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 호주오픈 4강 열광이 '국뽕'이 아닌 이유는 이것

  • 정지규
  • 입력 : 2018.01.3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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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그랜드슬램 4강진출의 의미

[쇼미 더 스포츠-74] 한국 테니스의 희망 정현이 시즌 첫 그랜드슬램 대회인 호주오픈에서 4강 진출이라는 빛나는 금자탑을 세우며 지난 일요일 귀국했다. 그의 말대로 지난 2주간의 여정은 정현 본인에게나 많은 국민에게 한편으로는 위대했고, 또 한편으로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정현이 공항에서 환영받던 그 시간 호주오픈 결승전이 열리고 있었다. 준결승에서 정현에게 기권승을 거둔 '황제' 로저 페더러는 마린 칠리치와의 풀세트 접전 끝에 3대2로 승리하며, 대망의 그랜드슬램 20회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다른 많은 이들도 느꼈겠지만 페더러가 우승 후 인터뷰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끼는 장면은 매우 생소하면서도 또 인상적이었다.

로저 패더러(왼쪽)와 정현 선수/사진=AP연합
▲ 로저 패더러(왼쪽)와 정현 선수/사진=AP연합

사실 세계 최고의 스포츠스타 중 하나이자 커리어 그랜드슬램은 물론 호주오픈 최다 우승 타이 기록을 세운 백전노장 페더러에게 통산 20번째 그랜드슬램 우승은 벅차오르는 감정보다는 여유와 넉살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황제는 계속해서 흐느꼈고, 팬들은 그런 황제를 위해 아낌없이 박수를 쳐줬다. 아마도 보는 이에게는 쉬워 보일 수 있겠지만 황제에게는 이 승리와 우승이 너무나 힘든 여정이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었던 것 같다. 그만큼 테니스 선수들에게 메이저대회는 일반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꿈의 무대'다.

호주오픈, 프랑스오픈, US오픈, 윔블던 등 4개 메이저대회를 흔히들 그랜드슬램대회라고 표현한다. 이 4개 메이저대회는 우승상금만 30억원대이며, 입상자에게는 최고의 명예가 뒤따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정현만 해도 4강 진출에 따른 상금이 7억원이 넘었다. 이 정도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대회 우승상금 수준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이번 정현의 선전으로 이미 많은 이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정현의 이번 호주오픈 4강 진출에 대해 어떤 이들은 올림픽 금메달에, 또 어떤 이들은 2002년 축구 월드컵 4강에 비유하기도 한다. 맞을 수도 있고 좀 과장 또는 과소 평가된 비유일 수도 있다. 각각의 스포츠 종목들 가치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비유가 사실 큰 의미가 없어도 보인다. 하지만 희소성이라는 가치로 볼 때 정현의 4강 진출은 정말 엄청난 성과다. 얼마나 엄청난 성과인지에 대해 한번 객관적인 데이터를 통해 분석해 보겠다.

이번 호주오픈을 제외하고 지난 10년간 4대 그랜드슬램 대회의 4강 진출자는 총 30명이었다. 4개 대회가 10년 동안 열렸으니 산술적으로 최대 160명의 4강 진출자가 있어야 하지만 단 30명만이 4강의 자리를 밟았다. 중복 진출자가 있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30명은 매우 적은 수다. 그 이유는 10년 이상 세계 테니스를 지배하고 있는 빅4의 굳건함에 있다. 160명의 4강 진출 정원 중 소위 빅4인 페더러(26회), 라파엘 나달(21회), 노바크 조코비치(28회), 앤디 머리(21회)등 단 4명이 무려 96번이나 4강에 올랐다.

