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지적·사상적 뿌리를 찾는 여행

  • 김기철
  • 입력 : 2018.01.0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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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설계자들-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김건우 지음, 느티나무책방 펴냄)

[김기철의 책으로 세상읽기-20] 2018년은 장준하 선생과 문익환 목사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1918년생인 장준하 선생과 문익환 목사는 1930년대 평양의 숭실중학교에서 친구로 만났다. 이때 같은 학교 친구 중에는 시인 윤동주도 있었다.

말하자면 1930년대 평양 숭실중학은 한국 현대사 속에서 도도히 흐르는 '저항정신의 탯자리' 같은 곳이다. 윤동주 시인이 일제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면 장준하 선생은 1960~1970년대 반독재 민주주의의 상징이었고 문익환 목사는 198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의 거목이었다.

저자 김건우 교수
▲ 저자 김건우 교수

김건우 교수는 세대적으로는 장준하 선생, 문익환 목사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학병세대'를, 지역적으로는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 출신자들을 '대한민국의 지적 설계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문제 의식이 담긴 책이 바로 '대한민국의 설계자들-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이다.

한국 현대 지성사의 한 흐름을 형성한 다석 류영모와 그 제자들. 가운데가 류영모, 오른쪽 끝이 함석헌.
▲ 한국 현대 지성사의 한 흐름을 형성한 다석 류영모와 그 제자들. 가운데가 류영모, 오른쪽 끝이 함석헌.

◆왜 '학병세대'와 '서북지역'인가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일제말 학병 모집 대상이 1917~1923년생 대학생이었다. 당시 조선인 대학생이 7200명 정도였으니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셈이다. 학병세대를 대표하는 문제적 인물 중 한 명인 '황용주' 평전을 쓴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는 "학병은 일제 말기 조선의 최고 청년 지식인 집적체였다. 엄연한 대일본제국의 지적 수준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던 집단이었다"고 주장한다. 해방을 맞을 당시 25세 전후였던 이들은 새로운 나라의 설계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지적역량을 지는 거의 유일한 세대였던 셈이다.

서북지역을 규정짓는 가장 큰 특징은 '변방성'이다. 평안도는 조선시대 내내 차별을 받던 지역이자 가장 가혹한 착취의 대상이었다. 조선의 변방이었기에 성리학적 세계관과 다른 세계관이 싹을 틔울 수 있는 텃밭이기도 했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조선말~일제시대 평안도를 선교사업의 최적지로 삼은 이유도 이런 지역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기독교의 선교 사업은 주로 교육사업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숭실학교 등 기독교계 사립학교도 이 지역에 집중됐다.

근대화 시기 도산 안창호 선생과 남강 이승훈 선생 같은 사상적 거두뿐 아니라 이광수, 김동인, 주요한, 전영택, 김억, 김소월처럼 한국 근대 문학의 뿌리들 역시 대부분 서북지역 출신이다. 이 역시 서북의 '변방성'과 관련이 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함민복 시인의 시처럼 '변방성'이 '창조성'의 기반이었던 셈이다.

신영복 선생도 책 '담론'에서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다.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합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결코 창조 공간이 되지 못합니다. 중심부보다 더 완고한 교조적 공간이 될 뿐입니다."

조선의 패망으로 '한양'이라는 중심부가 무너졌기에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는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이로 인해 서북의 변방성은 창조성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서북의 지역적 특성은 이 지역 출신 학병세대의 향후 인생의 행로에도 직접 영향을 준 듯하다. 장준하부터 함석헌, 류영모, 김재준, 강원용, 김교신, 장기려 등 서북 출신 학병세대들 모두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했지만 대한민국의 주류를 형성했다기보다는 '대안세력'으로서의 의미와 영향력이 훨씬 컸다.

◆대한민국 우익의 진짜 뿌리

장준하 선생은 지금은 주로 진보적인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지만 '청년 장준하'는 '반공주의'와 '민족주의'로 무장한 대표적인 우익 인물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해 38선을 넘었을 때도 장준하 선생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으로서 분단이 굳어진다는 논리는 찬성할 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1960년대 중반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1967년에 쓴 글에서 장준하는 이런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우리는 지금 북의 공산주의와의 대결하에 있다. 북괴의 공산 독재를 공개 비판할 충분한 환경과 조건을 우리가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공산주의를 배격할 수 있는 민족적 명분을 상실할 우려도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 이념과 민주주의 체제를 분할된 채로나마 남쪽의 이 영토 위에 아름답게 구현시킴이 가장 시급한 민족적 과제이다."(35쪽)

장준하 선생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50세 이전 자신의 세계관의 한계를 깨고 경계를 확장했다는 점이다. 보통 나이가 들면 보수화되기 마련인데 장준하 선생은 반대의 길로 나아갔다.

확고한 우익 반공주의자였던 장준하 선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 김건우 교수는 "백기완과 6·3세대들이 견인한 것으로 보인다"며 "장준하는 같은 우익 학병세대의 감각으로부터 떨어져 혼자 멀리 나아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변화를 통해 장준하는 반독재 전선의 가장 첨예한 자리로 나오게 됐고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장준하 선생이 '반독재'의 상징적인 인물이 된 것은 그 대척점에 '박정희'가 있었기 때문이다. 1917년생인 박정희는 장준하와 거의 같은 세대 인물이지만 중요한 선택의 순간, 장준하와 늘 다른 선택을 해왔다.

