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박종철父 연기한 김종수 "촬영날 하늘이 도왔죠"

  • 김시균
  • 입력 : 2018.02.01 15:01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나는 조연배우다-6] 지난해 2월 21일 경기도 연천군에 자리한 임진강 유역. 배우 김종수(53)는 살얼음을 헤치며 저벅저벅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영화 '1987'(감독 장준환)에서 박정기가 죽은 아들 박종철의 뼛가루를 흘려보내려는 바로 그 장면을 찍기 위해서였다. 최저기온 영하 10도. 주위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촬영진, 제작진, 연출진 모두 말 없이 김종수만 지켜보고 있었다. 예정에 없던 눈발까지 흩날리며 임진강 살얼음 위엔 금세 흰 눈이 소복이 뒤덮였다. 앞서 날린 회색빛 가루들의 일부가 그 위로 내려앉아 눈발과 뒤엉킨 채였다. 그는 비틀대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무릎까지 차오르는 강물을 헤치면서. 그렇게, 질퍽해진 가루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그는 통곡했다. "철아…와 못 가고 있노. 내 새끼 와 못 가노! 철아, 잘가그래이. 철아,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슬픔이 물성(物性)을 지녔다면 바로 이런 장면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는지. 지난해 한국영화를 통틀어 이 정도의 감정을 찰나에 발산해낸 경우는 없었다. 실제로 그가 연기한 저 짧은 순간은 '1987'에서 가장 참혹했던 장면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경이로운 것은, 이것이 김종수의 첫 촬영분이자 영화 제작 과정을 통틀어 첫 테이크였다는 사실이다. 칼바람 나부끼는 지난달 17일 서울 충무로의 한 찻집. 원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그에게 임진강 장면부터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배우 김종수 / 사진=양유창 기자
▲ 배우 김종수 / 사진=양유창 기자

-지난해 한국영화 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습니다.

"후배들이 영화 보고 연락을 많이 주더군요. '많이 울었어요, 형 때문에…'라며. 사실 제가 한 건 별로 없어요. 감독님이 만듦새나 톤 조절을 워낙 훌륭하게 해놓으셨으니까요."

-당시 현장은 어땠습니까.

"그날은 실제로 누군가가 도와주신 것 같아요. 저에겐 첫 촬영이었고, 현장의 모두가 잔뜩 긴장한 상태였지요. 어제 가만히 생각해보니, 마치 어마어마하게 큰 세트장에 들어온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추위도 추위였지만 눈이 올 거라 아무도 예상을 못 했어요. 애초엔 뼛가루가 얼음에 뭉쳐 있으면 그걸 움켜쥐고 흩뿌리는 신이었어요. 강풍기를 틀어놓고서요. 그랬는데 리허설 직후에 갑자기 눈발이 날리더군요. 금방 그칠 눈이 아니었어요. 금세 바닥이 하얗게 되니 감독님이 잠시 고민하시다 저를 부르더군요. '눈은 떨어지는데 뼛가루가 강풍기에 날린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하긴 어렵겠어요. 강물에 흘리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다른 대안이 없었어요. 저도 경황이 없었을뿐더러 모든 스태프가 그 추위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해보겠습니다'라고 했죠."

7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 7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1987'에서 배우 김종수는 故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씨로 분했다. 임진강에서 죽은 아들의 뼛가루를 뿌리는 이 장면은 '1987'의 가장 슬픈 장면으로 손꼽힌다. /사진제공=CJ E&M

-첫 테이크가 영화에 쓰인 걸로 압니다.

"감독님께서 찍으실 때 감정적 증폭을 그리 원하진 않으셨던 것 같아요. 제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샷을 여러 개로 나누고 그러고 싶진 않으셨던 거죠. 그래서 처음에 윤상삼 기자(이희준)의 시선으로 멀리서 들어가도록 찍어주셨던 거예요. 대신 감독님은 박종철 아버님이 한 말이 그대로 들리기를 원하셨어요. '철아, 잘가그래이. 철아, 아버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이 대사가 장면에 잘 붙었으면 좋겠다고요. 그래서 몇 번 다시 찍긴 했는데, 생각보다 잘 안 되더군요. 저도 모르게 감정을 꾸미게 되더라고요. (감독님이) 첫 테이크 감정이 가장 좋았다고 하셨던 건 아마도 그래서일 거예요."

