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호실' 조연배우 박수영 "옆집 아저씨 같은 배우"

  • 김시균
  • 입력 : 2017.11.2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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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主演)과 조연(助演). 겉보기에 두 단어는 앞 글자 모음 하나 차이다. 획 하나가 내려가고(ㅜ) 올라가는(ㅗ) 것에 불과하므로. 그러나 획 하나가 불러일으키는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내려가면 주인 주(主)가 되고, 올라가면 도울 조(助)가 된다. 전자는 극의 주도권을 쥐나, 후자는 보조에 머물러야 한다. 세상이 주목하는 건 언제나 일등이다. 이 점은 영화와 드라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스타들에 대한 이야기로 무성할 때 이 땅의 조연들은 그저 묻힌다. 늘 그러했듯 조용히, 그리고 쓸쓸히. 그렇지만 우리 대부분은 안다. 조연 없는 주연은 없다는 것을. 조연이 받쳐줄 때라야 주연이 더욱 빛난다는 사실을. '나는 조연배우다'는 이 익숙하지만 주목도 낮은 조연 배우들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담아내기 위한 인터뷰 시리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으로 배우 박수영 씨(47)를 소개한다.

배우 박수영 <사진=양유창 기자>
▲ 배우 박수영 <사진=양유창 기자>
[나는 조연배우다-1] 완득이 아빠 혹은 영친왕 박수영

붉게 물든 단풍과 샛노란 은행잎 모두 우수수 떨어져버린 지난 17일 오후. 가을이 저 멀리 물러난 서울 중구 충무로는 한낮에도 칼바람이 나부꼈다. 이날 만난 박씨는 회색빛 재킷에 빨간 스웨터 차림이었다. 스크린과 안방극장에서 마주했던 예의 그 소탈한 분위기가 첫인상부터 느껴졌다. 이래 봬도 27년차 베태랑 배우. 하지만 대중이 기억하는 그의 이미지는 생각보다 많진 않다.

영화에서라면 '완득이'(2011)에서 완득이(유아인) 아빠 완득부로 그나마 유명세를 탔다. 지난해 여름에는 '덕혜옹주'(2016)의 영친왕으로 존재감을 알렸고, 최근엔 블랙코미디물 '7호실'에서 DVD방 관리인을 연기했다. 안방극장으로는 SBS 드라마 '내일이 오면'(2011)에서 서른 셋 장남 이규남이 잔잔한 인기를 모았다.

-대부분 일상의 소시민을 많이 연기했어요.

"그렇죠, 흔히 우리 주변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인물들, 그런 사람들 위주로 맡아온 것 같아요. 작년에 난생 처음 왕을 연기했지만요.(웃음)"

-그래서 처음 봬도 친근한가 봐요.

"하하, 그런가요. 그렇게 봐주면 감사하죠."

-평소에 어떤 마음으로 연기하세요?

"크게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그냥 전 이 세상에 있는 배우 중 한 명일 뿐이에요. 현실에 있는 한 사람 배우. 연기 방식이 배우마다 제각각이잖아요. 어떤 배우는 정말 연기력이 뛰어나고 에너지와 카리스마가 넘치죠. 저는 그냥 평범하게 강한 카리스마 없이 연기하는 것 같아요."

-그런 만큼 그리 주목 받진 못하시는데.

"음, 오히려 좋은 걸요? 알아 보시는 분이 그리 많진 않으니 여행 다니기 편하죠. 간혹 알아봐주시긴 하는데 그렇게 자주는 아니고요. 가끔 식당에서 주인 아주머니가 알아보면 서비스는 좀 주시더라고요.(웃음) 스포트라이트 많이 받는 스타들이라면 저처럼 지내긴 어렵겠죠."

박씨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 가장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극심한 가난은 박씨 식구에게 감당하기 힘든 멍에였다. 고교 졸업 후 대학을 가지 못한 건 그래서다. 돈부터 우선 벌어야 했다. 부산에 있는 이모부에게서 연락이 온 건 그즈음. 선박관리 회사를 운영 중인 이모부가 그를 불러들인 것이다. "내려온나. 여서 기술 배우면 니 평생 먹고사는 데 걱정 없을 기다."

-그때 바로 내려가신 거예요?

