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촐한 죽음의 장소로서 다다미 여덟 장은 넓어 보였다."

  • 허연
  • 입력 : 2017.03.2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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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하기 전 다카한 료칸의 모습. 돌출된 2층 방이 야스나리가 머물렀던 방이다.
▲ 개축하기 전 다카한 료칸의 모습. 돌출된 2층 방이 야스나리가 머물렀던 방이다.
[허연의 일본문학 기행-16] 작품의 배경이자 야스나리가 실제로 묵으며 소설을 집필한 다카한(高半) 여관은 에치고 유자와 역에서 메인 도로를 따라 천천히 30분 정도를 걸으면 눈앞에 나타난다.

 다카한 여관은 설국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장소다. 예전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색 있었던 예전의 3층 건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새롭게 건축한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물론 현대식 건물 2층에 야스나리의 방이 재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뭔가 아쉽다. 기록과 보존을 잘하기로 유명한 일본인들이 왜 여관 건물을 원래 모습과 판이하게 다르게 개축해 놓았는지 궁금하다. 본래 모습을 유지하면서 리모델링 정도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다카한은 고만고만한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 별 특색 없이 서 있다. 현관의 간판과 설국산책로를 알려주는 '雪國 文學散步道'라는 약도가 그려져 있는 입간판이 없다면 이곳이 소설 '설국'의 현장인지 알기는 쉽지 않다.

 옛 모습은 잃어버렸지만 다카한의 2층 방은 소설의 중심무대이며 상징적인 공간이다.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만남은 다카한 료칸의 다다미 여덟 장 위에서 가장 친밀하게 묘사된다. 그 방은 설국의 세계, 즉 환상계의 핵심이다.

 "가을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그의 방 다다미 위에는 거의 날마다 죽어가는 벌레들이 있었다. 날개가 단단한 벌레는 한번 뒤집히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벌은 조금 걷다가 넘어지고 다시 걷다가 쓰러졌다. 계절이 바뀌듯 자연도 스러지고 마는 조용한 죽음이었으나, 다가가보면 다리나 촉각을 떨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들의 조촐한 죽음의 장소로서 다다미 여덟 장 크기의 방은 지나치게 넓었다."

 얼마나 압축적으로 소설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문장인가. 몇 번을 읽어도 감탄스럽다. 시마무라가 유자와를 세 번째 방문했을 때 나오는 문장인데 '다다미 여덟 장'으로 소설 전체의 지향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에서 유자와 마치는 '조촐한 죽음의 장소'로서 손색이 없는 곳으로 그려진다. 한 번 뒤집히면 일어나지 못하는 곳 그곳이 에치고 유자와, 즉 '눈의 나라'였다.

 다카한 여관은 900년의 역사를 가진 온천여관이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말기 이곳에서 온천을 발견한 다카하시 한자에몬(高橋半左衛門)으로부터 현재의 36대 주인 다카하시 하루미 여사에게까지 가업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야스나리가 다카한에 머물게 된 계기는 35대 주인인 다카하시 하루미 여사의 부친과 도쿄대 문학부 선후배라는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온천은 42도 정도의 물이 샘솟는데 지금도 1분에 100ℓ의 물이 나온다고 한다. 일반적인 유황온천인데 수질이 좋아서 인기가 높다고 한다.

 현재 다카한은 동관과 남관으로 구성된 전체 6층 건물이다. 동관(본관) 2층에 야스나리가 묵었던 방인 가스미노아(안개의 방·かすみの間)를 복원해 놓았다. 다행스럽게 예전 건물을 해체할 때 당시 내부 기물들을 그대로 모아 놓았다가 재현해 놓고 있다. 가스미노아는 소설 속에서는 '동백실'이라고 불리는 방이다.

 이 방은 매우 신경 써서 꾸며져 있다. 2층 전시장에서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작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면 아주 작고 고운 흰 자갈이 깔려 있는 일본식 정원을 통과해 방을 구경하게 되어 있다.

 방에는 앉은뱅이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다. 체구가 작은 야스나리가 이 의자에 앉아 책상에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 상상이 됐다. 방 한쪽 구석에는 경대가 있었는데 이 경대는 소설에도 등장하는 주요 오브제다.

 "시마무라는 작년 세밑의 그 아침, 눈(雪)이 비치던 거울을 떠올리며 경대 쪽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차가운 꽃잎 같은 함박눈이 한층 크게 나타나, 옷깃을 들추고 목덜미를 닦는 고마코의 주위에서 하얀 선으로 감돌았다. 고마코의 살결은 금방 헹궈낸 듯 깨끗해서 시마무라가 어쩌다 내뱉은 말 한마디조차 오해할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거역할 수 없는 슬픔이 있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설경과 경대에 비친 고마코의 모습을 대비시켜 묘사한 이 대목은 소설 '설국'의 백미 중 하나로 꼽힌다.

 안개의 방에서 유자와 마치 쪽을 내려다보면 가까이는 여관의 마당이 보이고 멀리는 눈 쌓인 높다란 산을 배경으로 뻗어 있는 신칸센 철로가 보인다. 이 창틀에서 야스니라는 마츠에를 기다렸을 것이고 그녀가 마당을 가로질러 여관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훔쳐봤을 것이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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