-박정기 선생님 역은 어떻게 맡게 되신 건가요.

"조감독을 비롯해 몇몇 분들이 '아수라'(2016)에서도 함께 했어요. 그분들이 저를 추천해준 거죠(김종수는 '아수라'에서 박성배 시장의 심복 은충호 기획실장을 연기했다). 박종철 열사 아버지 역으로요."

배우 김종수는 김성수 감독의
▲ 배우 김종수는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2016)에서 부패 시장 박성배(황정민)의 심복 은충호 기획실장을 연기했다. /사진제공=CJ E&M

-부담은 없으셨어요?

"부담스럽다마다요. 그분의 감정을 어떻게 내가 표현해낼 수 있을까 싶더군요. 그래서 감독님한테 '다른 배역 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드렸죠. 그 나이대에 안유 보안계장이 있어요. 캐스팅 정해지지 않았으면 안 계장이 좀 더 편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그러시더군요. '저도 열어놓고 생각할 테니, 선배님도 열어놓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어요.' 그 순간 느꼈죠. 아, 딴 거 안 주시겠구나(웃음)."

-사전에 어떤 준비를 하셨나요?

"대본 리딩 전에 스케줄부터 나왔어요. 해당 장면은 크랭크인 전에 찍은 거예요. 일주일을 끙끙 앓았어요. 어떻게 이걸 해야 하지. 머릿속으로 계산이 안 되더군요. 그저 멍한 거에요. 그래서 그날 '누군가 도와주시겠지' 하는 심정으로 임했어요. 연극인들 말마따나 '그래도 막은 오른다'고 하잖아요(웃음). '1987'이 워낙 우리 근현대사의 중대한 사건을 다룬 영화이고, 제가 박종철 열사 세대이기도 하고, 적진에 돌을 던지거나 투쟁하진 않았지만 그런 저 또한 부채의식을 지닌 세대이기에 잘하고 싶다는 욕심 만큼은 컸어요."

-이상하리만큼 경건한 느낌이 드는 장면이더군요.

"실제로 현장이 그랬어요. 저를 포함해 촬영하는 분들이 같이 그 추운 물속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었어요. 춥다고 찡그릴 만도 한데, 어느 누구 하나 미동 없이 초집중을 하는 겁니다. 여기 있는 분들이 이 영화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는지를 알겠더군요. 자연히 '아, 이거 진지하게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설 수밖에요. 박종철 열사 아버지 박정기 선생님과 관련한 옛 기사를 사전에 많이 찾아봤어요. 정보당국의 외압, 강압, 회유 같은 작업이 빈번했다고 하더군요. 당신으로서는 누구한테도 속 시원하게 본인 감정을 털어놓고 풀어놓을 시간이 없으셨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잘가그래이' 그 말이 자연스럽게 터져나오신 건 아닐까 생각했지요. 당시 임진강 촬영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공기 자체가 남달랐어요. 어떤 면에선 그 '공기'가 다 해준 것 같기도 해요."

배우 김종수 / 사진=양유창 기자
▲ 배우 김종수 / 사진=양유창 기자

김종수는 지난해 3월 부산에 내려갔다.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 씨를 직접 뵙기 위해서였다. 촬영 이후 간 이유를 묻자 그는 "실제로 뵈면 도무지 연기를 못할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런데 박씨를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허리를 다쳐 요양병원에 계시더군요. 컨디션이 좋지 않아 뵙기 어렵겠다고 병원에서 알려왔어요." 첫인사를 드릴 기회는 9개월이 지나서야 찾아왔다. 부산에 계신 어머니가 몸져누워 응급실에 계시다는 연락(그의 모친은 지난해 12월 30일 소천했다)을 그해 크리스마스에 가족에게서 받은 것이다. 이튿날 그는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간다. 그렇게 밤새워 어머니를 간병했다. 다행히 '1987' 개봉일인 27일, 어머니의 상태는 한결 호전됐다. "20~30분이면 박정기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갈 수 있는 거리더군요. 어머니께서도 마침 편안히 주무시고 계셨고요. 동생에게 자리를 맡겨 두고서 한 시간 반 정도만 뵙고 와야겠다 싶었지요."

