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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수도 평양 옆 신도시 '장안성', 이곳으로 천도한 이유는?

  • 임기환
  • 입력 : 2018.07.1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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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49] 586년, 고구려 평원왕이 즉위한 지 28년째이다. 고구려 수도 평양성에 큰 소란이 일었다. 새로 거대한 성곽을 쌓고 시가지를 조성한 신도시로 왕실 사람과 귀족들부터 대규모 이주를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도성의 이름은 장안성(長安城)이었다. 장안성은 기존 왕궁성인 안학궁성과 그 남쪽 시가지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처럼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평양성이라고도 부르고, 기존 시가지와 구분하기 위해 장안성이라고도 부른다.

이주는 시작했지만 아직 장안성은 완공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백성들이 거주할 외성은 일부만 쌓은 상태이고, 북성은 아직 축성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원왕은 일단 장안성으로 옮기고 점차 나머지 성곽을 완공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장안성 축성은 552년 즉 전왕인 양원왕 8년에 시작하였다고 했으니, 평원왕이 이도(移都)할 때까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완성을 보지 못했을 정도로 대규모 사업이었다.

'평양성 석각'으로 알려진 명문 성벽돌을 보면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장안성(평양성) 성벽에서는 성벽 축조 시기, 성벽 축조 책임자와 축조 거리 등을 새긴 성벽돌이 모두 5개가 발견되었다. 2개는 사라지고 현재는 3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들 명문 성벽돌은 요새식으로 말하자면 공사실명제를 보여주는 자료다. 이들 성벽돌에 의해 좀 더 구체적으로 장안성을 언제 어디서부터 축성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인 설명은 나중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니 그때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축성 시기만 살펴보자면 내성과 북성은 566년(평원왕 8년)에 축성이 시작되었고, 외성과 중성은 589년(평원왕 31년)에 쌓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 영조 때 활동했던 윤유(尹游)가 지은 '평양속지(平壤續志)' 권1 성지(城池)조에는 1714년(숙종 40년)에 평양 북성을 복구하면서 옛 성터에서 "본 성은 42년 만에 성역을 마쳤다(本城四十二年畢役)"라는 글자가 새겨진 성돌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도 고구려 평양성 명문 성벽돌의 하나라고 짐작되는데, 아마 전체 문장은 아니고 그 일부를 옮겨 놓은 것일 것이다. 이 기록이 맞는다면 장안성을 축조하는 데 4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셈이고 최종 완공은 593년 무렵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552년에 장안성을 축성했다는 기사는 아마도 축성 계획을 마련하고 성곽 자리의 조사나 설계 등 기초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리라. 이렇게 명문 성벽돌에 의하면 장안성 축성은 양원왕대에 시작하였으나 축성 자체는 대부분 평원왕 당대의 업적이고, 영양왕이 최종 마무리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장기간 축조 기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장안성은 외곽 둘레만 17.4㎞, 전체 성벽 길이는 23㎞, 성 안의 총면적이 12㎢에 이르며, 북성·내성·중성·외성 등 4개의 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거대한 축조물이었다. 게다가 평지와 산의 자연 지형을 잘 연결해 쌓아 평지성과 산성의 장점을 잘 결합한 평산성(平山城)이다. 북쪽은 금수산의 최고봉인 최승대와 청류벽의 험준한 절벽을 끼고 있고, 동·서·남쪽은 대동강과 보통강이 장안성을 감싸면서 자연 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장안성을 남쪽 대동강 쪽에서 바라보면 뒤에 산을 끼고 있는 평지성이고, 북쪽이나 서북쪽에서 바라보면 모란봉과 만수대, 창광산, 안산 등을 연결한 산성의 형세이다.

장안성 평면도 : 장안성은 북성·내성·중성·외성으로 구성된 복합식 성곽이며, 대동강과 보통강을 자연 해자로 이용하는 평산성이다.
▲ 장안성 평면도 : 장안성은 북성·내성·중성·외성으로 구성된 복합식 성곽이며, 대동강과 보통강을 자연 해자로 이용하는 평산성이다.

