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타인' 휴대폰이라는 판도라의 상자

  • 양유창
  • 입력 : 2018.11.1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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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영화 '완벽한 타인'
[양유창 기자의 시네마&] 그리스신화의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제우스는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가 결혼하자 상자를 선물로 주었다. 그러면서 "안전한 곳에 보관하되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했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판도라는 상자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너무 궁금해 몰래 열어보았고, 그 안에서 증오, 질투, 분노, 가난, 고통, 질병 같은 재앙이 쏟아져 나왔다.

호기심이 부른 참극을 말할 때 곧잘 회자되는 이 이야기에서 간과되는 것이 하나 있다. 제우스가 판도라에게 준 상자는 결혼 선물이었다는 것이다. 신 중의 신이자 바람둥이로 유명한 제우스는 축복해야 할 커플에게 온갖 고통을 담은 상자를 주었다. 그러면서 열어보지 말라는 말로 고통을 유예시켰다. 어쩌면 '판도라의 상자'는 결혼 제도에 대한 일종의 환유인지도 모른다.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에서 상자를 휴대폰으로 바꾸면 영화 '완벽한 타인'이 된다. 개봉 16일째를 맞은 영화는 37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순항하고 있다. "현실웃음 제대로 터졌다"는 관객 반응이 많은 것을 보면 휴대폰이 현대인의 판도라의 상자라는 영화의 문제 인식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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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완벽한 타인'
(지금부터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속에는 결혼한 세 커플과 한 명의 이혼남이 등장한다. 겉보기에 번듯한 전문직 부부인 석호(조진웅)와 예진(김지수), 옛날 부부처럼 고지식한 남편과 억압받는 아내인 태수(유해진)와 수현(염정아),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준모(이서진)와 세경(송하윤), 그리고 남다른 남자 영배(윤경호)가 그들이다.

어릴 적부터 34년지기 친구인 남자들과 그들의 배우자들인 이들은 석호와 예진의 집들이를 겸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다. 그리고 문제의 게임을 시작한다. 휴대폰으로 오는 모든 메시지를 식사 시간 동안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부부 사이에, 또 막역한 친구 사이엔 비밀이 없어야 한다는 명제가 모든 참가자들이 이 게임에 동의한 이유다.

현대인들이 손에서 놓지 못하는 휴대폰이라는 똑똑한 기계는 어느새 우리의 공적, 사적 영역을 모두 차지해 삶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나의 페르소나로서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는 것이 휴대폰이다. 내 손에 없을 때도 휴대폰은 나를 대신해 타인의 휴대폰 속에 존재한다. 이 상자가 열리면 그 속에서 비밀스러운 관계, 얼굴 빨개지는 사건, 친구와 나눈 뒷담화 등이 튀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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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완벽한 타인'
"타인은 지옥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타인이 지옥인 이유는 타인이 나의 의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였던 사르트르의 이 명제는 영화에 들어맞는다. 우리는 타인을 절대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러니까 지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곧 소통의 시작이 된다.

여기에 영화를 만든 감독은 한 가지 명제를 더한다. 그것은 친한 타인일수록 더 큰 상처를 주고 받는다는 것이다. 34년지기 친구도, 오랜 부부도 결국 타인이다. 그런데 타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그러니까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순간, 관계는 상처를 입는다. 때론 사소하고 작은 트러블이 지옥으로 가는 발단이 된다. 타인의 이해에 대한 불인정은 무의식 중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스 출신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사랑은 때때로 무시, 헛된 갈망, 복수, 자포자기의 무대로 변해 우리는 왜 그런지 이해조차 못한 채 자신의 삶과 한때 자신이 좋아한다고 맹세했던 사람의 삶을 망가뜨린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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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완벽한 타인'
영화 속에서 억지로 커밍아웃한 태수와 영배에게 석호와 준모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 아내인 수현에게 태수가 사사건건 참견하며 하는 말투, 세경에게 준모가 하는 뻔뻔한 거짓말 등이 모두 상처를 주는 행동이다.

영화에서 딱 한 번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있다. 석호와 딸 소영(지우)이 나누는 대화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대화가 휴대폰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게임을 시작한 이후 휴대폰이라는 판도라의 상자에선 불륜, 질투, 거짓말, 따돌림, 뒷담화 등 관계를 파탄낼 비밀이 쏟아져 나왔지만 희망만은 빠져나오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 영화에서 판도라의 상자 속 희망의 역할을 맡은 이가 바로 소영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여서 엔드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나면 내 휴대폰을 한 번쯤 찬찬히 살펴보게 되는 이 영화에는 두 가지 영화적 허구의 장치가 있다. 하나는 개기월식이고, 또 하나는 세경이 돌리는 반지 팽이다.

달이 지구의 그림자로 숨는 월식은 역사적으로 동서양 모두에서 불길한 징조였다. 특히 서양문화에선 이성이 마비되는 순간으로 인식돼왔다. 기원전 4세기경 필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군은 월식 때문에 퇴각 시기를 미루다가 몰락했고, 15세기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며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는 동안 한 달 내내 월식이 벌어져 달이 붉게 물들었다. 늑대인간의 전설에서도 최초의 늑대인간은 보름달이 사라진 개기월식 때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영화 '완벽한 타인'의 인물들은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한 순간 베란다로 나와 하늘을 바라본다. 온몸으로 달의 기운을 받으면서 이들은 점점 원초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또, 빙그르르 돌아가는 세경의 결혼 반지는 영화 '인셉션'의 팽이처럼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이 실제인지 꿈인지 모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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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완벽한 타인'
영화 후반부에서 제시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은 세상은 평온하기만 하다. 욕망도 갈등도 수면 아래 잠들어 있다. 다들 혼자만의 시간에 자신의 휴대폰 속 비밀의 삶을 관조한다. 들킬까봐 조마조마해 하거나 혹은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영화 '인셉션'에선 꿈과 현실 어디가 해피엔딩인지 모호했던 반면 '완벽한 타인'은 분명하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 지옥이다.

영화의 시니컬한 엔딩은 한편으로는 비겁하다. 친한 타인의 속마음을 알게 돼 괴로워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인 '이터널 선샤인' '그곳에선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등의 영화와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판도라의 상자와 정면승부를 벌여 깨진 관계를 복원하는 힘겨운 길을 가는 대신, 단지 상자를 열지 않는 것이 행복을 유지하는 길이라고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다모' '베토벤 바이러스' '더킹 투하츠'의 스타 PD로 이름을 알린 뒤 '역린'으로 영화감독 데뷔한 이재규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양유창 기자 sanity@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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