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스릴러 '기억의 밤' 칼 갈고 돌아온 장항준

  • 양유창
  • 입력 : 2017.11.3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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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앤-163] 장항준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계에 입문했습니다. '박봉곤 가출사건'(1996) '북경반점'(1999) 등 재치 있는 코미디로 호평받았습니다. 특히 '박봉곤 가출사건'은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성을 갖춘 작품이었죠.

2002년 장항준은 훗날 '판도라' 등을 만드는 박정우 작가가 각본을 쓴 '라이터를 켜라'로 감독으로 데뷔합니다. '주유소 습격사건'(1999) '신라의 달밤'(2001) 등을 집필한 박정우의 시나리오는 이번에도 사회 비판 메시지를 익살스럽게 녹여 재치가 넘쳤고 장항준은 파워풀한 연출로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라이터를 켜라'는 저평가된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하는데요. 김승우와 차승원의 과장된 동작들이 일부 관객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만 다음 장면을 예측하기 힘든 긴장감이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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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2003년 장항준은 '불어라 봄바람'을 만듭니다. '라이터를 켜라'에 이어 또다시 김승우에게 주인공을 맡기고 상대 여배우로는 당시 잘나가던 김정은을 캐스팅한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였습니다. 이 영화는 흥행이나 비평 모두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요. 영화계는 한 번 실패한 감독을 다시 부르지 않는 냉정한 곳이죠. 장항준이 이후 제대로 된 상업영화를 찍기까지는 무려 14년이 걸렸습니다(2008년 '음란한 사회'라는 작은 성인용 영화를 만들기는 합니다). 그동안 SBS '싸인'(2011) 등 드라마의 극본을 쓰고 연출했으니 완전히 공백기를 가졌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는 다시 영화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장항준 감독
▲ 장항준 감독

'코미디의 달인'이 새 영화에서 택한 장르는 스릴러입니다. '싸인' '유령'(2012) '쓰리 데이즈'(2014) '시그널'(2016) 등 스릴러 드라마 작가로 유명한 아내 김은희의 영향도 있겠습니다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싸인'을 연출한 뒤 스릴러에 애정이 생겼다고 말하고 있네요.

'기억의 밤'은 장항준이 1년 동안 꼬박 매달려 직접 쓴 시나리오를 연출해 만든 작품입니다. 어느 송년 모임에서 그는 "사촌 형이 집을 나갔다가 한 달 만에 돌아왔는데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는 말을 듣고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낯설게 보이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출발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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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가 가족이다 보니 가족이 가장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외환위기로 가족이 무너지던 시기인 1997년이 낙점됩니다. 영화는 1997년과 2017년을 독특하게 오가는 구성 속에 가족의 해체를 이야기합니다.

영화는 화목한 가족이 새 집으로 이사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삿짐을 나르는 유석(김무열)과 진석(강하늘) 형제는 우애가 깊어 보입니다. 하지만 유석이 납치된 뒤 19일 만에 돌아온 이후 진석은 유석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밤마다 집 밖으로 나가는 형을 미행해 보기도 합니다. 큰맘 먹고 엄마(나영희)에게 형이 달라졌다고 말했는데 그날 밤 엄마의 행동이 더 이상합니다. 혹시 진석만 빼고 식구들이 전부 외계인과 접촉이라도 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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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스러운 가족 이야기로 시작한 영화는 중반부터 사적 복수극으로 전환합니다. 영화의 제목이 '기억의 밤'인 이유는 이때부터 드러납니다. 1997년 그날 밤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와 그날 밤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남자가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기를 싹 빼고 미스터리를 유지하는 영화입니다. 비장미 가득한 엔딩으로 마무리하는 영화입니다.

김무열은 하이에나처럼 표변하는 모습으로 잔상이 오래 남을 강렬한 연기를 보여주고, 강하늘은 선한 이미지 뒤에 가려진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얼굴로 관객을 계속해서 미궁 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유도합니다. 두 배우의 호연과 긴박하게 전개되는 스토리 덕분에 '기억의 밤'은 올겨울 한국영화 다크호스로 급부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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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 년간 장항준 감독은 아내 김은희 작가에 가려져 그저 수다쟁이 방송인 정도로 인식돼 왔습니다. 방송을 자주 하는 감독치고 영화가 좋은 경우가 별로 없었기에 그의 신작에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억의 밤'을 보면 그가 제대로 칼을 갈고 돌아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빠르게 전개되는 흡입력 강한 스토리가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인데 스토리가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부분이 크게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론 곱씹어 보면 논리적 비약이 보이고 장황한 부분도 있습니다만 미스터리를 즐기는 데 거슬릴 정도는 아닙니다. 15년 전 데뷔작 '라이터를 켜라'보다 더 참신한, 마치 신인 감독의 데뷔작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14년 만에 비로소 영화감독으로 돌아온 장항준 감독이 관객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해집니다.

[양유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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