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창조한 공포작가 러브크래프트의 세계

  • 홍성윤
  • 입력 : 2017.02.1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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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황금가지의 러브크래프트 밸런타인데이 이벤트(왼쪽), 오른쪽은 지난해 이벤트/사진출처=황금가지 브릿G 홈페이지.
▲ 출판사 황금가지의 러브크래프트 밸런타인데이 이벤트(왼쪽), 오른쪽은 지난해 이벤트/사진출처=황금가지 브릿G 홈페이지.
[쉽게 읽는 서브컬처-43]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밸런타인데이 이벤트를 열었습니다. '사랑의 연금술사 러브크래프트 전집을 구독하면 사랑의 요정 큐툴루 배지를 준다'는 내용인데요. 이분들 약을 단단히 빨았습니다.

 왜냐면 이름부터 러블리한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는 로맨스소설이 아닌 공포소설의 거장이고, 크툴루는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악한 신적 존재이자 이계의 괴물이거든요. 그런 인물을 사랑꾼으로 둔갑시켰으니, 한마디로 약장사를 했다는 얘기. 작년에도 비슷한 이벤트를 했었는데 더욱 업그레이드됐습니다.

 그럼 이번 서브컬처에서는 H P 러브크래프트 선생과 그가 창조한 세계관인 '크툴루 신화'를 통해 널리 알려진 코즈믹 호러 장르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H.P. 러브크래프트 선생의 존안(존박아님). 한결같은 무표정이 시그니처표정입니다.
▲ H.P. 러브크래프트 선생의 존안(존박아님). 한결같은 무표정이 시그니처표정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감정은 공포이다. 또한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다."

 H P 러브크래프트(1890~1937년)는 에드거 앨런 포와 함께 호러문학계 거장으로 꼽힙니다. 그가 자신의 에세이 '공포문학의 매혹(Supernatural Horror in Literature)'에서 밝혔듯이 러브크래프트와 크툴루 신화는 미지에 대한 공포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특히 그는 작품 속에서 '교류도 이해도 저항도 불가능한, 초월적이고 이질적인 존재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인간 군상'을 꾸준히 그려내면서 꿈도, 희망도 없는 전개를 보여줬습니다.

 크툴루 신화는 코즈믹 호러(cosmic horror)에 기반을 둔 세계관입니다. 코즈믹 호러란 단어 뜻 그대로 '우주적 공포'를 나타내는 말인데, 당대 유행하던 위어드 픽션(weird fiction·판타지와 호러가 결합된 장르소설)을 주로 써온 러브크래프트의 작품군을 설명할 때 쓰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그가 1928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크툴루의 부름(the Call of Cthulhu)'은 그의 작품 세계관을 잘 드러낸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애초에 세계관 이름부터가 크툴루 신화잖아요. 존재감 짱짱맨.

 크툴루는 그레이트 올드 원이라고 하는 신적 존재 중 하나예요. 인류가 존재하기 전 고대 지구의 지배자이며, 다른 고대신들과 함께 해저의 초고대도시에 잠들어 있죠. 오랜 시간이 지나 이들이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불가해한 사건들이 크툴루 신화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팬들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 "크툴루의 부름"포스터. 2005년작이지만,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흑백 무성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 팬들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 "크툴루의 부름"포스터. 2005년작이지만,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흑백 무성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크툴루 신화는 러브크래프트가 혼자 만들어낸 것은 아닙니다. 그가 여러 작품을 통해 풀어낸 세계관을 그의 사후에 후대 작가들이 덧붙이고 체계화하면서 갖춰진 (본격 숟가락 얹는) 세계관입니다. 특히 호러작가(이자 러브크래프트 동료작가 겸 덕후) 어거스트 덜레스는 크툴루 신화 체계를 정립하고 원소 개념 등을 결합시키며 외연을 넓혔어요. 일부 팬은 덜레스가 덧붙이고 완성한 신화가 러브크래프트의 의도를 벗어났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출판사까지 차려 러브크래프트의 유작을 출판하고, 널리 알린 공로는 인정해야 하겠죠.

