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여성과학자에게 건넨 따뜻한 삶의 원리

  • 김기철
  • 입력 : 2018.02.2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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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Lab Girl) (호프 자런 지음, 김희정 옮김, 알마 펴냄)

[김기철의 책으로 세상읽기-26] 이 책은 '자라는 법'에 관한 책이다. '살아남는 법'에 관한 책이다. '식물'에 관한 책이다. 결국은 '삶'에 관한 책이다. 여성 식물학자인 호프 자런은 "20년을 실험실에서 일하는 동안 내 안에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자라났다"고 고백한다. '내가 써야 하는 이야기'와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 자런에게 '써야 하는 이야기'는 '식물'들의 이야기이고, '쓰고 싶은 이야기'는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 '랩 걸(Lab Girl)' 안에서 그 두 가지 이야기가 접붙인 과일 나무처럼 완전히 하나가 됐다.

호프 자런의
▲ 호프 자런의 '랩 걸(Lab Girl)’

식물로 치면 호프 자런은 메마른 땅에 떨어진 씨앗 같았다. 그럼에도 자런은 때를 기다려 싹을 틔웠고 물을 향해 뿌리를 뻗었고 빛을 향해 자랐다. 그리고 어느새 풀브라이트상을 세 번 받은 유일한 여성 과학자라는 큰 나무로 우뚝 섰다. 식물은 자런에게 연구 대상이기도 하지만 삶의 비밀과 지혜를 가르쳐주는 스승이기도 했다. 자런은 삶의 고비마다 힘이 돼준 나무들의 이야기를 그의 성장 스토리의 주석으로 삼았다. 이 글은 그 주석들에 대한 나 나름의 해제다. 나무를 연구해서인지 호프 자런의 글은 나무를 닮았다. 버릴 곳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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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란다는 의미에서 말이다.(33쪽)

호프 자런에게 '빛'은 '과학'이었다. 식물이 빛을 향해 자라듯 그의 성장은 '과학'을 향해 있었다. 그에게 '실험실'은 '교회'였고 또 '도피처'이자 '망명처'였다. 실험실은 그의 믿음을 확인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교회'였고, 직업상 벌인 전투에서 돌아와서 쉬는 도피처였고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는 망명처였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빛'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 말이다. 자런은 "과학은 자기 가치에 대해 너무도 확신이 강해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줬다."(49쪽)

우리에게 '빛'도 그런 것이다.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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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안다.(50쪽)

작은 씨앗 안에는 시계도 들어 있고 온도계도 들어 있고 측우기도 들어 있다. 때를 기다리기 위한 장치들이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씨앗은 살아 있다. 중국에 2000년을 기다린 연꽃 씨앗이 발견되기도 했다. 인간의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씨앗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버틴 것이다.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않는 씨앗이다."(52쪽)

때를 기다려야 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마냥 손놓고 있는다는 말이 아니다. 씨앗이 껍질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듯 살아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준비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죽은 씨앗에 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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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최근 1000만년 사이에 어떤 식물 하나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서 이파리를 펼치는 대신 가시 모양으로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촐라 선인장처럼 말이다.(98쪽)

촐라 선인장의 잎은 가시 형태다. 원래는 다른 나뭇잎처럼 넓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사막 한가운데 떨어지게 됐고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넓은 잎을 말아 뾰족하게 만들었다. 이 아이디어 때문에 선인장은 건조한 지역에서 사는 것이 가능해졌다. 가시들은 선인장의 표면을 지나가는 공기의 흐름을 줄여 증발량을 감소시키고 작은 그림자를 만들어 이슬이 맺히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일종의 혁신이다. 새로운 아이디어 하나로 식물은 새 세상을 정복한 것이다.

자런은 "진정한 과학자는 이미 정해진 실험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미 정해진 실험은 새로운 세상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덩굴들이 햇빛을 찾아가는 방법은 목재를 길러서가 아니라 순전히 악력과 뻔뻔스러움을 동원해서다.(180쪽)

호프 자런의 삶은 덩굴이 자라는 방법과 닮았다. 그래서 그는 도종환의 '담쟁이'보다 덩굴의 생태를 더 시적으로 표현했다. 이 부분은 길지만 한 번 소리내어 읽어 보기를 권한다.

"덩굴은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살아간다. 숲 위쪽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덩굴 씨들은 쉽게 틔우지만 뿌리를 내리는 일은 드물다. 유연하고 녹색을 띤 이 덩굴 싹은 의지해서 자랄 수 있는 틀을 미친 듯이 찾는다. 자신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힘을 제공해줄 틀을 찾는 것이다.

덩굴은 빛이 있는 위쪽으로 도달하기 위해 갖은 수를 동원해 투쟁을 한다. 그들은 숲의 규칙에 따르지 않는다. 제일 좋은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잎은 다른 제일 좋은 자리, 보통 몇 나무 건너에 만든다.

