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닮아가는 영화, 영화를 욕망하는 게임

  • 홍성윤
  • 입력 : 2017.01.07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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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을 닮아가는 영화, 영화를 욕망하는 게임(상)

영화
▲ 영화 '하드코어 헨리'의 한 장면. 시종일관 1인칭 화면으로 진행된다.
[쉽게 읽는 서브컬처-40] 영화 '하드코어 헨리'를 뒤늦게 봤다. 2015년에 개봉한 이 작품은 영화적 완성도보다 특별한 제작 과정으로 유명해졌다. 러닝타임 전체를 1인칭 시점으로 촬영했기 때문. 영화는 시종일관 주인공 '헨리'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제목처럼 하드코어 액션으로 가득 찬 이 영화는 1인칭 시점이 주는 몰입만큼이나 (상당수의 관객에게) 감당하기 힘든 멀미 증세를 유발했고, 단순하고 직선적인 스토리와 함께 호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영화로서의 완성도를 떠나, 이 작품은 영화 속으로 편입되기 시작한 게임의 감각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시점은 물론이고 영화의 내러티브 역시 게임의 그것과 유사하다.

 우선 FPS(First Person Shooter·1인칭 슈팅 게임) 장르를 연상시키는 시점을 통해 관객은 관찰자가 아닌 주인공으로서 작동한다. 기억을 잃어버린 채 눈을 뜨는 주인공은 관객과 동일한 수준의 정보량을 갖고 극에 참여한다. 자신을 '헨리'라고 부르며 기계화된 신체의 기능을 설명해주는 여주인공의 존재 역시 게임의 튜토리얼(조작법 등 게임 플레이를 위한 선행 정보)을 연상시킨다.

(왼쪽) 영화
▲ (왼쪽) 영화 '하드코어 헨리'의 초반 장면. 여주인공이 잠에서 깨어난 주인공에게 상황을 설명해주고 각종 테스트를 시행한다. (오른쪽) 게임 '헤일로 4'의 초반 장면. 여주인공 격인 인공지능 코타나가 냉동 수면 중이던 주인공을 깨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헨리는 말을 못한다. 발성(發聲)을 위한 마지막 조정이 끝나기도 전에 악당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인데, 이 역시 과묵했던 역대 게임 캐릭터의 클리셰다. 초장부터 등장해 존재감을 과시하고는 여주인공을 납치해가는 최종 보스는 '행동하는 상사의 귀감이자 납치의 프로페셔널'인 슈퍼마리오의 쿠파 대마왕의 패턴을 닮았다. 이 밖에도 '어디로 가서 적을 처치하고 아이템을 가져와라'는 퀘스트 수행, 게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불사의 존재가 된 NPC(Non-Playable Character), 위기에 몰린 주인공이 스팀팩(!?)을 맞고 버프 효과로 전세를 뒤엎는 장면 역시 게임의 감각을 고스란히 이식한 결과물이다.

 게임이 '하는 즐거움'이라면 영화는 '보는 즐거움'이다. 아타리의 '퐁'(1972)에서 본격적으로 걸음마를 뗀 비디오게임은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화면 속 오브젝트를 조작해 플레이하는 과정에서 즐거움과 성취감을 얻는 게임과 배우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을 바탕으로 스토리텔링에 몰입하는 영화는 분명 다른 영역에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게임이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주요 문법으로 자리 잡고, 게임의 문법에 익숙한 세대들이 콘텐츠 생산자로 성장하면서 게임과 영화는 서로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영화 '헨리' 역시 두 영역이 교차돼 가는 과정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그럼 게임을 닮은 영화에는 어떤 작품들이 있을까. '워크래프트 : 전쟁의 서막'(2016)이나 '어쌔신 크리드'(2016)처럼 비디오 게임을 소재로 한 (망한) 영화보다는 게임의 감각을 이식한 작품을 위주로 살펴보자.

왼쪽부터 트론,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 써커펀치, 엣지 오브 투모로우 포스터.
▲ 왼쪽부터 트론,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 써커펀치, 엣지 오브 투모로우 포스터.
우선 1982년작 '트론'을 빼놓을 수 없다. 배우와 CG 배경을 처음 합성한 것으로 유명한 SF 영화로, 컴퓨터 속 가상현실에 빨려 들어간 주인공이 모험을 펼치는 내용이다. 인격화된 프로그램들이 목숨을 걸고(=캐삭빵) 하이퍼볼과 라이트사이클 등 비디오 게임으로 결투한다.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2010)는 만화 원작을 영상으로 만들어낸 작품으로 백수이자 록 밴드 멤버인 스콧 필그림이 이상형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일곱 명의 사악한 전 남친들과 결투를 벌이는 내용을 담았다. 자못 황당한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건 게임(?)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연출과 영상이다. 만화 '드래곤볼'처럼 공중을 날면서 치고 박는 인물들 옆으로 콤보(연속 공격) 표시가 뜨고, 전 남친을 물리치면 아이템을 얻을 수 있으며, 게이머라면 익숙할 '1UP' 아이템이 등장하기도 한다.

 잭 스나이더의 '써커펀치'(2011)는 비주얼과 액션은 화려하지만 비평과 흥행 양쪽에서 참패한 졸작이다. 한 해외 언론은 유례가 없는 별점 0점을 주기도 했다. 제작비 8200만달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국 내 수익(3390만달러)을 올려 잭 스나이더의 흥행 기록에 먹칠을 했다. 정신병동에 갇힌 소녀들이 탈출에 필요한 5가지 아이템을 찾아 상상 속에서 나치, 용, 사무라이 로봇 등 다양한 적들과 싸우는 내용으로 온갖 서브컬처 요소를 집대성했다는 평가다. 특히 소녀들이 각 아이템을 얻기 위해 싸우는 무대는 액션 게임의 '스테이지'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돈과 시간을 써가며 굳이 볼 필요는 없는 영화다.

 '해롤드와 쿠마'(2004)는 대마초를 즐겨 피우는 한국계 미국인 해롤드와 인도계 미국인 쿠마의 좌충우돌 소동을 그린 코미디 영화 시리즈다. 1편은 햄버거 광고를 보고 오직 햄버거 하나를 먹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으로, 사실 게임적인 요소는 전무하다. 하지만 하찮은 목표 달성을 위해 생고생을 하는 모습에서 도전과제 달성을 위해 밤새 달리는 게이머가 연상돼 선정했다.

 톰 크루즈 주연의 '엣지 오브 투모로우'(2014)는 일본의 라이트 노벨 'All You Need Is Kill'을 원작으로 하는 SF 영화로, 특정 시간대를 수없이 반복하는 루프물(time loop)이다. 주인공인 빌 케이지 소령은 외계인과의 전투에서 숨지지만, 전투 전 시간대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이후의 상황은 끝없이 죽고 다시 살아나고 전투하는 과정의 반복. 세이브(저장)와 로드(불러오기)라는 게임적인 구성을 꼭 닮아 있다. 반복되는 플레이로 어리바리 신병에서 베테랑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한때 반복 플레이는 전투에만 유용한 게 아니다. 반복되는 하루를 알차게 활용해 자기계발도 하고 사랑도 쟁취하는 로맨틱 코미디 '사랑의 블랙홀'(1993)은 루프물의 수작으로 꼽히니 챙겨 보길 바란다.

 지금까지 게임을 닮아가는 영화들을 살펴봤다. 다음에는 영화를 욕망하는 게임에 대해 살펴보자.

[홍성윤 프리미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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