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화 조성진 듀오' 클래식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보여준 무대

  • 김연주
  • 입력 : 2018.09.1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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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테이지-97] 반 음만 어긋나도 머리를 쥐어뜯었단다. 한 번은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고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대기실로 뛰어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딱 한 음을 틀렸는데, 그런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단다. 젊은시절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서릿발같이 내리긋는 활과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냉정하리만치 정확한 운지법으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현의 마녀'라 불렸겠는가. 그의 엄격함은 무대 위에서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로 현현했다.

"다시할게요."

하지만 12일 46세 어린 후배 조성진과 무대에 오른 정경화는 딴 사람 같았다. 앙코르 '사랑의 인사' 때 음을 놓치자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시작했다. 거장의 실수에 실망하거나 야유를 보내는 관객은 없었다. 대신 객석에서 '사랑해요!'란 큰 외침이 들려왔을 뿐. 그 말에 정경화는 바이올린을 든 채로 큰 하트를 만들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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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70)와 피아니스트 조성진(24)의 듀오 공연. 마흔 여섯의 나이 차이지만, 각각 한국 클래식계의 한 세대를 대표하는 두 거장의 만남이라 전석 매진은 물론이요, 근래 클래식 팬들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은 공연이었다.

두 사람의 첫 듀오곡인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C단조에는 아쉬움이 앞섰다. 과거 정경화에게서 상상할 수 없었던 몇몇 실수가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부 슈만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이 시작되면서 실망감은 기대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조성진과 정경화는 46세란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뜨겁게 또 치열하게 음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날 무대의 절정은 단연 세자르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특히 2악장 피아노가 활력 있게 이끌어가고 그 힘을 바이올린도 받아낸다. 조성진의 무서운 재능이 발한 순간이기도 했다. 반주에 머물다가도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순간에는 강력하게 휘몰아쳤다.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는 "조성진이 대단한 연주자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며 "반주에 가깝게 연주하다가도 자기 패시지 부분에서는 불꽃같이 등장했다. 바이올리니스트를 최대한 배려하면서도 자신이 돋보여야 하는 부분을 정확히 알고 스스로를 빛낼 줄 아는 여유로움은 거장의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정경화도 이 어린 후배에게 지지 않고 강렬한 선율로 맞받아쳤다. 불꽃이 튀었다. 다시 침잠하는 3악장에서는 정경화의 서정적인 선율이 작지만 옹골차게 울려펴졌다. 순간 우는 듯 떨리는 바이올린의 음색이 마음을 거세게 흔들었다. 거장의 진면목은 기교가 아니라 감성이란 걸 느끼게 해 준 대목. 음악 해석에 있어 남들이 감히 따를 수 없는 직관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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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의 마지막 곡을 마친 정경화는 긴장이 풀린 듯 조성진 옆 피아노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두 사람이 함께 미소지었다. 그때 예전 정경화의 인터뷰에서 "평생을 공포의 우산 속에서 살았다"던 고백이 떠올랐다. 읽고나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지녀 두고 있던 문장이었다. 빛나지만 실상 지난한 음악가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본 듯 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순간 마음이 뭉클해졌다. 긴장을 풀고, 미소를 짓고 또 실수도 하고. 드디어 그 우산을 접고 밝은 햇살 아래로 소녀가 걸어나온 듯했기 때문이다.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았던 결벽증적인 연주가 주는 소름만큼이나, 나이든 거장이 여유를 가지고 즐기는 편안한 음악은 또 다른 감동이더라.

마지막 앙코르 곡. 쇼팽의 '녹턴'을 정경화가 먼저 연주하고, 뒤를 이어 조성진이 드뷔시의 '달빛'을 들려줬다. 마지막은 앞에서 말했듯이 '사랑의 인사'. 앙코르가 끝날 때까지 모든 관객들은 객석을 떠나지 않은 채 기립박수를 보냈다. 박수소리는 조성진만을 위한 것도, 정경화만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둘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에 보내는 감사의 인사였다.

[김연주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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