"네, 서울서 바로요. 두 분은 진짜 평생의 은인이에요. 숙식뿐 아니라 친아들처럼 뒷바라지를 계속 해주셨어요."

-서울 토박이가 부산서 적응하자니 쉽지 않았겠어요.

"아무럼요. 나이 열 아홉, 스물에 배 타는 일이 어디 쉬웠겠어요. 배 타는 분들이 꽤 험악하거든요(웃음). 연고지도 아니잖아요. 서울에서 온 새파란 놈이 배에서 같이 부대끼며 지낸다고 상상해봐요. 정서적으로 피폐해지지. 무엇보다 외로웠어요. 친구가 절실했죠."

-극단 문을 두드리신 것도 그때부터군요.

"네, 이모댁에서 출퇴근하는 길 가운데 연희단 거리라고 있어요. 거기에 가막골 소극장이 있었죠. 지금은 광안리로 위치만 옮겼고요. 아무래도 연극하는 곳이니 제 또래가 있을 것 같았어요. 퇴근하면 같이 어울릴 친구들을 여기서 만들 수 있겠다 싶었던 거죠."

열 아홉에 부산 내려가 배 타면서 일해

외로움 달래려 가막골 소극장 들어간 게

연기와의 첫 인연…극단 1~2년 선배

오달수 배우와 둘도 없는 27년 지기



매일 저녁 달수 형과 막걸리 소주 마시며

이윤택 선생 극단서 연기 인생 1막 시작

20여 년 전 공연 포스터 같이 붙이다 경찰 오자

먼저 내뺀 달수 형 혼자 극장서 라면 먹던 기억



가난했지만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큰 기쁨

지지해주신 이모, 이모부, 어머니께 감사

한때 힘들어 분식집 차리며 전전긍긍했으나

다시 돌아와 연극일 매진하며 2002년에 분기점



2011년 '완득이'에서 완득이 아빠 역으로 얼굴 알려

같은 해 드라마 '내일이 오면' 서른 셋 장남도 인기

지난해 '덕혜옹주'에서 영친왕의 비애 호연

최근 블랙코미디물 '7호실' DVD방 관리인도




영화
▲ 영화 '완득이'
연극과의 인연은 그렇게 닿았다. 이모댁이 있는 초량과 이모부 회사가 있는 영도 사이를 매일 오가다 보면 작은 간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가마골 소극장이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퇴근 후 이곳을 찾았다. 극장에 들어서면 전신을 짓누르던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무거운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극단 1~2년 선배 오달수도 그때 처음 만났다. 햇수로 치면 27년지기. 처음에는 달수 형과 매일 술 먹는 재미로 지냈다고 한다.

-배 타는 일보다 훨씬 좋았나봐요?

"아마 1989~1990년이었죠. 이윤택 선생님께서 운영하는 극단이었어요. 창작극과 실험극이 활발히 올려지던 때였죠. 희한하게도 거기 분위기만큼은 어색하지가 않았어요. 정말 재미있었죠. 학창 시절에 워낙 수줍음이 많아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지냈거든요. 조금만 쑥스러워도 얼굴이 새빨개지니까. 지금도 동창들은 그래요. '네가 이런 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제일 좋았던 게 달수 형이랑 매일 술 먹는 거였어요. 극단 퇴근하면 기다려서 매일 소주, 막걸리 마시고 놀았어요. 여기저기 다녔죠. 영도다리 아래 포장마차에서도 마시고, 태종대에서도 마시고(웃음)."

-그러다 연극에 올인하시게 된 거고요?

"배를 한 1년 탔을 땐가요. 고민이 많았어요.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그러다 남자 배우 한 명이 위 출혈로 공연을 못하게 되는 일이 있었어요. 공연은 남아 있고 남은 배우는 그 당시 저 하나뿐이고. 급하게 남은 기간만 '땜빵'을 하게 된 건데, 이 일로 회사도 관두게 됐어요.

-이모부가 뭐라 안 하셨어요?

"전혀요. 그때 극구 반대하셨으면 아마 못했을 걸요? 제가 연기에 대해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었으니까요. 자상하시면서도 엄하시거든요. 허황된 꿈 말고 착실히 공부하라는 주의였어요. 그런데 연극하겠다고 말씀 드리니 반대하시지 않는 거예요. '너 군대 안 갔으니 가기 전까지 하고 싶은 거 다 해봐라' 하신 거예요. 깜짝 놀랐죠."