 크툴루 신화는 러브크래프트 사후에야 비로소 만개했습니다. 러브크래프트의 탁월한 상상력은 다른 후배 작가들에 의해 덧대어지고 체계화되면서 현대 호러 장르와 서브컬처, 대중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덕분에 '빛의 톨킨, 어둠의 러브크래프트'라고 불릴 정도예요. 여기서 톨킨은 소설 '반지의 제왕'으로 잘 알려진 '판타지의 아버지' J R R 톨킨입니다. 이 분야 올타임 레전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러브크래프트 클래스.

 작품과 언행을 통해 드러난 작가의 인종차별 사상은 러브크래프트 팬들도 비판하는 부분입니다. 당대 시대상을 감안하더라도 유색인종과 이민자에 대한 그의 차별의식은 좀 극단적인 수준이었거든요. 작품 속에서 유색인종을 악역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많았고요. "이민자를 추방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어 이거 트럼프?

심슨의 할로윈 에피소드에 등장한 "공포문학의 거장"러브크래프트(왼쪽)와 에드거 앨런 포(오른쪽), 크툴루(원안)도 등장합니다.
▲ 심슨의 할로윈 에피소드에 등장한 "공포문학의 거장"러브크래프트(왼쪽)와 에드거 앨런 포(오른쪽), 크툴루(원안)도 등장합니다.

 러브크래프트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과 작품들을 잠깐만 살펴보자면 △에일리언을 디자인한 화가 고(故) H R 기거 △현대 호러소설의 양대 산맥인 스티븐 킹과 딘 쿤츠(와 수많은 후배 작가) △영화감독 존 카펜터와 클라이브 바커, 기예르모 델 토로 △'왕좌의 게임' 원작자 조지 R R 마틴 △일본 공포만화가 이토 준지 △영화 '이벤트 호라이즌' '미스트' '케빈 인 더 우즈' △MMORPG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비디오게임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와 '블러드본' △영국 드라마 '닥터 후' △락밴드 메탈리카(2집 앨범 수록곡 중에 'The Call of Ktulu'라는 곡이 있음)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의 시나리오를 쓴 우로부치 겐 등등 온갖 영역에 다수 포진된 것은 물론이고 캐릭터나 설정, 스타일을 모티브로서 차용했거나 오마주한 사례까지 따지면 헤아릴 수 없는 수준입니다.

 아, 참고로 배트맨에서 미치광이 악당들이 수감되는 '아캄 수용소'도 크툴루 신화에 등장하는 미국 매사추세츠 소재 가공의 마을 아컴(아캄)에서 따왔습니다. 특히 일본 서브컬처에서 인기가 상당한 편이라, 꿈도 희망도 없는 코즈믹 호러 대신 열혈(그리고 좀 야한) 슈퍼로봇 장르로 탈바꿈한 미디어믹스 '데몬베인' 시리즈나 온갖 모에 요소로 패러디된 라이트노벨 '기어와라! 냐루코 양' 등 러브크래프트 선생이 보면 무덤에서 돌아누울 것 같은 작품도 많이 나왔습니다. (작품으로서의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크툴루 신화는 과학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캐나다의 한 연구팀은 흰개미 창자에서 발견한 공생 원생생물을 '크툴루'라고 명명했습니다. 20개의 편모로 움직이는 모양새가 문어와 닮았기 때문이라나요. 흰개미 배 속에서 발견된 또 다른 원생생물에는 '크틸라(Cthylla)'라는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크툴루의 숨겨진 딸 이름이죠.

흰개미의 창자속에서 새로 발견된 공생 원생생물 크툴루. 막대는 0.01mm. 원 안은 크툴루를 묘사한 그림./사진출처=에릭 제임스 외. 온라인 공개 학술지 플로스
▲ 흰개미의 창자속에서 새로 발견된 공생 원생생물 크툴루. 막대는 0.01mm. 원 안은 크툴루를 묘사한 그림./사진출처=에릭 제임스 외. 온라인 공개 학술지 플로스

 크툴루 신화는 그리스 신화처럼 수많은 신이 등장하는 만신전(萬神傳)입니다. 우선 크툴루는 해저에 잠들어 있는 고대신의 일족입니다. 외모는 수많은 촉수가 달려 있는 문어와 같은 얼굴에 인간과 닮은 몸에 박쥐 날개까지 달려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 '추정'이냐면 일단 평범한 사람들이 조우하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미쳐버리거나 죽어버리기 때문이죠. 작품 속 대부분의 괴물이 그래요. 크툴루의 장남인 과타노차는 그의 석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는 미라가 된다는 설정이 있습니다.