-그렇게 결국 만나게 됐군요.

"아버님은 제가 누구신지 그 당시 모르셨어요. 간호사들도 보통 친인척이나 지인들만 오는데, 제가 찾아오니 '누구시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여차저차해서 왔다고 정황을 말씀드렸죠. 간호사들께 '어떠시냐'고 물어봤어요. 그러니 손가락으로 '세모' 표시를 해주시대요. 완전히 안 좋으신 것도 아닌데 여전히 아프시다고요. 아버님이 치매 끼가 있으셔서 혹여나 못 알아보실까 본인들도 가슴이 아프대요. 어쨌든 그렇게 첫인사를 드리러 병실에 들어갔어요."

-무슨 인삿말을 건네셨나요.

"'아버님, 제가 1987이라는 영화에서 아버님을 연기한 배우입니다. 오늘이 개봉일인데 어머님 뵐 일이 있어 부산에 온 김에 아버님께 인사 드리는 게 도리일 것 같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날 아버님 컨디션이 좋으셨고, 정신도 대화가 가능하실 만큼 맑으셨어요. 참 감동적인 것은, 아버님이 제 어머님 어서 나으시길 바란다며 두 손 모아 기도를, 기도를 해주시더군요. "

-어떤 대화가 오가셨을지 궁금하네요.

"그리 많은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어요. 27일 그날 박종철 열사의 동문들이 부산 롯데시네마에서 단체관람을 하기로 하셨나봐요. 박종철 어머니 연기하신 분이 제 실제 형수님인데 저녁에 시간 되면 저더러 저녁 7시에 오라고 하더라며 그런 소식을 전해드렸지요. 그리고 극 중에 박종철 열사의 사진을 배우 여진구 씨 사진으로 썼는데, 실제 아드님하고 참 많이 닮았다고도 말씀드렸어요. 아버님이 정말 그렇다며 밝게 웃으시더군요. 예전에 민주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찍는다고 진주에서 한 배우가 나를 보러 온 적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 배우도 아들을 꼭 닮았더라며… 그러면서 아버님이 식사하시는 것도 가만히 앉아 바라보았지요. 문득 제가 해드릴 건 없고 아버님 발톱 모난 곳을 좀 깎아드려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아버님 발톱이나 좀 깎으십시다' 했죠. 어르신들 발톱이 보통 기름기 하나 없고 그렇잖아요. 발톱이 막 부서질 것 같더라고요. 아버님이 웃으시며 '잘못하면 피 철철 난다' 그러시대요. 그러면서 한쪽 발을 쓱 내미셨어요. 그렇게 한쪽 발을 깎아드렸지요. 그날 오히려 제가 더 고마웠어요. 제가 위로를 드릴 입장은 아니어서 '아버님, 참 고맙습니다' 인사드리고 병실에서 나왔어요."

배우 김종수 / 사진=양유창 기자
▲ 배우 김종수 / 사진=양유창 기자

김종수는 부산 태생이다. 학창 시절, 새처럼 작은 체구였던 그는 말 없는 조용한 소년이었다. 유난히 열등감이 많았다고 했다. 수업 시간에 발표한다고 손 한 번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썩 잘한 것도 아니다. "신체도 작고 공부도 고만고만 하고… 자신감을 가질 만한 것이 없었어요. 동기들 얘기 들어봐도 그냥 조용한 녀석이었다고 하대요(웃음)." 그러던 그가 무대를 처음 마주한 건 고교 2학년 때. 부산 시민회관 2층에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본 것이다. "뇌리에 강렬한 무언가가 내리꽂힌 순간"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정작 재수 끝에 울산대에 합격하고선 그가 택한 전공은 화학이었다.

-화학과라니 뜻밖인데요?

