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OK의 심리학

  • 정현권
  • 입력 : 2018.10.1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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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골프 오딧세이-5] 지난해 7월 US 여자주니어골프 선수권대회 준결승 에리카 셰퍼드와 엘리자베스 문(이상 미국)의 연장전. 18홀 매치플레이로 열린 이날 연장 첫 번째 홀에서 셰퍼드가 먼저 파로 홀아웃했고, 문은 약 1.2m 버디 퍼트를 남겼다. 하지만 문의 버디 퍼트는 왼쪽으로 살짝 비켜갔고 홀에서 약 15㎝ 떨어진 곳에 멈췄다. 문은 별생각 없이 공을 집어 들었지만 셰퍼드가 "나는 그 공에 대해 컨시드를 준 적이 없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결국 경기 위원들은 문에게 1벌타를 부과했고, 패배 위기에 몰렸던 셰퍼드가 극적으로 결승에 진출해 우승했다. 사실 15㎝ 거리면 일반적으로 컨시드가 용인된다. 셰퍼드는 "나는 그때 눈을 감고 있었는데 공이 떨어지는 소리가 안 들려 눈을 떠보니 이미 공을 집어 들고 있었다"며 "그 상황을 내가 보고 있었다면 당연히 컨시드를 줬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흔히 주말골퍼들이 사용하는 ‘OK'는 짧은 거리를 남긴 퍼팅을 1타로 마무리한 것으로 인정한 것인데 원래 용어는 ‘컨시드(Concede·양보)'다. 굳이 해석하자면 한국이나 일본 등 동양사람들 사이에 "오케이, 내가 컨시드해 줄게!"를 줄여서 OK라고 부른다.

주로 1m 이내 거리를 오케이 존으로 하는데 주말골퍼들은 퍼터 길이 이내에서 허용하며 프로경기에서는 ‘김미(Gimme)'라는 용어로도 통용된다.

사실 주말골퍼들에게 이 컨시드 거리의 퍼팅이 가장 긴장된다. 공이 핀에서 이보다 좀 멀리 있으면 못 넣어도 붙인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이 거리에서는 꼭 한 타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강하기 때문이다. 특히 내기 골프를 하면서 스킨스 상금이 잔뜩 쌓여 있다든지 스트로크 게임 때 한 타 차이로 싹쓸이를 하거나 거꾸로 동반자들에게 돈을 다 지불할 상황이라면 긴장감은 극에 달한다.

골퍼 강욱순이 2003년 50㎝ 퍼트를 놓쳐 결국 미국 퀄리파잉스쿨에 1타 차로 낙방해 PGA 진출에 실패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강욱순의 골프인생은 이 퍼트 사건을 계기로 전과 후로 나뉜다. 이후 강욱순은 미국 2부 투어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 선수활동과 함께 골프아카데미 등 골프 관련 비즈니스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김인경도 2012년 나비스코챔피언십에서 30㎝ 퍼팅을 놓쳐 생애 첫 메이저대회 우승에 실패하면서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다. 프로골퍼 김경태 선수도 "결정적인 순간에 짧은 퍼팅에 실패하면 프로나 아마추어나 약간의 공황장애 같은 현상을 겪는다"며 "우리가 흔히 쓰는 ‘입스(Yips)'에 걸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그날의 실패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퍼팅에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주말골퍼들은 보통 50㎝ 이내엔 웬만하면 컨시드를 준다. 컨시드를 받고 퍼팅을 하면 희한하게 잘 들어간다. 심리적으로 아무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동반자들이 컨시드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치열한 내기 골프가 붙었거나 공이 내리막 옆 경사에 놓였다면 사실 짧은 거리의 퍼팅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동반자들이 컨시드를 주지 않을 경우 당사자의 심리 상태가 매우 중요하다. 당연히 컨시드를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퍼팅을 해야 한다면 경험적으로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반대로 컨시드를 고대하지 않고 당연히 퍼팅할 것으로 심리적으로 무장돼 있으면 대부분 성공한다. 김경태 선수는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해도 반드시 넣을 수 있다고 자기 주문을 하면서 다른 잡념이 개입될 여지를 주지 않으면 짧은 거리 퍼팅은 성공한다"며 "빨리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퍼팅을 서두르면 실패한다"고 조언한다.

아마추어 친선 골프에선 보통 공이 핀에서 1m 이내에 놓이면 컨시드를 주고 내기가 붙더라도 그립 부분을 뺀 퍼터 길이 이내이면 컨시드를 허용한다.

아무리 친선이라도 너무 컨시드를 남발하면 게임에 활력이 없어 재미가 없다. 골프는 집중에 따른 긴장감을 맛보는 스포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날은 덥고 앞 팀은 보이지 않고 뒤 팀은 바짝 붙어 있는데 짧은 거리에도 끝까지 컨시드를 주지 않으면 지루해지고 동반자 전체의 리듬도 깨져 버린다.

내기가 붙었을 때 누가 컨시드를 주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보통 골프 시작 전에 룰을 정해놓고 하는 수도 있지만 경기가 진행되다 보면 룰과는 상관없이 무심코 컨시드를 외치는 수가 있다. 이때 누군가 마음속으론 응하고 싶지 않더라도 클레임을 쉽게 걸지 못한다. 야박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계속 돈을 잃고 있어 퍼팅하는 동반자가 실패하면 나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는데 옆에 있던 다른 동반자가 무심코 컨시드를 외쳐 버리면 억울하다. 물론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컨시드를 준 것은 아니겠지만 내 입장까지 잘 살펴야 하는 게 맞다. 심하게 말하면 자기는 컨시드를 주면서 좋은 사람이 되고 나는 억울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래서 내기가 붙으면 해당 홀이나 진행된 홀까지 가장 불리한 사람에게 컨시드 권한을 주는 게 현명하다. 처음 컨시드룰을 정해놔도 경기 진행이 밀리거나 덥거나 추우면 속도를 내야 하는 경우가 있어 약속대로 이 룰이 제대로 안 지켜지기 때문이다.

컨시드 하나로 품격이 달라 보이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수원CC에서 스킨스게임이 붙었는데 한 번도 상금을 챙기지 못한 연세가 많이 드신 분이 후반 3번째 파3홀에서 1m 거리의 세 번째 퍼팅을 남겼다. 다른 두 사람은 쓰리온으로 이미 승부에서 멀어졌고 한 사람은 핀에서 80m 정도의 세 번째 퍼팅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선 경기에서 계속 비겨서 상금이 많이 쌓인 데다 다른 동반자 세 명이 벌금으로 뱉어낸 것도 누적돼 그날의 승부처였다. 그분은 퍼팅을 마무리해 결국 파에 성공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핀에서 80㎝ 남은 동반자의 공을 집어주며 컨시드를 주는 게 아닌가. 자기가 1m 퍼팅에 성공했다면 당연히 80㎝는 성공하지 않겠느냐며 주위를 놀라게 했다. 상대방의 실력을 인정해주고 실수에 의존해 이기고 싶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혀졌다. 상대방이 퍼팅에 실패하면 전세를 역전하고 상금 순위도 1위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였다. 접대 자리도 아니었다. 금액을 떠나 쉽지 않은 결정이다. 골프를 신중하게 잘 즐길 줄 알면서도 품격이 달라 보여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골프에서 컨시드 하나를 주면서 경솔할 수도, 품격이 달라 보일 수도 있다.

[정현권 골프 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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