 "픈글루위 미글와나프 크툴루 르뤼웨 와그나글 프타근(르리웨에 있는 집에서 죽은 크툴루가 꿈을 꾸며 기다리고 있다)."

 아무튼 '크툴루가 깨어나는 것=세계 멸망'일 정도로 강력하고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악당처럼 인류에 대한 악의가 있거나 세계 정복 같은 목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이들에게 인간이란 벌레나 먼지만도 못한 미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관심조차 없습니다.

 이 밖에 나알라토텝도 크툴루 세계관에서 꽤 인기 있는 캐릭터입니다. 이명(異名)이 '기어 다니는 혼돈'인 그는 아우터 갓(외계의 신, 바깥의 신) 중 하나로 인류에 하등 관심 없는 다른 신들과는 달리 수많은 모습으로 등장해 '재미로' 현세에 개입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과학 기술에 능통해 핵무기 등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기술을 알려줬다는 설정도 있습니다. 크툴루 신화를 차용한 작품에서는 흑막(최종 보스)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요.

나알라토텝의 헌신 중 하나인 "어둠 속에서 울부짖는 자"(왼쪽)과 라이트노벨 "기어와라!냐루코양"의 나알라토텝성인(星人) 냐루코양. 일본의 어둠은 깊다.
▲ 나알라토텝의 헌신 중 하나인 "어둠 속에서 울부짖는 자"(왼쪽)과 라이트노벨 "기어와라!냐루코양"의 나알라토텝성인(星人) 냐루코양. 일본의 어둠은 깊다.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러브크래프트가 소설 속 소재로 만들어낸 가공의 책으로, 크툴루 신화 곳곳에서 등장하는 마도서입니다. 서기 730년 미치광이 아립인 압둘 알하자드가 집필한 '알 아지프'의 그리스어판 번역본 제목이 바로 네크로노미콘. 그레이트 올드 원의 기원과 역사, 고대신의 소환법과 각종 금술이 기록된 책으로,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파멸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책입니다. 당연히 실존하지 않은 가짜 책이지만 작품 속에서 하버드대학 도서관과 대영박물관 등에 보관돼 있다고 명시되는 바람에 해당 도서관에는 아직까지도 열람 문의전화가 온다고. (사서 "그런 책 없다고!!")

 영화 '이블 데드'에도 등장합니다. 책에 쓰인 주문을 읊으면 악령들이 소환되는 중요 아이템으로 등장했죠.

영화 "이블 데드"에 등장하는 네크로노미콘(못생김 주의). 이런 책을 습득하신 분은 가까운 쓰레기통에 버리시기 바랍니다.
▲ 영화 "이블 데드"에 등장하는 네크로노미콘(못생김 주의). 이런 책을 습득하신 분은 가까운 쓰레기통에 버리시기 바랍니다.

 러브크래프트의 세계에는 유쾌한 호빗도, 매력적인 엘프도 없습니다. 중간계를 둘러싼 장구한 서사시도 없죠. 오직 세계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미지의 공포와 공포에 짓눌려 미쳐가는 희생자만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도 희망도 없는 러브크래프트의 상상력은 수많은 사람을 매료시켰고, 신화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과학과 지식이 아무리 발전해도, 미지(未知)의 영역은 언제나 저 멀리로 달아나버립니다. '미지의 공포' 크툴루 신화가 현재진행형인 까닭이죠.

 '사랑의 연금술사'라는 말에 낚여 접했으면 어때요. 한 사람이 창조한 거대한 세계를 알게 되는 기쁨, 곧 밸런타인데이 선물 아닐까요. 네크로노미콘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당신에게도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가 당도하길 빌어봅니다.

 "그것은 영원히 누워 있을 죽음이 아니며, 기이한 영겁 속에서 죽음은 죽음마저 소멸시킨다(That is not dead which can eternal lie, and with strange aeons even death may die)."

[홍성윤 프리미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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