"뜻밖이긴요. 그 시절엔 뭘 먹고사는지가 급선무잖아요. 대입 상담할 때 고교 담임이 그러셨어요. 무조건 먹고사는 길로 가라고요. 저 때만 해도 울산대가 종합대가 아니라 공과대였어요. 울산에 현대 석유화학단지도 있고 하니 먹고살 수는 있을 거라고 그러시대요. 그렇게 화학과를 거의 지정해주셔서 '네' 하고 갔죠. 근데 막상 가보니 수학이 참 안 맞는게… 사실 어떻게 졸업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허허."

-그때부터 자취를 한 거죠?

"그렇죠, 대학 간다고 처음 집을 떠난 거니까. 그때 한번은 시내를 걷다가 극단 단원모집 포스터를 지하도에서 봤어요. 일전에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면서 느낀 감흥이 그때 막 되살아나더군요. 그래서 포스터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죠."

-오라고 하던가요?

"네, 동네 도시락 공장 창고로요. 가보니 젊은 분이 있어요. 제가 재수했으니 스물한 살 때였으니까, 그 형이 네 살 위인가 그랬죠. 부산대 사회학과 극회 출신인데, 직접 울산에서 극단을 만들고 첫 작품을 올리려 한다고 그러더군요. 그 극단이 '고래'예요. 연극 제목은 '에쿠우스'였어요. 당시 1985년이었으니까 제 데뷔작이지요. 근데 바로 저한테 주인공을 해달라니 참…"

-처음 본 친구한테 주인공을요?

"그 때 제 몸무게가 51kg였어요. 작고 깡마른 어린 친구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배역이 17세에 약간 종교적 압박을 느끼고 성적인 분위기가 묻어나야 한대요. 되게 예민한 '알랭'(그의 인스타그램 아이디는 이 이름과 데뷔년도를 딴 alrun85다)이라는 캐릭터였어요."

-오디션은 없었어요?

"그동안 뭘 해봤냐길래 '고교 때 웅변 한 번 해봤어요. 그것 뿐이에요'라고 했죠. 그 형이랑 뒷동산 가서 소리 몇 번 지르고 오고 그랬어요. 그러다 며칠 지나니 대본을 툭 던져주시던데요?(웃음) 생각보다 분량이 많더라고요. 저는 완전 처음인 데 말이죠. 형도 내심 걱정이 많아 보였어요. 그래서 저한테 '구라'를 많이 쳤죠."

-'구라'라고 하시면?

"대본을 통째로 탈탈 외우라는 거예요. '서울 가면 전무송, 이호재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계신데, A4 용지 한 장은 한 호흡에 다 외운다. 배우는 그래야 한다'면서요."

-그래서 외웠어요?

"어쩌겠어요. 엄청나게 연습했죠. 형이 시킨대로. 그 형한테 참 고마웠던 게 여러 디렉션을 줬지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는 식이기보다는 '어떤 신이 참 자연스럽다, 다시 한번 해봐'라는 식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다시 하면 '너 앞서 한 거랑 지금 한 거랑 어떤 것 같다, 근데 뒤에는 좀 이상하다. 꾸민 것 같다'는 식으로 바로바로 피드백을 주셨죠. 그때 중요한 걸 배웠어요. 무언가를 복제하려 하고 몸이 먼저 반응하려 들면 이상해지는구나, 꾸미려고만 하면 안 되는구나."

-부모님은 지지해 주셨나요?

"고교 때 아버지한테 연극 해보고 싶다고 말씀 드려본 적 있어요. 그때 '야구빠따' 들고 대로하셨죠. 그래서 10년 넘게 울산서 부모님 몰래 했어요. 제 연극 보러 오신 적이 단 한번도 없으세요. 아버지가 제 영화 극장에서 본 게 '1987'이 처음일 정도니까요. 아마 어머니는 그 당시에도 알고 계시긴 했을 거예요. 아들 자취방에 이따금 오가셨으니까요. 대학생 때 제가 흰 양말 신고 다녔을 거 아니에요. 극단 갔다가 집에 오면 양말 바닥이 새카맣게 변해 있어요. 한번은 같이 오신 지인 아주머니가 '아들래미 양말이 어찌 그리 시커멓노' 하세요. 그럼 어머니가 '연극 한다고 지랄한다 안카나' 그러시는 거죠. 그러다 한번은 경남연극제를 거제에서 한 적이 있는데 제가 최우수연기상을 타서 신문에 작게 실린 적이 있어요. 그땐 두 분 다 좋아하셨던 걸로 기억해요."

