를 할 수 없게 되고, 이들이 빠져 나가면 기업가치가 훼손돼 나머지 소액 주주들 역시 피해를 보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기업들은 집중투표제 도입을 외면하고 있다.

10대 그룹 계열 상장사 중에선 포스코와 SK텔레콤, 한화생명 등 3곳만이 집중투표제를 도입하고 있다.

그 외에 한국전력, 한국가스공사, KT, 신한금융지주, 우리은행, KB금융지주, 대우조선해양, KT&G, BNK금융지주, 지역난방공사, 강원랜드 등 대부분 금융사나 공기업 이력의 기업들이다.

주요 주주로 국민연금이나 산업은행이 자리하고 있어 사실상 정부 입김이 센 기업이 대부분이다.

현재 상법상 집중투표제 도입은 상장회사의 의무가 아닌 선택 사항이다. 정관을 통해 집중투표제를 배제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집중투표제 도입 의무화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집중투표제 찬성 근거를 만든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부가 나서서 투기자본의 놀이터가 되도록 길을 터준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공단 관할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은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 지침대로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해명했다.

[문일호 증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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