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를 두는 미국과 '바둑'을 두는 중국 사이

  • 김기철
  • 입력 : 2018.02.20 15:01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사진=세종서적
▲ 사진=세종서적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 (그레이엄 앨리슨 지음, 정혜윤 옮김, 세종서적 펴냄)

[김기철의 책으로 세상읽기-25]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데우스'에서 "역사학자들이 과거를 공부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 책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이 쓰인 목적 역시 이와 같다. 75%의 가능성으로 운명지워진 패권국과 신흥국의 전쟁, 즉 미국과 중국의 '예정된 전쟁'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까가 이 책이 풀고자 하는 문제이다. 이 책의 부제 자체가 '미국과 중국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피할 수 있을까?(Can America and China escape Thucydides's Trap?)이다.

패권국과 신흥국 간 전쟁 확률 75%는 어디서 나온 숫자인가.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학장을 10여 년간 맡은 저자 그레이엄 앨리슨은 지난 500년 동안 세력 교체의 기록을 연구하는 '투키디데스의 함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인 이유는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기존 패권국가인 스파르타와 신흥세력인 아테네의 갈등 구조를 설명하면서 사용했던 개념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키디데스는 "전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테네의 부상(浮上)과 그에 따라 스파르타에 스며든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당사국들의 직접적인 의도가 무엇이든 새로 부상하는 세력이 지배 세력을 대체할 정도로 위협적일 경우에 그에 따른 구조적 압박이 무력 충돌로 이어진 현상은 예외적이라기보다는 법칙에 가깝다. 이 법칙을 증명하려고 한 시도가 바로 '투키디데스의 함정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에 따르면 15세기 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세력 교체부터 미국과 소련 간 냉전까지 기존 패권국가와 신흥국가 간 16차례의 충돌이 있었다. 이 중에서 1·2차 세계대전, 중일전쟁을 포함해 12번은 전쟁으로 끝이 났고 미·소 냉전을 포함해 단 4차례만 직접적인 전쟁을 모면했다. 지난 500년간 패권국과 신흥국가 간 대결이 전쟁으로 비화할 확률이 75%를 넘는 셈이다.

그레이엄 앨리슨
▲ 그레이엄 앨리슨

그레이엄 앨리슨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 대결을 17번째 '투키디데스의 함정'으로 보고 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1971년 '죽의 장막'을 열어젖힐 때만 해도 '중국'이 미국의 경쟁국으로 성장할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이 중국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한 것은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다. 냉전시대 경쟁국이었던 소련을 견제할 목적으로 중국과 손을 잡은 것이다.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을 보고 닉슨은 말년에 자신의 친구이자 연설문 작성자였던 윌리엄 새파이어에게 이렇게 털어놨다고 한다.

"우리가 프랑켄슈타인을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네."

닉슨 대통령에 의해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됐을 때 키신저는 사실 중국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의 전공은 유럽사였기 때문이다. 키신저는 하버드대 동료이자 중국사 권위자인 존 킹 페어뱅크 교수로부터 속성 과외를 받았다.

북한의 도발과 붕괴 모두 미국과 중국의 충돌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 북한의 도발과 붕괴 모두 미국과 중국의 충돌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페어뱅크 교수는 중국 외교정책의 세 가지 핵심 원리를 △주변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갖겠다는 요구 △이웃 국가들이 중국의 내재적 '우월함'을 인식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 △이웃 국가들과의 '조화로운 공존'을 지휘하기 위해서 이런 지배력과 우월함을 기꺼이 사용하겠다는 의지로 분류했다.

페어뱅크 교수가 말한 중국 외교정책의 핵심 원리가 제도로서 자리 잡은 것이 바로 '기미정책'과 '조공체제'다. '기미'는 소나 말에 씌우는 굴레를 의미한다. 따라서 기미정책은 굴레를 씌워 말을 다루듯 책봉(冊封)이나 조공(朝貢) 같은 수단을 통해 중국이 주변국을 속령화하는 정책을 말한다.

여기에는 주변국이 따라야 할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중국 황제의 연호를 사용해야 하고 임금과 세자는 황제 나라의 책봉을 받아야 한다. 즉 주변국은 중국의 지배력과 우월함을 인정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중국은 이런 지배력과 우월함을 사용해서 응징한다는 이야기다.