배우 김종수의 20대 연극인 시절 모습. /사진=김종수 인스타그램
▲ 배우 김종수의 20대 연극인 시절 모습. /사진=김종수 인스타그램

김종수는 그렇게 20년 넘게 울산에서 연극인으로 살았다. 그간 올린 작품만 70여 편. 지방 연극계가 그러하듯 환경은 열악했다. 초창기엔 마땅한 공연장도 없었다. 그래서 인근 예식장을 빌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주례석 계단에 합판을 깔고 조명을 설치해 임시 무대를 만드는 식이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열정' 하나로 버텨낸 날들이었다. 하지만 생계 해결만큼은 난망했다. "20년 동안 연극하며 출연료로 받은 돈이 다 해도 200만 원 정도"라고 했다. "지방인지라 공연 한 번 올려도 길어야 3~5일이에요. 그래도 연습은 한두 달 해야죠. 밥벌이가 불가능해요. 피땀 흘려 하는 일인 데도요. 이게 과연 프로페셔널한 일인가 회의가 밀려든 적도 많았어요.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건데 꼭 돈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 없이 지낸 세월들이죠." 그렇게 자연히 부업을 뛰었다. 울산 KBS에서 2001년부터 10여 년 간 방송일을 했다. 지방 성우로서 비디오 자키를 했고, 문화코너 리포터를 거쳐 MC로 고정수입을 얻기도 했다. 그러다 2007년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영화계에 첫 발을 디딘다. 연극 인생 30년 만의 일이었다.

-'밀양'은 어떻게 찍게 된 거예요?

"지금 배우협회가 서울에 있잖아요. 울산지부가 처음 생기고 나서 그해 공지가 하나 떴어요. 이창동 감독님이 연극협회를 수소문하고, 연출부들이 울산에서 돌아다니고 있는데 배우를 구한다고요. 서울까지 오라고 했으면 아마 안 갔을 거예요. 마침 울산 후배가 하는 무용원에서 오디션을 본다고 하대요. 기준이 있었어요. 사투리 돼야 하고, 잘생기면 안 되고. 기준이 딱 맞잖아요. '가보자 가보자' 한 거죠. 크래딧에 제 이름 한 줄만 올라가도 이야! 참 좋겠다! 싶었죠(웃음)."

-오디션은 몇 명이나 봤어요?

"열댓명 정도요. 1차는 일단 통과했어요. 그러니 부산 수영만 세트장에서 2차 오디션 보러 오래요. 거기 간 사람이 저 포함해서 네 명이에요. 그중 한 명이 이윤희 선생님이고요. 제가 먼저 하고 후배가 보고 나왔어요. 그 후배가 연극배우 오만석(52·74년생 배우 오만석과 동명이인)이에요. 그런데 히야, 만석이가 잘했어요. 감독님이 '다들 멀리서 오셨는데 기다렸다가 저녁 먹고 가는 거 어떻냐'고 하셨어요. 마다할 이유가 없죠. 제가 만석이한테 그랬어요. '야, 만석아 감독님이 너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그러나보다. 넌 됐고 우린 안 됐나보다.'

-2차 때는 어떤 연기를 선보였나요?

"'밀양'에서 택시기사가 하는 대사가 있어요. 다리 밑에 택시 세워놓고 잡스러운 말을 늘어놓죠. 감독님이 그걸 하는 절 보더니 '좋은데, 좀 길다'고 하시대요. 그래서 다시 했어요. 끝나니 제가 볼 땐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러시더라고요. 앞에 보다 1분이 줄었다고요. 영화에서 1분은 대단히 긴 시간이거든요. 그리고 상황을 하나 제시해 주셨어요. '당신이 어느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데 당신 부인이 아는 지인과 바람이 났다. 그런데 그걸 그 사람은 몰라. 근데 통화를 해야 돼. 기분이 어떨 거 같아요?' 죽여버리고 싶을 테죠라는 친구도 있었겠죠. 전 그냥 슬플 것 같다고 대답했어요."

