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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 실험 '중동의 아마조네스' 로자바 여군 아시나요

  • 안정훈
  • 입력 : 2018.03.0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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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 자치기구
-'여성해방'에 기초한 국가 실험
-IS 격퇴전에서 명성 떨친 로자바 여군
-한 전투에서 최대 80%가 여성이기도


[한꺼풀 벗긴 글로벌 이슈-106] 자신이 겪은 성범죄 경험을 고백하는 미투(#Metoo) 운동이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는 가운데 '여권 불모지'인 중동에서 혁명적인 양성평등 사회 실험에 나선 자치지역이 있다. 시리아·이라크 북부에 걸쳐 영토를 확보하고 있는 쿠르드족 자치기구 로자바(Rojava) 이야기다.

'해가 지는 땅'이란 의미를 가진 로자바는 2014년 10월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을 불렀다.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 점령 도시 코바니에서 벌어진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와의 공방전에서 로자바 측 전투 대원의 무려 80%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살해당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믿는 젊은 IS 남성 대원에게 용맹한 로자바 여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무장한 로자바 여군들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 무장한 로자바 여군들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2014년까지만 해도 코바니 등 시리아 북부 일부 지역의 협소한 영토에 머물러 있던 로자바는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현재 시리아 북부 대부분의 지역과 이라크 북부 일대, 터키 일부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며 무시 못할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는 로자바가 현재 점유한 영토 상당 부분을 과거에 통치했던 IS나 대다수 중동 국가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여권 인식을 보여주는 것과 극명히 대조된다. 그야말로 '중동의 아마조네스(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전사로만 이뤄진 부족)'인 셈이다.

연보라색으로 표시된 로자바의 영토./출처=IHS 컨플릭트 모니터
▲ 연보라색으로 표시된 로자바의 영토./출처=IHS 컨플릭트 모니터

로자바의 정식 명칭은 '북시리아 민주연방체제'로, 2014년에 창설됐으나 아직 어떤 나라로부터도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집권당은 쿠르드 좌파민주연합당(PYD)으로 쿠르드족 민병대(YPG)를 산하에 거느리고 있다. YPG는 시리아 내 대IS전쟁에서 미군의 가장 강력한 동맹으로 IS 격퇴에 핵심 공로를 세운 바 있다.

이 YPG 내에 2013년 2월 처음으로 조직된 여성 무장조직인 쿠르드 여성방위부대(YPJ)가 존재한다. 현지 여성들을 성노예화시키며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온 IS를 몰아낸 게 YPJ 소속 여성 전사들이라는 점은 세계 언론의 호기심을 불렀다.

특히 2016년 8월 IS가 점령하고 있던 시리아 북부 도시 만비즈를 해방시킨 YPJ 여군들이 니캅(눈 부위를 제외한 전신을 천으로 덮은 이슬람 전통 복장)을 두른 점령 지역 여성들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장면은 큰 화제가 됐다. 일부 점령지 여성은 니캅을 벗어 땅에 내팽개친 뒤 발로 밟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로자바의 여성 전사들은 '여성 해방'의 상징이 됐다.

IS가 점령했던 시리아 북부도시 만비즈를 해방시킨 YPJ 여군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 IS가 점령했던 시리아 북부도시 만비즈를 해방시킨 YPJ 여군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이들의 활약이 전 세계적 이슈가 되자 로자바 측에서도 다큐멘터리 등을 제작하며 적극적으로 YPJ 홍보에 나서고 있다. 다큐멘터리에는 YPJ 대원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는 희생당한 친구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들의 저항을 이어가기 위해, 여성에 대한 부조리에 맞서 싸우기 위해 YPJ에 가입했다"며 "국가를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고 맹세를 하는 장면 등이 나온다.

로자바 측에서 직접 제작한 YPJ 홍보영상/사진=유튜브 캡처
▲ 로자바 측에서 직접 제작한 YPJ 홍보영상/사진=유튜브 캡처

아지마 데니즈 YPJ 사령관은 "여성을 군사적 차원에서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어떻게 군인으로 키워내 IS에 맞서싸우게 할 것인가가 우리의 질문이었다"며 "사람들은 여군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여성이 IS와의 전쟁에서 수행한 역할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말했다. 데니즈 사령관은 "우리는 단지 IS하고만 맞서 싸우는 게 아니다"며 "사회가 여성들에게 강제한 여러 조건들에 대해 대항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로자바는 헌법에서 "여성은 정치·사회·경제·문화 생활에 남성과 똑같이 참여할 불가침의 권리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 헌법은 입법의회 의원의 최소 40% 이상을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40% 원칙'은 사법부뿐만 아니라 모든 정부·공공기관·단체·위원회에 동일하게 적용한다. 심지어 군인이나 경찰이 되기 위해서는 군사 훈련을 받기 전에 반드시 페미니스트(양성평등운동)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수준의 양성평등 규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로자바의 높은 양성평등 인식은 놀랍게도 미국의 사회적 생태주의자인 고 머리 북친(1921~2006)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북친은 생태 위기가 사회의 위계 구조에서 비롯됐으며 따라서 인종차별·성차별 등의 서열 체계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상가다. 로자바의 정신적 지도자로 꼽히는 압둘라 오잘란이 쿠르드족 독립운동을 벌이다 1999년 터키 교도소에 수감된 뒤 북친의 서적을 우연히 접한 게 계기가 됐다.

미국의 사회적 생태주의 사상가 머레이 북친/사진=위키피디아
▲ 미국의 사회적 생태주의 사상가 머레이 북친/사진=위키피디아

북친의 사상에 크게 감명받은 오잘란은 "인간 해방을 위해서는 급진적인 여성혁명을 통하여 남성과 인간의 정신세계와 삶을 변화시켜야만 한다"며 여성 해방에 기초한 국가연합을 로자바의 기초로 삼았다.

진정한 양성평등이 이뤄지려면 아직 멀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로자바 여성들은 단순히 전투에만 참여할 뿐, 육아 등 여성의 의무로 여겨진 일에서는 해방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좌파 사상가 장 바로는 "단순히 여군이 많다고 해서 남성 지배가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며 "여성의 전통적 의무로부터 로자바 여성이 해방됐다고 판단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안정훈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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