덩굴은 지상의 식물 중 유일하게 위보다 옆으로 더 많이 자라는 식물들이다. 덩굴은 도둑질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은 빛 한 줌과 비 한 방울을 훔친다. 덩굴들은 사과하는 태도로 공생 관계에 들어가는 대신 기회가 닿는 대로 크게 자란다. 감고 올라가는 틀이 죽는지 사는지 별 상관이 없다. 덩굴의 유일한 약점은 그것이 약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나무만큼 크게 자라기를 절박하게 원하지만, 그것을 고상하게 실현하는 데 필요한 빳빳함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이 햇빛을 찾아가는 방법은 목재를 길러서가 아니라 순전히 악력과 뻔뻔스러움을 동원해서다.

담쟁이덩굴 한 그루는 무엇이든 감싸고 달라붙도록 프로그램된 수천 개의 초록색 덩굴손을 가지고 있다. 덩굴손에 닿은 것이 덩굴을 지지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거나 혹은 적어도 튼튼한 것을 만날 때까지 버텨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들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의 변신술을 지닌 변절자들이다. 덩굴손에 흙이 닿으면 뿌리로 변하고 덩굴손에 바위가 닿으면 흡입컵을 만들어 단단히 붙는다. 덩굴은 무엇이든 필요한 것으로 변신하고, 자신의 엄청난 허세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다 한다.

덩굴식물은 사악하거나 해로운 존재는 아니다. 다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야심 찰 뿐이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식물이다." (180쪽)

촐라 선인장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촐라 선인장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죽이지 않았기 떄문에 거기 사는 것이다.(203쪽)

사막에 사는 식물은 어떤 식물이라도 사막에서 가지고 나오면 더 잘 자란다. 사막은 나쁜 동네와 비슷한 면이 있다. 흔히 양극화가 확대되는 지금을 "개천에서 난 용이 없다"고 비판한다.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개천에 사는 미꾸라지가 용으로 승천하도록 사다리를 세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개천을 거대한 강으로 만드는 일이다. 개천을 개천으로 방치한 채 용이 안 보인다고 한탄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선인장을 크게 키우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사막을 없애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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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 닥치면 나무들은 서로를 돌보는 것인지도 모른다.(241쪽)

1997년 미국 워싱턴부의 한 숲에 텐트나방이라는 곤충들이 들이닥쳤다. 텐트나방은 나무의 이파리를 모두 갉아먹는 방법으로 나무를 죽이고 숲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2년 뒤 워싱턴주립대 연구원들이 텐트나방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나뭇잎을 텐트나방에게 먹였다.

텐트나방들은 2년 전 나뭇잎을 먹성 좋게 먹어치웠지만 이번에는 나뭇잎을 먹은 애벌레들이 병들었다. 2년 전 텐트나방의 공격을 받으며 나무들은 텐트나방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화학물질을 내부에 비축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2년 전 텐트나방의 공격을 받지 않은 인근 숲의 나뭇잎에도 같은 화학물질이 들어 있었다. 나무들끼리의 의사 전달 체계를 통해 이쪽 숲에서 저쪽 숲으로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이렇게 나무들도 서로를 돕는다. 옆 숲이 건강해야 우리 숲도 건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눈 속에서 사는 식물들에게 겨울은 여행이다. (274쪽)

나무들도 여행을 한다. 공간을 이동하는 동물들의 여행과 달리 식물들의 여행은 시간여행이다. 그 여행은 태양을 찾는 과정이다. 24시간의 순환 주기 중 빛이 존재하는 시간을 감지해 식물들은 자신의 상태를 바꾼다. 매일매일의 날씨는 변덕을 부릴 수 있지만 태양만은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식물들은 세상이 급속도로 변화할 때 항상 신뢰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도 그래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내가 지켜야 할 한 가지 기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호프 자런
▲ 호프 자런

◆초록 이파리를 많이 거느린 식물은 최대 성장점에 도달을 하면 일부 영양소를 빼내 꽃과 열매를 만드는 쪽으로 재배치한다.(301쪽)

여성 과학자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자런에게 '임신'은 최대의 위기이자 공포였다. 아기가 태어남으로써 인생의 일부분이 끝날 것이라는 예감에 오랫동안 슬퍼했다. 이런 자런에게 힘을 준 것도 역시 식물이었다.

식물학 교과서에 수많은 성장 곡선이 나와 있는데 이 중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느슨한 S자 곡선이다. 최대 생산성에 이르기 직전에 식물의 질량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즉 꽃과 열매를 만드는 데 일부 영양소를 쓰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부모에게 상당한 타격을 준다. 하지만 결국 한때의 타격을 회복하고 더 크게 성장한다.

식물은 지구의 어머니다. 햇빛과 물을 섞어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호프 자런은 책 첫 장에 '내가 쓰는 모든 글은 어머니께 바치는 것이다'라고 썼다. 이 책은 호프 자런의 삶을 지켜준 식물들에게 바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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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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