중국의 역대 왕조와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의 관계가 중국 외교정책 핵심 원리가 작동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고려나 조선이 이 두 가지 조건만 충실히 지킨다면 중국의 우산 아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국 외교원칙의 핵심이었던 기미정책과 조공체제는 청조의 멸망과 함께 공식적으로 폐기됐다. 또 이는 현대의 국가 간 조약과 국제질서와는 어울릴 수 없는 원칙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 중심의 외교원칙이 중국의 재부상과 함께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지낸 마틴 뎀프시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인들을 대하면서 무척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점들 중 하나는 그들과 국제기준이나 국제적 행동규칙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들은 반드시, 그런 규칙은 자신들이 세계 무대에 없었을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한 일입니다."(231쪽)

현재의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규칙들은 미국이 만드는 것이고, 또 자신들이 세계무대에서 빠져 있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슈퍼파워로 성장한 지금은 그런 규칙들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테네의 부상(浮上)과 그에 따라 스파르타에 스며든 두려움'이라는 투키디데스의 말을 '중국의 부상과 그에 따라 미국에 스며든 두려움'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17번째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그 앞서 있었던 16번의 '투기디데스의 함정'과 기본적인 성격이 다르다. 적어도 앞선 16번의 대결에서는 패권국과 신흥국이 대부분 같은 '게임의 룰'을 따랐다. 대부분 '체스'를 뒀다는 말이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은 다른 '게임의 룰'을 따른다. 미국은 '체스'를 두고 중국은 '바둑'을 두는 것이다.

미국은 체스를 두듯 외교정책을 펼친다.
▲ 미국은 체스를 두듯 외교정책을 펼친다.

체스와 바둑은 게임의 목표 자체가 다르다. 체스는 중심부를 지배하고 상대의 왕을 쓰러트리는 것이 목표다. 반면 바둑은 상대를 둘러싸고 땅을 넓히는 것이 목표다.

체스를 두듯 외교정책을 펴는 미국은 상대국에 우호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목표로 할 때가 많다. 이라크 후세인 정부를 무너뜨렸듯 적대적인 국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시도하는 경우도 많다. 미국의 외교안보 전문가였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유라시아 대륙을 미국의 외교 전략을 위한 '거대한 체스판'이라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중국은 상대국이 중국의 영향력 안으로만 들어오면 내정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중화제국 시절 기미정책이 그대로 이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중국은 바둑을 두듯 외교정책을 펼친다.
▲ 중국은 바둑을 두듯 외교정책을 펼친다.

중국은 또 이웃 국가들과 외교적, 경제적 연결고리를 더 강화하여 이들 나라가 중국에 더 깊숙이 의존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중국의 전략가들은 상대와의 더 넓은 관계 속에서 모든 차원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섣불리 승리를 향해 돌진하지 않고 대신 점진적으로 유리한 부분들을 쌓아 나가려고 한다.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대규모 원조와 투자, 시진핑 주석이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등이 모두 이런 연장선상에 있다.

특히 우리는 바둑을 두듯 하는 중국 외교정책의 위력을 최근 경험하기도 했다. 깊어진 경제 관계를 지렛대 삼아 벌인 중국의 사드 보복이 바로 그 단적인 예이다.

앨리슨은 데이비드 라이의 말을 인용해 미국 정부에 경고한다.

"체스를 하는 태도로 '고(바둑)' 게임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지나치게 공격적이 되어서 마구 뻗어나가다가 결국 힘이 달리고 전장에서 약점을 노출하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앨리슨은 중국을 상대하는 미국의 지도자들에게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피하기 위한 다섯 가지 조언을 한다. △핵심 국가이익을 분명히 하라 △중국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라 △구체적인 전략을 만들어라 △실패한 정치시스템을 개편하라.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의 지도자들에게 하는 조언이다. 한국과 미국이 동맹 관계지만 우리의 국가 이익이 미국의 국가 이익과 일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앨리슨이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는 시나리오 5가지를 제시했는데 그중 2가지가 모두 한반도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북한의 도발 혹은 북한의 붕괴 가능성이다.

한반도의 분단 자체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라는 '투키디데스 함정'의 산물이듯 한반도의 평화 공존, 더 나아가 평화 통일 역시 '투키디데스의 함정' 차원에서 살펴봐야 할 일이다. 우리는 이 점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가 미국과 중국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김기철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