*위 4강 진출 횟수는 최근 10년간의 성적이며, 통산 4강 진출 횟수는 페더러(42회), 나달(26회), 조코비치(31회), 머리(21회)로 빅4 중에서도 페더러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 빅4의 4강 진출 확률은 정확히 60%다. 조금 과장하면 지난 10년간 메이저대회 4강 진출자 중 2.5명은 빅4로 채워지고 나머지 1.5명 정도만이 다른 선수들로 채워진다는 의미다. 여기에 스타니슬라스 바브링카(9 회), 토마스 베르디흐(7회), 조윌프리드 총가(6회) 등 빅4 바로 밑에 급 선수들을 포함하면 쏠림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또 그랜드슬램 4강 진출자 30명 중 2회 이상 4강 진출 경험자는 단 17명으로, 1번만 4강을 경험한 선수가 13명이다. 이 모든 게 지난 10년 동안 누적해서 발생한 수치다. 메이저대 회 4강에 단 한 번이라도 오르는 게 그만큼 힘든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특이한 점이 있는데, 지난 10년간 4대 메이저대회 4강 진출자 중 시드 배정을 받지 못한 선수가 4강에 진출한 예는 단 3명뿐이었다. 그중 2명은 2008년 윔블던 4강 진출자인 마라트 사핀과 라이너 슈틀러였는데 당시 그들의 세계랭킹은 75위, 94위였다. 하지만 사핀은 2000년 세계랭킹 1위, 슈틀러는 2004년 세계랭킹 5위까지 올랐던 랭커들로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 당시 세계랭킹이 처져 있었을 뿐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임에 틀림없었다. 2008프랑스오픈 4강 진출자인 가엘 몽피스 또한 이들만큼은 아니지만 대회 전에 이미 20위권대 순위를 경험해본 선수였다.

*테니스 그랜드슬램대회는 본선에만 128명이 출전해 2주 동안 치러지는 그야말로 거대한 대회다. 이 중 상위 32명은 시드 배정을 받아 그러지 못한 선수들에 비해 훨씬 수월한 대진을 치르게 된다.

정현 선수/사진=AP연합
▲ 정현 선수/사진=AP연합

이들을 제외하고 시드 배정을 받지 못한 선수가 4강에 든 예는 2009~2017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호주 오픈에서는 시드 배정을 받지 못한 선수가 2명이나 4강에 들며 소위 '언더도그'의 반란을 일으켰다. 앞서 말했듯이 시드 배정을 받지 못한 선수가 4강에 든 것은 2008년 윔블던과 프랑스오픈 이후 10년 만이며 그 두 명은 카일 에드먼드(49위)와 정현(58위)이다. 정현은 몽피스 이후 10년 만에 가장 낮은 세계랭킹 순위로 그랜드슬램 4강에 이름을 올린 선수가 됐다.

정현의 그랜드슬램 4강의 가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난 시간(지난글 링크)에 언급한 바 있는 동세대 정현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25세 미만 선수들 중에서 메이저 4강을 경험한 선수는 정현을 제외하고 에드먼드와 도미니크 팀 단 둘뿐이다. 세계랭킹 4위로 ATP투어 1000을 우승한 알렉산더 즈베레프도, 20대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닉 키리오스도 메이저대회 8강이 최상의 성적이었다. 더군다나 정현은 에드먼드나 팀보다도 두 살 이상 어리다. 이 어려운 일을 정현이 해낸 것이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최근에 정현의 나이(21세)보다 어린 나이에 메이저대회 4강을 밟은 선수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정현은 빅4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 정현은 나달(19세)과 조코비치(20세)보다는 많지만 머리(21세)와는 같은 나이에, '황제' 페더러(22세)보다는 어린 나이에 그랜드슬램 4강을 경험했다.

이번 그랜드슬램 4강 진출로 정현은 더 이상 유망주가 아니며, 이미 세계 테니스계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선수가 됐다. 이는 단순히 감성적인 표현이나 소위 '국뽕'이 아니며, 최근 10년간의 데이터가 보여주는 사실이다. 세계 테니스계가 정현에 열광하며 주목하고 있는 이유다.

[정지규 스포츠경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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