-그렇게 지지해주신 계기가 있었나요?

"집에서 극장이 가깝잖아요. 이모와 이모부가 처음 제 공연을 보러 오신 적이 있어요. '오구'라는 작품을 올리던 때였어요. 달수 형이 문상객 역할을 하고 저는 저승사자 막내 역할을 했죠. 이윤택 선생님 대표작이에요. 그날 이보 부부가 함께 보더니 '넌 그냥 이거 해야겠다'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맘 편히 연극할 수 있었죠."

-날 때부터 배우의 피가 흘렀나봐요.(웃음) 달수 선배와 에피소드가 많았겠어요.

"하하, 웃긴 기억 많죠. 어, 옛날엔 포스터 붙이는 걸 '풀팅'이라 그랬어요. 2인1조로 벽에 붙이러 가는 거죠. 풀이랑 풀통, 풀빗, 풀포스터 나눠 들고. 남포동에서 그때 데모가 한창이었요. 어느 날 풀팅하고 있는데 시위대랑 경찰이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저흰 일 해야 하니까 벽에 포스터 붙이고 있었고요. 그런데 경찰들이 저희가 뭘 붙이니까 대자보 붙이는 걸로 오해했나봐요. 경찰 여섯 명이 무섭게 저 멀리서 다가왔어요. 달수형을 쓱 쳐다봤죠. 그때 형이 속삭이듯 그러는 거예요. '보지 마라, 보지 마라' 그러다 불안해져서 한 번 쓱 뒤를 봤어요. 근데 돌아서니 형이 없어요. 풀통, 풀빗 다 던지고 먼저 내뺀 거죠(웃음)."

-아이고, 먼저 내뺐다고요?

"그렇죠, 결국엔 저도 도망쳤고요. 골목골목 누비다 공중전화로 극장에 전화했어요. 선배 누나가 받길래 '누나, 여기 포스터 붙이다 달수 형이랑 헤어졌는데 형 연락처 없어?' 하고 물었죠. 그런데 이러는 거예요. '달수 벌써 들어왔다. 라면 먹는다, 근데 네 어디고?' 그때 얼마나 황당하던지(웃음). 나중에 형이 그러더라고요. '야이 새키야, 경찰이 오면 도망가야지.'

그야말로 호시절이었다. 그러나 마냥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강원도 홍천에서 지역 방위군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도무지 극단 일은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생계 문제가 언제고 그의 목을 옥죄었다. 1995년, 그러니까 25세 무렵. 한 차례 커다란 회의가 찾아들었다. 이윤택 선생이 연희단 거리패를 서울로까지 확장했을 당시였다. 그 뒤로 박씨는 한동안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연극 일을 이어간다. '곡마단'이라는 작품도 그즈음 올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힘에 부쳤다. 몸과 마음이 불안과 걱정으로 점점 망가져갔다. 1년 후, 그는 결국 극단을 그만둔다. 28세가 되면서 서울 신당동 중앙시장에 작은 분식집을 하나 차린다.

-분식집을 운영했다고요?

"어머니께서 연극으로 돈도 못 버는데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거예요. 근데 아무나 하는 게 아니대요. 주방 음식해주시는 할머니 한 분만 계셨어요. 홀이라고 할 것 없이 정말 작은 가게였죠. 배달, 서빙 전부 제가 했는데, 3월 1일에 개업해서 3월 31일에 문 닫았어요(웃음)."

-어머니께서 걱정 많으셨겠어요.

"희한한 게요. 어머니가 절에 다니세요. 그 절에 보살님이 한 분 계신데 시주를 하러 다니시다 저희 가게에 오신 적이 있어요. 어머니가 반가워서 식사를 대접해드렸죠. 근데 그분이 이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아드님이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는데 저 사람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얘기를 가만히 듣던 어머니가 '그만둘래' 하고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다시 극단에 들어갔군요.

