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설국'이 그린 세상은 모자이크같은 환상의 나라

  • 허연
  • 입력 : 2017.03.1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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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일본문학 기행-15] 재미있는 건, 소설 어디에도 설국의 실제 무대가 니가타현 에치고 유자와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야스나리가 자신의 출세작인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에서 '이즈'라는 지명을 명확하게 밝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가 '설국'에서 구체적인 지명을 감춘 이유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앞에서 거론했지만 '설국'은 환상의 세계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시미즈 터널을 지나는 순간 환상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독자들도 시마무라의 시선을 따라 환상계로 함께 들어가게 된다.

 야스나리는 생전에 소설 속에 지명을 굳이 밝히지 않은 이유에 대해 "구체적인 지명은 작가 및 독자의 자유를 구속하게 되는 것 같고, 지명을 밝히는 순간 그곳에 대해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즉 특정 지명을 밝히는 순간 다가오게 될 '사실(fact)'에 대한 중압감을 떨치기 위해 지명 공개를 피해 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명이 드러날 경우 소설 '설국'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진행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제자였던 미시마 유키오. 훗날 두 사람은 문학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제자였던 미시마 유키오. 훗날 두 사람은 문학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야스나리의 제자이자 문학적 도반이었던 미시마 유키오가 '설국'에 대해 한 말을 떠올려 보면 야스나리가 그리고자 했던 세계가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제는 어떤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 항상 움직이고 있는 인간생명의 각 순간을 이어주는 순수지속(純粹持續)이다. 따라서 그것은 변화의 기록이고, 순간의 집성이다. 고마코라는 여성도 요코라는 여성도 일관된 하나의 인물이나 성격이라기보다는 생명의 각 단면과 순간으로만 그려진다. 독자는 그런 세부를 연결해서 하나의 전체상을 포착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애당초 정념이라는 것은 전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터널 밖 세상은 환상에 기반한 모자이크 같은 세상이다. 그렇다보니 소설은 독자들을 힘들게 만든다. 독자들은 습관적으로 인과관계를 통해 하나의 전체상을 포착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설국'을 가장 잘 읽는 방법은 한 행, 한 행, 시를 읽듯 이미지로 읽어나가는 것이다. 읽으면서 소설 전체의 인과관계를 찾거나 그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그냥 나열된 이미지 하나하나를 감상하듯 읽어야 한다. 그렇게 읽어가다보면 독자 스스로 어떤 '종합'에 이르게 된다.

 미시마가 말한 '순수지속'은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인데 쉽게 말해 실제 시간은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일정하고 기계적인 시간과는 달리 흘러간다는 개념이다. 무엇에 빠져 있을 때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진정한 시간은 양적 관계가 아니라 질적 관계로 구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야스나리가 의도한 환상의 세계를 여행하는 시마무라의 캐릭터를 봐도 그가 환상계의 주연배우임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그는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이다. 사실세계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고 사는 사람인 것이다. 그나마 그가 하는 일은 서양 무용에 대한 비평을 가끔 쓰는 것인데 이것 역시 사실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무용 공연을 보고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실제로 본 무용이 아닌 것을 평하는 시마무라의 시선이 곧 설국을 보는 야스나리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어보면 단박에 알 수 있지만, 시마무라는 뭔가 현실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자세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흡사 거울에 비친 풍경을 감상하듯 한 발 물러서서, 마치 공연장에서 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책에서 무용을 보듯 무대라는 현장에 빠져들지 않는 자세를 유지한다.

 그 간접적인 자세가 독자들로 하여금 에치고 유자와를 세상에 실재하지 않는 마을처럼 느끼게 만든다. 마치 거울 속에나 존재하는 마을처럼.

 "손가락으로 기억하는 여자와 눈에 등불이 켜진 여자 사이에 무슨일이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쩐지 시마무라의 마음속 어딘가에는 그것이 보이는 듯했다. 아직 저녁풍경이 비치던 거울에서 덜 깨어난 탓일까. 그 저녁 풍경의 흐름은, 그렇다면 흐르는 시간의 상징이었나 하고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 

 유심히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여기서 '손가락으로 기억하는 여자'는 고마코고, '눈에 등불이 켜진 여자'는 요코다. 야스나리는 이런 이중노출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로 시종 소설을 이끌어간다. '흐르는 시간의 상징'이라는 표현은 미시마가 말한 베르그송의 '순수지속'과 너무나 잘 맞아 떨어진다.

 또 한 가지. 소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상징물이 있다. 시마무라의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서양 무용 평론이다. 왜 하필 일본 무용이 아니라 서양 무용이었을까.

 직접 무대를 보지 않고 인쇄물에 의지해 무용평을 쓰는 시마무라는 당연히 자기 나름의 상상력에 의지해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에치고 유자와에서도 그렇다. 그는 현실(실제 무대)에 뛰어들기보다는 제멋대로 관찰과 상상으로 고마코와 요코의 머릿속을 그려낸다. 소설 어디에도 직접적으로 고마코와 요코의 내면을 묘사하는 부분은 없다. 그저 시마무라의 추측을 통해 만날 뿐이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와 요코의 내면을 탐구하려고도 안 한다. 마치 무용 공연을 보지 않고 무용평을 쓰듯 말이다.

 이제 단서가 잡힌다. 소설 설국은 시마무라의 행동을 따라가는 소설이 아니라 시마무라의 생각을 따라가는 작품인 것이다. 당연히 생각에는 순차적인 시간도 공간도 필요 없다. 떠오르는 것이 곧 이야기일 뿐이다.

 주인공 시마무라의 모습에 작가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투영됐느냐는 물음에 야스나리는 "시마무라는 내가 아닙니다. 남자인지도 불분명합니다. 단지 고마코를 비추는 거울 같다고나 할까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 생각에 시마무라는 곧 야스나리였다. 야스나리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시마무라에게는 야스나리가 투사되어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야스나리의 인생을 다루는 부분에서 자세히 들여다보겠지만 그의 소설에 나오는 어떤 주인공도 야스나리가 아닌 적이 없었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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