그러면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왜 이렇게 거대한 장안성을 쌓을 생각을 했을까? 더구나 장수왕 때 천도한 이후에 150여 년 가까이 수도답게 꾸며온 시가지가 있는데, 멀리 옮기는 것도 아니고 바로 옆에 왜 새로운 도성을 만들려고 했을까? 궁금한 점은 많지만 그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장안성 축성을 기획하던 당시의 분위기나 장안성 모습을 통해 그 배경을 짐작해볼 수밖에 없겠다.

먼저 거대한 성곽의 규모는 수도 방어를 위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당시 국제 정세는 그리 고구려에 유리하지 않았다. 551년에는 동맹군을 결성한 백제와 신라의 공격으로 오랫동안 지켜오던 한강 유역을 내주고 말았다. 같은 해 9월에는 서쪽에서 돌궐이 백암성(白巖城) 등을 공격해왔다. 장안성 축성을 시작하기 1년 전 일이다.

북중국의 정세도 혼란스러웠다. 550년에 동위를 대신해 문선제가 북제(北齊)를 세우고 동쪽으로 552년 고막해(庫莫奚), 553년 거란을 정벌하였다. 자연스레 고구려 서방 국경선의 긴장감이 높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대외적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도성 방어책의 하나로서 새로운 성곽 축조를 기획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장안성의 구조가 독특했다. 평지성과 산성을 결합한 구조는 물론 4구역으로 나누어 성의 공간 구조에 따라 기능을 달리했다. 내성은 왕궁성, 중성은 관청과 귀족 거주지, 외성은 일반 주민 거주지, 북성은 내성의 방어성이나 후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외성이다. 외성은 수도 전체를 둘러싸는 이른바 나성(羅城)에 해당된다. 왕과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도성민도 성곽 안으로 포괄함으로써 민심을 수렴하고 그만큼 방어력을 높이는 결과를 갖게 된다. 민심(民心)만큼 강력한 무기가 없다는 정치 이념의 실천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장안성은 복합식 구조의 평산성이라는 점에서 고구려 도성 성곽 발전의 가장 완성된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장안성 축성이 한바탕 피비린내나는 왕위계승전을 치루고 왕위에 오른 양원왕대에 시작되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이런 귀족들 간 내부 정쟁이 이웃나라에 알려지면서 결국 한강유역의 상실로 이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대규모 축성 사업이 이때 시작되었다는 점은 무언가 의미심장하다. 대체로 정쟁이 거듭되고 지배층이 분열되면 이런 국가적 사업은 추진이 불가능할 터인데, 장안성 축성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정쟁을 종식시키고 대외적 위기에 대응해 가는 결속력을 확보해갔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평원왕 이후에 보이는 안정된 정국 운영과 장안성의 축조 과정이 서로 맞물려 있으리라 짐작된다.

어쨌든 40년 가까운 시일에 걸쳐 장안성 축성 프로젝트는 완료되었다. 그리고 불과 20여 년 뒤에 장안성은 그 위용을 국제적으로 드러내게 되었다. 612년 수양제의 침공 시 30여만 수나라 별동대는 평양을 직접 공격하러 왔다가 난공불락의 장안성을 보고 감히 공성할 엄두도 못 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장안성은 그 뒤 당과의 전쟁에서도 그 위세를 보였다. 661년 8월~662년 2월에 걸친 당군의 평양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668년 당군의 대규모 공세 속에서도 내부의 투항이 없었으면 그리 쉽게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장안성은 단순히 성곽을 축조하는 토목공사가 아니었다. 국제 정세를 읽어내고 거기에 대응하는 방어 정책이며, 국내 정계 분위기를 재편하고 국가적 공동 목표에 수렴해가는 정치적 프로젝트였고, 민심을 수렴하고 공동체 의식을 키우는 대민정책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단기간에 후딱 해치운 것이 아니라 앞날을 내다보고 장기간에 걸쳐 차근차근 단단하게 만들어간 성과물이었다는 점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어느 시대나 국가적인 대규모 토목공사는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것이 역사적인 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미래에 대한 전망이 담겨 있어야 한다. 실제 우리에게 전하는 역사적인 유산들은 다 그러했다. 오늘 우리들은 과연 역사적인 유산이 될 만한 것들을 만들고 있을까? 장안성 축성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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