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이 사랑한 샴페인 '폴 로제'

  • 나보영
  • 입력 : 2017.01.2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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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로저 샴페인 하우스
▲ 폴 로저 샴페인 하우스
[세계의 와인기행-21] 와이너리를 찾아 여행을 다니다 보면 때로는 명사들이 사랑한 와인을 만나게 된다. 프랑스 샹파뉴에는 영국의 전 총리 윈스턴 처칠이 사랑한 샴페인 폴 로제(Pol Roger)가 있다. 처칠은 이곳의 샴페인을 매일 한두 병씩 마실 정도로 좋아했다. 자신의 경주마 이름을 '폴 로제'로 지어 이 가문과의 우애를 드러내기도 했다. 1965년 처칠이 91세로 세상을 떠나자 폴 로제에서는 샴페인 병에 검은색 띠를 둘러 조의를 표했다. 10년 후 서거 10주년이 되던 해에는 그의 이름을 딴 최상급 샴페인을 세상에 내놓았다.

 파리에서 이런 일화들을 떠올리며 기차에 오른 지 한 시간 만에 샹파뉴의 대표적인 도시인 에페르네(Epernay)에 도착했다. 역에서 나와 중심부로 들어서자 유수의 샴페인 하우스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끝에서 폴 로제의 높은 대문과 화려한 문패가 눈부시게 빛난다. 1849년 설립된 폴 로제는 많은 샴페인 하우스들이 기업에 인수되는 현실 속에서도 외부 자본의 간섭 없이 가문 경영을 지키는 곳 중 하나다. 2004년부터는 영국 왕실의 공식 샴페인으로 지정돼 폴 로제의 모든 샴페인에 왕실 인증(Royal Warrant) 마크가 붙어 있다.

폴 로저의 포도밭
▲ 폴 로저의 포도밭
 반갑게 마중 나온 홍보 담당자는 유창하게 폴 로제의 역사를 풀어 놓았다. 창립자 폴 로제는 어머니의 가문이 소유하던 샴페인 하우스를 물려받았다는 것. 1899년 폴 로제 사후에 가족들은 명성이 높아진 그의 이름 '폴'과 성 '로제'를 붙여 '폴 로제'를 성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것. 1908년 처칠이 폴 로제 샴페인을 마시고 마니아가 되면서 이곳 샴페인이 더욱 유명해졌다는 것. 마지막으로 가문의 5대 손인 현(現) 오너 위베르 드 빌리(Hubert de Billy)는 자주 한국을 방문한다는 것까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먼저 양조시설을 둘러본 후 샴페인들이 숙성되고 있는 카브(cave·지하 저장고)로 향했다. 내부는 거의 동굴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크기다. 33m 깊이로 까마득한 계단을 내려가려니 절로 긴장된다. 오래된 와인병의 모습을 보느라 걸음이 느려질 때마다 홍보 담당자는 길을 잃으면 큰일이라고 강조한다. 워낙 넓어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 가끔 길을 잃는다는 것이다. 구불구불 이어진 카브의 길이는 총 7.5㎞. 현재는 연결 통로가 막혀 있지만 과거엔 이 동굴이 이웃의 다른 샴페인 하우스들과 연결됐었다고 한다.

 카브 안쪽에는 경사진 나무판들이 도열해 있다. 발효를 마친 샴페인은 침전물 제거를 위해 '르뮈아주(remuage·병 돌리기)'를 하는데 폴 로제에서는 이를 수작업으로 한다. 침전물이 병 입구로 모이도록 나무판에 거꾸로 꽂아 경사도를 점점 높여주는 전통 방식이다. 앙금이 다 모이면 영하 20도 이하로 급속 냉각한 뒤 뚜껑을 열어 찌꺼기가 튀어나오게 만드는 '데고르주망(degorgement·잔여물 제거)'에 들어가는데 이 작업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카브에서 병 돌리기 작업 중인 모습/사진 제공=폴 로저
▲ 카브에서 병 돌리기 작업 중인 모습/사진 제공=폴 로저
 투어를 마치고 샴페인을 맛봤다. 방문을 환영하는 의미로 첫 잔, 올해의 포도들이 잘 자라길 기원하며 또 한 잔, 그리고 윈스턴 처칠을 기억하며 세 번째 잔을 부딪혔다. 마지막 샴페인은 '퀴베 서 윈스턴 처칠(Cuvee Sir Winston Churchill)'이었다. 처칠에 대한 존경을 담은 이 샴페인은 1975년 첫 빈티지 이후 최고의 해에만 생산되고 있다. 탄탄한 구조감으로 힘 있게 입안을 채우면서도 기포는 더 없이 섬세하다.

 이런 샴페인이라면 누구라도 매일 마시고 싶으리라. 노후에도 매일 이곳 샴페인을 한 병씩 마시는 처칠을 위해 폴 로제에서는 적게 마실 것을 권장하며 특별히 작은 사이즈(500㎖)를 따로 만들어 보내주었다고 한다. 91세의 나이까지 지속된 그들의 우애가 퀴베 서 윈스턴 처칠 샴페인에 담긴 듯하다.

윈스턴 처칠 경/사진 제공=폴 로저
▲ 윈스턴 처칠 경/사진 제공=폴 로저
추천 와인
영국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빈의 웨딩 샴페인으로 선택된 '폴 로제 브뤼 레제르브(Pol Roger Brut Reserve)'. 가장 유명한 논-빈티지(Non-Vintage) 샴페인 가운데 하나이며, 규정보다 2배 정도 긴 36개월 동안 병 숙성 후에 출시된다(논-빈티지 샴페인이란 각기 다른 해에 만들어진 것을 블렌딩한 것을 말하며, 전체 샴페인의 80~90%가 이에 해당한다). 감귤류의 과일 향과 우아한 꽃 향에 효모와 비스킷의 풍미가 더해져 복합미를 느낄 수 있다. 최근 밸런타인데이 패키지가 출시됐는데, 순백의 레이블에 어울리는 화이트박스에는 반짝이는 은색의 눈꽃이 수놓여 화사한 느낌을 준다. 여행 정보
 프랑스 파리 동(Est) 역에서 샹파뉴의 에페르네 역까지는 기차로 약 1시간 걸린다. 에페르네 역에서 폴 로제까지는 800m 떨어져 있으며 도보로 10여 분 걸린다. 방문은 사전에 승인을 받아야 한다.

나보영 여행작가
▲ 나보영 여행작가

[나보영 여행작가 alleyna2005@naver.com] ※2005년 기자 생활을 시작해 '주류저널(Liquor Journal)' 수석기자로 여행과 와인을 담당하며 5년 동안 일했다. 퇴사 후 전 세계 와이너리를 여행하며 다양한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는 여행작가로 활동 중이다.
[나보영 여행작가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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