-그날 저녁 자리에선 무슨 얘기를 했나요?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했죠. 배용균 감독님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이 이창동 감독님 영화인 줄 착각한 거예요. 감독님 면전에다 대고 그 영화 잘 봤다고 한 겁니다. 이 감독님이 특유의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그렇게 훌륭한 영화를 만들진 않았고요.' 그때 아이고, 내가 쐐기를 박는구나. 아주 망할라고 작정을 했구나, 망했구나 싶었어요(웃음)."

-자폭하셨군요.

"그런데 신기한게요. 한참 뒤에 연출부에서 연락이 오더라고요. 대전에 일이 있어서 기차 타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어요. 배역이 바뀐 게 있는데 더 크고 좋은 배역이라고, 그걸로 되셨다고요. 그게 '밀양'에서 부동산 신 사장이에요. 그 영화 크레디트에 제 이름이 열 번째인가 나오더라고요. 아, 얼마나 좋든지…."

그가 영화에 출연한 건 극단 데뷔 22년 만이다. 이렇게만 보면 그와 영화와의 인연은 다소간 멀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건 몰라서 하는 소리다. "사투리가 심해 영화배우는 생각도 안 해봤다"지만, 그는 사실 소싯적부터 대단한 영화광이었다. 1980년대 초 대학생 시절, 하루 종일 비디오 보는 게 낙이었다. 자취방엔 TV가 없었던지라, 비디오방에서 친구 셋과 기기 일체를 대여했다. 한 명은 TV를, 한 명은 비디오데크를, 그리고 한 명은 비디오 10여 개를 싸들고 자취방으로 가는 식이었다. 그는 "지금은 보기 힘든, 지나고 나니 명작인 영화들을 그때 다 봤다"고 했다. "'바늘구멍'(1981) 같은 좋은 영화는 이상한 에로물처럼 포장돼 들어오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이게 다 명작들이었는 데 말이죠(웃음)."

-두 번째 영화가 '풍산개'(2011)였죠? 그 영화에서 북한 고위 간부역이었어요.

"아, '풍산개'는 세 번째예요. 김기덕 감독 연출부 출신인 문시현 감독 장편이 그 앞에 하나 있어요. 고시원 이야기예요. '홈 스위트 홈'이라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작품이죠. 저희가 지방에 있으니 영화계 동정을 잘 몰라요. 저녁 때면 필름메이커스를 열심히 뒤져야 했어요. 시놉시스 뒤지고 할 만한 작품 있으면 프로필 보내고 그러는 거죠. 문 감독 시놉시스가 재밌길래 프로필을 냈더니 연락이 왔어요. 고시원 총무 배역을 주시대요. 그리고 '풍산개'는 이정인 촬영감독, 문시현 감독 둘이서 제게 추천해준 거예요. 저는 외가 쪽 고향이 이북인데요. 어릴 때 이북말을 많이 들으며 자랐어요. '종간나 새끼' 이러는 거 하도 듣고 자라서 북한말에 별 거부감이 없죠. 그래서 북한말 선생님 없이 곧바로 열심히 찍었어요."

김종수는 지난해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부산을 배경으로 한 범죄 코미디물
▲ 김종수는 지난해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부산을 배경으로 한 범죄 코미디물 '보안관'에서 이성민, 조진웅, 김성균 등과 출연해 호흡을 맞췄다. 김종수는 "즐기는 느낌으로 가장 마음 편하게 찍은 작품 중 하나"라고 말했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2009년 용산 참사를 다룬 김성제 감독의
▲ 2009년 용산 참사를 다룬 김성제 감독의 '소수의견'(2015)에서 김종수는 조폭 조구환을 연기했다. /사진제공=시네마서비스


-이후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2011), '소수의견'(2013), 드라마 '미생'(2014), '아수라'(2016), '보안관'(2016), '7호실'(2017) 등 어지간한 작품엔 다 출연하셨어요. 작년엔 10여 편이나 찍으셨고요.