"그렇죠, 거기서 숙식을 다 해결했어요. 돈이 필요하니 20대 중반부터 서른 살 넘어서까지 두 탕 세 탕씩 아르바이트를 뛰었죠. 제일 오래한 게 주유소 일이에요. 밤 11시부터 이튿날 아침 8시까지 했어요. 자고 일어나면 연습하고 공연하고, 다시 주유소 가서 일하기를 반복했죠. 스물 아홉에서 서른 살로 넘어가는 시점이 고비였어요. 주위 연극 선배들은 나이 쉰, 예순이 되어도 생계가 계속 어려운 걸 자주 봤어요. 나도 저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었죠. 정말 두려웠어요. 노숙자가 될 것 같고, 앞날이 기약된 것도 없으니 극단적인 생각이 들고···."

배우 박수영 <사진=양유창 기자>
▲ 배우 박수영 <사진=양유창 기자>
-그러다 터닝포인트가 된 게 있었나요?

"정말 힘들지만···. 일단 재미있잖아요. 그걸 포기 못 해요. 관객들이 공연 재미있게 봐주면 그게 가장 큰 행복이에요. 성취감을 생기니 비관적인 생각도 물러나고. 그러다 2002년 일본에서 한일 합작 연극 교류가 있었어요. 그때 일본의 한 연출가가 한국에서 저를 캐스팅했어요. 일본 간 건 그때가 처음이에요. 두 달 연습하고 '출격'이라는 작품을 올렸죠. 제2차 세계대전을 빗대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윗동네 아랫동네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당시 경험이 많은 전환점이 됐어요. 우물 안 개구리가 좀 더 넓은 세상을 보니 느끼는 바도 많고 자신감도 얻고. 그 뒤로 대학로에서 작품을 더 많이 하게 됐죠. 잡생각 안 하고 일에 전념하면서(웃음)."

그렇게 십 수년 연극인으로 보냈다. 무대에 올린 것만 어림잡아 40~50편. 그사이 영화 출연도 빈번히 했다. 대부분 단역이었다. '박하사탕'(2000)의 공장 직원 중 한 명, '싱글즈'(2003)에서 지하철 승객, '말죽거리 잔혹사'(2004)의 정치경제 교사, '타짜'(2006)의 고니 삼촌, '궁녀'(2007)의 서고 관료, '영화는 영화다'(2008)의 이 실장···. 그러다 2000년대 후반부터 단역과 조연을 오갔다. 뭐니 뭐니 해도 스스로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건 '완득이'(2011). 가난한 판잣돈 동네에 사는 완득이 아버지 완득부 역이다. 쇠락한 장터에서 광대 공연을 벌이며 사는 그는 이 시대 가난한 소시민들의 표상이었다.

-'완득이'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어요?

"제작사 대표가 부산에서 같이 연극하던 극단 후배였어요. 그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죠. '완득이'라는 영화를 하는데 형님이 같이 하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제가 일본에서 하는 공연이 있었어요. 욕심은 있지만 못할 것 같다고 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도 이 영화가 촬영이 안 되고 있다는 거예요. 완득부라는 아버지의 특수성에 어울리는 배우가 없다는 거예요. 어느 날 그 친구가 일본에 있는 저한테 국제전화를 걸어오대요. 출연해달라고요. 다행히 극단 쪽에서도 배려해줘서 병행할 수 있었어요."

-그 뒤로 경제 사정은 좀 나아졌어요?

"그간 주변에 진 빚을 다 갚았어요. 연극배우가 아시다시피 개런티가 적잖아요. 주변에서 집세도 빌리고 뭐도 빌리고 하다보니 그게 좀 쌓여 있었어요. 그리 큰 금액은 아니지만 완득부 덕분에 다 청산한 거죠. 여기저기 고마운 분들한테 술도 많이 샀고요. 이 영화 끝나고 SBS 드라마 '내일이 오면'을 바로 찍었어요. 하석진 씨가 주인공인데, 임현식 선생님 장남 역으로 출연했어요. 아무래도 드라마가 더 파장이 크더군요. 주변에서 더 많이 알아봐주시고. 그 뒤로 드라마도 한 열댓 편 찍은 것 같아요(웃음)."

영화
▲ 영화 '덕혜옹주'
-최근 영화로는 '덕혜옹주'(2016)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영친왕이 주인공은 아니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조연이었죠. 일제강점기라는 당시 시대상을 가장 잘 반영한 캐릭터 중 하나예요. 허무주의적이고 체념적이고 기운 없는, 직위는 왕이지만 왕이라 할 수 없는 이 비애 가득한 인물의 모습에 배우님의 이미지가 최적화돼 있었어요. 특히나 독립군의 도움으로 조국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이 내좌절하고 마는 야외 신. 굉장히 슬프고 가슴 아프더군요.

