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백석이 찾아갔던 이즈반도에는 금귤이 익어가고 있었다

  • 허연
  • 입력 : 2017.09.14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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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평양 영생고보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1937년 무렵의 백석.
▲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평양 영생고보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1937년 무렵의 백석.
[허연의 일본문학 기행-40]
저녁밥때 비가 들어서
바다엔 배와 사람이 흥성하다

참대창에 바다보다 푸른 고기가 께우며 섬돌에 곱조개가 붙는 집의 복도에서는 배창에 고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즉하니 물기에 누굿이 젖은 왕구새자리에서 저녁상을 받은 가슴앓는 사람은 참치회를 먹지 못하고 눈물겨웠다

어득한 기슭의 행길에 얼굴이 했슥한 처녀가 새벽달같이

아 아즈내인데 병인은 미역냄새 나는 덧문을 닫고 버러지 같이 눟었다

-<가키사키(枾崎)의 바다> 전문


누구의 시일까? 지금은 쓰지 않는 표기법들이 눈에 띄는 걸로 봐서 꽤 오래전에 쓰여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평안도 사투리도 여기저기 보인다. 그리고, 가키사키는 어디일까?

이 시는 한국의 시인 백석이 1930년대에 쓴 시다. 가키사키는 이즈반도 남쪽에 있는 어촌마을이다. 시모다항 바로 옆이다.

그렇다. 백석은 이즈반도를 여행하고 시를 남긴 것이다.

1930년 백석은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당선하면서 문단에 등단을 한다. 이것을 계기로 동향 출신의 조선일보 경영자였던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아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백석은 1930년 4월부터 1934년 3월까지 도쿄 아오야마(靑山)학원 영어사범과를 다니게 된다.

위 시는 백석이 일본 유학 시절 이즈반도를 여행하고 돌아와 쓴 작품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백석의 글 중에 이즈반도를 소재로 쓴 것은 시 2편과 산문 1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록만 가지고는 백석이 언제 무슨 이유로 이즈반도를 여행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기가 힘들다.

그가 남긴 3편의 글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밖에 없다.

앞서 인용한 시 '가키사키의 바다'는 백석이 배편을 이용해 이즈반도로 향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준다.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도쿄에서 이즈반도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기차편으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선을 타고 가는 것이었다. 백석이 남긴 글에 이타미나 슈젠지 등 기차를 타고 가야 도달할 수 있는 이즈반도의 다른 지역 이름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백석은 남이즈의 해안가만을 둘러봤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당시 기선을 이용한 여행은 기차보다 훨씬 낭만적이고 세련된 여행으로 받아들여졌다. 신문물의 상징인 대형 기선을 타고 따뜻한 남국의 바닷가를 여행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인기 있는 여행 코스였다.

시모다에서 조금 떨어진 가키사키 해변은 관광지가 아니다. 시모다에 도착한 백석은 일부러 작은 포구 마을에 며칠 묵었을 것이다. 왜 그곳에 묵었을까. 그곳은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삶이 있는 곳이었다. 시에서 드러나듯 백석은 배창에 고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포구와 가까운 방에 묵는다. 죽창에 고기를 꿰어서 말리는 집, 그 작은 집에서 백석은 아프고 연약한 사람들을 만난다. 백석다운 선택이다.

이즈반도를 여행하고 남긴 또 다른 시 '이즈노쿠니노미나토카이도(伊豆國湊街道)'에도 많은 단서가 남아 있다.

녯적본의 휘장마차에
어느메 촌중의 새새악시와도 함께 타고
머ㄴ바다가의 거리로 간다는데
금귤이 눌 한마을마을을 지나가며
싱싱한 금귤을 먹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즈노쿠니노미나토카이도(伊豆國湊街道)> 전문


이 시의 제목에는 일단 분명하게 '이즈(伊豆)'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즈반도의 해안길을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마차 안에서 백석은 금귤을 먹는다. 금귤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보기 힘든 과일이다. 일본의 남쪽 해안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과일이다. 이즈반도의 금귤은 겨울이 제철이다. 따라서 백석이 이즈반도를 여행한 계절이 겨울이었음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백석은 왜 이즈반도로 여행을 갔을까. 짐작에 불과하지만 그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를 읽었을 것이다. 1926년 발표된 '이즈의 무희'는 1920~1930년대 일본에서 선풍적으로 읽히는 인기 소설이었다. 아오야마학원 학적부에 취미가 독서라고 적혀 있는 백석이 '이즈의 무희'를 읽지 않았을 리는 없다.

따듯한 남녘의 유혹과 새롭게 등장한 기선여행의 낭만, 그리고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 이런 것들이 유학생 백석의 발길을 이즈반도로 이끌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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