"들어오는 건 사실 거의 다 해요. 근데 편수는 많지만 출연 회차는 적어요. 10회차면 얼굴이라도 익히는데, 3회차에서 그쳐야 하면 이제 좀 친해졌다 하면 집에 가야 해요. 나중에 시사회 가면 제가 사람들 기억을 잘 못하고 있더라고요. 얼굴은 아는데, 어느 영화에서 같이 했는지 모를 때도 있고 해서 미안할 때가 있어요. 맨 처음 영화인 '밀양' 찍을 때는 스태프들 이름까지 다 기억했어요. 그때 분들이랑은 지금도 친하고요. 근데 이제는 한 작품에 50명씩만 같이 일해도, 1년에 10편 하면 500명... 어찌 다 기억해 이걸(웃음)."

올해 쉰 셋. 30여 년간 울산 생활을 청산하고 지금 그는 서울 성북구에 홀로 산다. 아내와는 일찍이 이혼했다. 상경한 지 4년째. 서울에 온 뒤로는 영화와 드라마만 찍고 있다. 그는 "사투리만 못 고쳤을 뿐 서울 적응은 완료했다"면서 웃음 지었다. 풋풋한 스무 살 무렵 극단에 입단했으니 32년 세월 정말 숨 가쁘게 지내왔다. "한 번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나요?"라고 물었다. 그의 답변은 간결했다. "없었어요, 즐거웠으니까." 그는 정말 배우로서의 삶을 즐기는 것 같았다. 지금도 소년 같은 두 눈동자가 그리 말해주고 있었다. 인터뷰는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배우 김종수가 영화
▲ 배우 김종수가 영화 '1987' 700만명 돌파 감사 티켓을 들고 서 있다. 지난해 12월 27일 개봉한 '1987'은 개봉 한달여 만인 1월 28일 누적 관객 700만명을 넘어섰다. /사진제공=CJ E&M

-지금까지 연기 인생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실래요?

"말했잖아요. 즐거웠다고요. 그거면 됐죠.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웃음)."

-그럼, 선생님께 영화란 무엇입니까?

"무지무지 매력적인 거요. 어릴 때 영화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어요. '소림사 18 동인'(1977), '취권'(1978)도 보고, 이소룡 '맹룡과강'(1972)도 보고 그랬는데, 필름이 극장에 도착을 안 하면 간혹 딴 걸 틀어줄 때가 있었죠. 상영 시간은 다가오는데 돈은 낸 상태고, 동네에 극장은 하나뿐이고, 그냥 나가진 못하겠고... 나중에 어머니가 귀 잡고 끌고가고 그랬어요. 말이 옆길로 좀 샜는데요. 전 어린 시절 열등감이 늘 있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면 다른 거예요. 무언가 다른 세계에 있는 느낌인 거죠. 거기서 오는 쾌감이 있고요. 다만 이런 생각은 해요. 이것이 도피처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후배들한테도 배우는 사회성이 있어야 한다. 현실에 발 붙이고 있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시각이 생기고, 내가 생긴다고 말해요."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나요?

"'플로리스'(1999)라는 영화가 있어요. 로버트 드 니로와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나와요. 극 중 이들은 늙은 게이예요. 보통의 영화와 선이 완전히 다르죠. 꼭 그런 걸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비슷한 느낌의 작품을 해보면 신선하고 공부도 되고 재밌을 것 같아요."

'진짜 배우'를 만난다는 건 바로 이런 느낌일까. 바라봄 그 자체에 '멋'이 느껴진다는 것. 배우 김종수가 바로 그랬다. 긴긴 세월 '연기'라는 수행을 거듭해온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무언가가 그에겐 있었다. 우리가 '1987'에서 목도한 그의 첫 테이크 장면에 그토록 감화되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말했다. "야생화는 야생화대로, 꽃다발은 꽃다발대로 멋이 있겠지요. 저 또한 나름의 멋과 매력을 지닌 배우로 오래 기억되고 싶습니다."

[김시균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