장준하는 학병으로 끌려갔지만 탈출해 독립군에 합류한 반면, 박정희는 일본군 육사를 졸업해 만주군 간부로 해방을 맞았다. 장준하는 철저한 '우익 반공주의'였지만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담했다 이 사실이 적발되자 다른 가담자들의 이름을 대고 위기에서 벗어났다. 장준하는 4·19 혁명 후 '사상계'를 통해 경제 계획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박정희는 이를 뒤엎는 쿠데타를 자행했다.

장준하 선생의 '평생 친구'였던 김준엽 고려대 총장은 지난 1993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끄러운 것은 광복 후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며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가난에 허덕였으나 친일파들은 일제하에서 쌓은 배경으로 계속 잘살았습니다. 이런 풍토에서 누가 역사를 두려워하고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정의와 도덕을 생의 지표로 삼겠습니까, 민족을 배반한 것이 죄가 안되고 부끄럽지 않은 나라에서 다른 무엇이 죄가 되겠습니까."(261쪽)

장준하 선생과 김준엽 총장은 자신들이 정통 민족주의자라는 자부심을 공유했다. 자신들이 진짜 '우익'의 뿌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평양 숭실학교 시절의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왼쪽부터)
▲ 평양 숭실학교 시절의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왼쪽부터)
현재 대한민국의 우파들이 '반공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우익의 뿌리'를 '이승만과 박정희'로 국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김건우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우익의 뿌리는 깊고 튼튼하다" "반공과 산업화로 대표되는 이승만·박정희가 아닌 다른 뿌리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책은 2017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2018년 올해야말로 이 책을 읽기에 맞춤한 해다. 앞서 말한 대로 올해는 장준하 선생과 문익환 목사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고 대한민국 헌법이 만들어진 지 70년이 된 해이다. 더구나 올해 '헌법개정'이라는 새로운 대한민국의 설계도가 그려질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은 우리는 과연 어떤 나라를 설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영화 '1987' 속 공간 이해하기

영화 '1987'에는 세 곳의 종교적 공간이 등장한다. 재야운동가인 김정남 씨가 수배 중 숨어 있던 사찰과 향린교회, 그리고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실상을 공개했던 명동성당이다. 독재시대 종교시설은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중요한 활동공간이자 은신처였다는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책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에는 왜 교회나 성당이 대한민국 민주화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그 기원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도 담겨 있다.

한국의 기독교는 '반공' '보수주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 안에는 다른 흐름이 있다. 그 중심에는 '한신계'가 있다. 1940년 김재준이 설립한 조선신학교가 그 뿌리다. 조선신학교는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의 전신이다. '한신계'라고 하면 설립자인 김재준을 포함해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이우정 강원용 등 '김재준과 그 제자들'을 포함하는 용어다.

한신계의 리더인 김재준은 함경도 경흥 출신이다. 출신지가 김재준의 종교적 성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후반 외국의 개신교 단체들은 조선에 대한 선교를 시작할 때 '선교지역 분할 협정'이라는 것을 맺는다. 이에 따라 서북지역은 미국의 북장로교가 맡고 함경도와 간도의 관북지역은 캐나다 장로회가 맡게 된다. 김재준은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활동으로 기독교도가 되는 것이다.

1952년 김재준은 한국 장로회 총회에서 파직되는데 이에 캐나다 연합 교회는 김재준을 중심으로 새로 분립한 기독교장로회(기장)의 강력한 후원자가 된다.

영화 '1987'에 나오는 향린교회는 바로 김재준의 제자인 안병무가 세운 교회다. 김건우 교수는 안병무의 신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학도 '상황'이 던지는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어야 하며, 한국 사회 상황에서 요청되는 '한국 신학'이란 결국 민중이 처한 고난과 그 고난을 이겨내는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민중신학'이어야 한다고 안병무는 생각했다. 억눌린 자를 중심에 놓는 '민중신학'은 안병무의 서울대 사회학과 후배인 한완상의 '민중 사회학'에도 결정적 영향을 준다."(184쪽)

동성신학교 시절의 김수환 추기경(왼쪽)과 지학순 주교.
▲ 동성신학교 시절의 김수환 추기경(왼쪽)과 지학순 주교.

명동성당이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가 된 데에는 김수환 추기경과 지학순 주교의 영향이 컸다. 김 추기경과 지 주교는 1936년 서울 혜화동 동성상업학교 내 소(小)신학교 입학동기다. 해방 후 이들은 1950년 대(大)신학교에서 다시 만났고 평생 친구로 지냈다.

한국의 민주화를 주도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사실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지 주교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게 되는데 구속 전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비난하는 '양심선언'을 했다. 수사 기관의 고문 조작에 대비해 허위진술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지 주교가 '양심선언'을 최초로 한 것이다.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과 구속이 있은 지 2개월 후 지 주교가 활동했던 원주교구에 젊은 사제들이 모여 정의구현사제단을 출범시켰다.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광주항쟁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특별미사를 집전한 뒤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에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게 했다. 1987년 투쟁의 기폭제였다.

이 책에는 우리가 몰랐던 '거인'들의 소소한 일화들도 가득하다. 그중 하나. 김수환 추기경이 1940년 동성상업학교 소신학교 졸업반 시절 '수신' 과목 시험을 봤다. 수신 과목은 지금으로 치면 '도덕' 과목이다. 당시 시험 문제가 '황국신민으로서의 자세'에 대한 논술이었던 것 같다. 김수환 추기경은 답안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다."

[김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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