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로변 신사가 간직한 소설 설국의 탐미주의

  • 허연
  • 입력 : 2017.03.0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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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신사
▲ 스와신사
[허연의 일본문학 기행-13] 다카한 여관이 있는 마을 못 미쳐 철로변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스와사(諏訪社)라는 이름의 신사가 있다. 신칸센 열차 길이 뚫리고 마을의 형태가 변화하면서 주변 풍광은 많이 달라졌지만 소설에 나오는 돌사자상과 평평한 바위, 커다란 삼나무는 여전히 건재하다. 특히 수령이 400년이나 된 삼나무는 시마무라와 코마코의 사연을 다 내려다본 듯 신령스럽게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사실 이 신사는 소설의 생성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장소다. 야스나리가 마을 산책 중 이곳에서 소설 '설국'을 구상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사에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삼나무 숲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그도 말 없이 따라 들어갔다. 신사였다. 이끼 낀 돌사자상 옆 평평한 바위에 여자가 걸터 앉았다.(중략)

 삼나무는 손을 뒤로 해서 바위를 짚고 가슴을 젖히지 않고서는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키가 컸고, 게다가 너무나 일직선으로 줄기가 뻗어 있고 짙은 잎이 하늘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막막한 정적이 울릴 듯했다. 시마무라가 등을 기댄 줄기는 그중 가장 수명이 오래된 것이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북쪽의 가지만이 끝까지 완전히 말라 있었다. 잎이 다 떨어지고 남은 나뭇가지의 밑동은 마치 뾰죽한 말뚝을 줄기에 꽂아 세워놓은 듯 보였다. 어쩐지 무서운 신(神)의 무기 같았다."

 내 눈 앞에 있는 이 삼나무가 시마무라가 등을 기댔던 삼나무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신의 무기'같은 분위기로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스와신사는 아주 오래된 신사다. 1200년경 건립됐다고 하니까 무려 800년이 넘은 역사를 지난 신사다. 아마 에치고 유자와 마을과 역사를 거의 같이 하지 않았을까 싶다.

 주인공 시마무라가 이곳 신사에서 코마코와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은 시마무라가 유자와 마을을 첫 번째 방문했을 때다. 이제 막 서로를 알아가게 된 두 사람은 떨리고 설레이는 감정으로 이 신사를 찾았을 것이다. 소설에는 이런 상황이 충분히 그려져 있다. 소설에서 시마무라가 말하는 코마코의 이미지는 시종일관 '깨끗함'인데 그 깨끗함의 정점을 이루는 묘사가 스와신사를 배경으로 나온다.

 등산로에서 내려와 우연히 코마코를 만난 시마무라가 며칠 후 코마코의 모습을 관찰하며 이렇게 독백하는 장면이다.

 "시마무라는 자신이 싫어지는 한편 여자가 더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삼나무숲 그늘에서 그를 부른 이후, 여자는 어딘가 탁 트인 듯 서늘한 모습이었다.

 가늘고 높은 코가 약간 쓸쓸해 보이긴 해도 그 아래 조그맣게 오무린 입술은 실로 아름다운 거머리가 움직이듯 매끄럽게 펴졌다 줄었다 했다. (중략) 다소 콧날이 오똑한 둥근 얼굴은 그저 평범한 윤곽이지만 마치 순백의 도자기에 엷은 분홍빛 붓을 살짝 갖다 댄 듯한 살결에다, 목덜미도 아직 가냘퍼 미인이라기보다는 우선 깨끗했다."

 야스나리는 무려 반쪽 분량의 지면에 코마코의 외모를 묘사한다. 흡사 서로 어울리지 않을 수 있는 사조인 극사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를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소설 곳곳에서 만나는 야스나리의 이런 탐미적 접근 태도는 사실 야스나리 문학의 중요한 구성 요소다. 그의 소설은 이른바 '신문예'라는 이름으로 주로 거명되는데, 실제로 야스나리 문학은 흔히 말하는 신문예니 신감각이니 하는 유파하고 꼭 들어맞지 않는 유별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야스나리의 제자이자 동시대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는 "어떤 시대관념도 가와바타 씨를 기만하지는 못했다. 근대, 신감각파, 지성, 국가주의, 실존철학, 정신분석 등등 온갖 관념이 우리 시대를 백귀야행처럼 나돌고 있으나, 가와바타 씨는 그 어느 것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야스나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사조'라는 문예지를 재창간하면서 신감각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점차 자신만의 세계로 나아간다. 청년시절엔 허무와 우수가 넘치는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썼지만 점차 '미(美)' 그 자체를 추구하는 세계로 천착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완결판이 바로 '설국'이다.

 바로 이런 장면에서 야스나리가 도달하고자 했던 '절대미'의 세계를 맛볼 수 있다.

 "적당히 피로해졌을 무렵, 문득 방향을 바꾸고는 유카타 자락을 걷어 올려 한달음에 뛰어 내려오자, 발밑에서 노랑나비가 두 마리 날아올랐다. 나비는 서로 뒤엉키면서 마침내 국경의 산들보다 더 높이 노란빛이 희게 보일 때까지 아득해졌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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