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돌아온 '무대의 마법사' 르파주에게 갈채를

  • 김연주
  • 입력 : 2018.05.1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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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의 마법사' 르파주의 '달의 저편'
15년 만에 다시 한국에
비스듬히 놓인 거울로 무대 위에 우주 소환하는
경이로운 엔딩 장면에 객석 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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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테이지-124]바닥에 드러누운 배우를 거울 하나만으로 우주로 보내버리는 '무대의 마법사'. 비스듬히 놓인 거대한 거울에 조명과 영상을 투영해 바닥을 뒹구는 배우가 별들이 반짝이는 우주 공간에 유영하는 듯한 착시효과를 일으키는 엔딩 장면에서는 탄성이 절로 터진다. 로베르 르파주(61)의 대표작 '달의 저편'이 15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15년 전 작품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무대는 지금 봐도 경이로웠다.

빨래가 돌아가던 둥근 세탁기 창문은 어느 순간 '달'의 모습으로, 금붕어를 담은 어항으로, 우주선의 입구로 끊임없이 변화한다. 평범한 다리미판은 자전거와 벤치 프레스로, 슬라이딩 패널은 강의실 칠판과 문, 엘리베이터로 활용된다. 360도 회전하는 무대 세트에는 거대한 거울이 부착되어 있는데 어디를 비추냐에 따라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270도로 허공 위 어둠을 비출 때면 순식간에 끝 모를 우주를 불러오고, 180도로 판판하게 놓여 있을 때는 세련된 칵테일 바가 되며, 90도로 객석을 비추어 관객들을 무대 위로 소환해내기도 하다

차가운 테크놀로지가 인간적인 이야기를 만나 따듯한 동화 같은 이미지들을 만들어낸다. '달의 저편'은 우주개발 경쟁 시기에 유년기를 보냈던 로베르 르파주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만난 '필립'과 '앙드레' 형제의 갈등과 화해를 그리고 있는데, 르파주는 성격과 가치관이 서로 다른 두 형제의 대립을 '달 탐사'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이 벌였던 치열한 우주개발 경쟁의 역사와 중첩시키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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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우주여행은 호기심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됐다."

1990년대 미국과 소련은 '우주여행'이란 인류의 오랜 이상을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듯 보였지만, 본질은 지구의 두 골목대장이 벌이는 유치한 다툼에 지나지 않았다. 필립과 앙드레 두 형제의 싸움만큼 유치했다. 두 사람은 아주 사소한 이유로 극 내내 티격태격한다. 모든 형제들이 그렇듯, 싸움의 이유를 상대방 탓으로 돌리며 말이다. 문화 철학자인 앙드레는 기상캐스터인 동생 필립의 교양 없음과 속물적임을 나무라고, 필립은 형 앙드레의 지적 허영심을 비난한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이 다투는 건 '자기애'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형제의 재능을 부러워하면서도 인정하지 못하는 못난 자기애 말이다. 미국과 소련이 그토록 경쟁에 열을 올렸던 이유가 자신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음을 생각해본다면 모든 인간의 다툼은 콤플렉스적인 자기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 아닐까.

'거울'은 달의 저편에서 가장 핵심적인 무대 소재로 극 중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거울이 아니면 우리는 한평생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다. 우리가 자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울'에 비춰보는 것뿐이다. 필립과 앙드레, 소련과 미국은 서로를 통해 자신의 본질을 확인한다. 서로가 서로의 거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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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기에 우리는 애써 부정하곤 한다. 모두들 한번쯤 이런 일을 겪어봤을 테다. 어느 날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깜짝 놀라는 경험 말이다. "내가 이렇게 생겼나!" 생각보다 못난 얼굴에 기겁하게 된다. 극 중 이런 대목이 있다. 인류는 달의 표면을 확인했을 때 너무 놀랐다고. 달의 표면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처럼 매끈하지도 백옥처럼 밝게 빛나지도 않았다. 그곳은 운석에 이곳저곳 파이고 상처난 표면이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처럼.

극을 보고나면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달의 진정한 얼굴인 저편(far side)은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달은 늘 지구를, 타인은 늘 '나'를 비추는 거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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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르파주는 창의적인 스토리텔링과 독창적인 무대 연출로 연극계에 혁신을 일으킨 아방가르드 연극의 대가다. 이미지와 영상, 첨단 무대 장치를 적극 활용한 그의 작품들은 현대 연극의 경계를 확장시켰다고 평가받는다. 다만 종종 '무대'가 이야기를 압도해버려 아쉬움이 남았다. 독창적인 무대에 홀려 정작 이야기에 몰입하기 힘든 순간들이 많았다. 135분에 이르는 러닝타임을 홀로 이끄는 이브 자크는 능수능란했다. 초반에는 캐릭터에 혼동이 오기도 했지만 후반부에서는 엄마, 의사, 두 형제를 유머 있게 소화해 객석의 갈채를 받았다.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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