"저도 가장 애착 가는 대목이에요. 저와 허진호 감독님이 가장 심적으로 힘들어했던 대목이고요. 허 감독님이 2010년 즈음 연출하신 연극에 한 번 출연한 적 있어요. 그때 인연이 닿았죠. 개인적으로 열성 팬이었는데, '덕혜옹주'를 어렵게 찍게 됐다고 하시니 저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막걸리 한 잔 하면서요(웃음). 그때 허 감독님이 영친왕 사진이 저랑 닮았다며 웃으시더군요."

-최근에는 15일 개봉한 블랙코미디 영화 '7호실'에 출연하셨죠. 비디오방 관리인으로요.

"명필름 심재명 대표님은 제가 참 존경하는 제작자예요. 그 전에 '건축학개론'(2012) '카트'(2014) 때에도 시나리오를 보내주셔서 짧게 출연한 적이 있어요. 이번에도 관리인 역할 한 번 읽어봐달라 하시더군요. 흔치 않은 블랙코미디물인 게 매력적이었어요. 요즘 시대와 관련한 사회적 메시지도 담겨 있고요."

그렇게 배우로서 자리를 잡으니 경제 여건은 한결 나아졌다. 지독한 가난은 어느덧 물러났고, 세상도 예전보다 그를 반긴다. 하지만 여지껏 해결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다. 외로움이다. 미혼인 박씨는 지금도 혼자다. 미아동 수유리에 오래된 연립주택 하나 보유한 그는 현재 작은 아파트에서 월세를 주고 산다. 혼자 지내는 게 언제부터인가 습관으로 자리했지만 결혼에 대한 바람만큼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최근에도 선을 한 번 봤단다. 그런 그에게서 어딘지 쓸쓸한 기색이 묻어났다.

-잘 안 됐어요?

"전라도 광주에 사는 분이었어요. 학생들 가르치는 분인데, 좋았죠. 서로가 괜찮은 것 같아 몇 번 밥 먹고 연락도 주고받았는데, 아 이거 도통 만나기가 어려우니···. 너무 멀잖아요. 처음엔 시간을 어떻게든 내고 내려가려 했는데 영 어렵더군요. 스케줄 잡혀서 촬영장 가야 하면 내려가려다가도 또 못 내려가고."

-동종 업계에서 찾아보는 건 어때요?

"그래야 할까요?(웃음)"

-음, 이제 거의 다 왔네요. 궁금한 게 있는데, 27년간 연기하면서 주연 욕심은 없으셨어요? 배역이 좀 더 컸으면 좋겠다거나···.

"전혀요. 지금 상황 자체로 굉장히 감사한 걸요. 운 좋게 이 정도까지 온 것만으로도. 어떤 작품이든 불러주시기만 하면 저는 좋아요. 시나리오만 괜찮으면 다 오케이예요. 그러고 보니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2012)도 참 좋았어요. 동성애자 이야기이지만 인간에 대한 탐구도, 사회적인 메시지도 모두 좋았고요. '덕혜옹주' '카트' 같은 작품도 그런 부분이 매력적이이었죠."

-자, 어려운 질문일 텐데요. 배우님에게 조연 배우란 과연 어떤 의미인가요?

"하하, 크게 생각해본 적 없는데···. 어, 세상에 참 많은 사람이 있잖아요. 친구 집에 가면 집주인이 있고 손님들도 있고. 밖에 나가면 동네 사람들도 있고. 그냥 그런 사람들 아니겠어요.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일상적 인물들, 현실 속 인물들요. 저에게 조연 배우란 그런 것 같아요.(웃음)"

인터뷰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었다.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소탈한 이미지답게 박씨의 답변은 꾸밈 없고 소박했다. 그리고 겸손했다. 지나가다 누군가 '어, 그때 어디 나오지 않았어요?'라고 물어봐 주는 정도면 만족한단다. 그러면서 "지금처럼 평범히 늘 편안한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것이다. 부각되진 않지만 왜인지 자꾸만 친근한 배우. 제 소박한 삶의 가치관과 사는 방식을 일치시키는 배우. 박수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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