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잔멸치덮밥 '시라스동'을 맛보다

  • 정영선
  • 입력 : 2018.02.06 15:01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푸드트래블-12] 일본 가마쿠라에 꼭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때문이었다. 네 자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의 배경이 된 가마쿠라는 단순히 그들이 거주하는 도시를 넘어서 주인공들의 일상과 유기적으로 호흡한다. 주인공들은 가마쿠라의 사계절 안에서 성장하며 추억을 쌓아간다. 영화 속 가마쿠라는 어느 도시여도 상관없는 장소가 아니라 '그곳이 아니면 안 되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이 영화엔 가마쿠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 이야기도 나온다. 특히 네 자매가 식사하는 장면에서 "시라스동(잔멸치 덮밥)은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라는 대사가 나왔을 때 영화를 보던 나의 눈동자는 흔들렸다. 네 자매 중 막내인 스즈가 시라스동을 후루룩 삼키듯 먹는 장면에서는 그 맛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게다가 최근에 읽은 오가와 이토의 소설 '츠바키 문구점'은 가마쿠라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겼다. 이 소설의 배경 역시 가마쿠라인데, 소설 전반에 걸쳐 애정 어린 시선으로 도시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책의 말미에는 소설 속 주인공인 포포가 다닌 장소들이 실제 지도에 표시돼 있는데, 그 지도를 보니 소설 속 장소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가야겠어!' 난 그 지도를 들고 가마쿠라를 향해 떠났다.
가마쿠라 역
▲ 가마쿠라 역


가마쿠라는 일본 도쿄 신주쿠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출발해 후지사와역까지 간 뒤 다시 에노덴('에노시마 전철'의 준말)이라는 전철을 타고 가마쿠라 역까지 가면 된다. 이때 '에노시마·가마쿠라 프리패스'를 끊으면 하루 종일 열차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서 유용하다.

난 아침 일찍 일어나 신주쿠역에 도착했다. 신주쿠에서 가마쿠라까지는 1시간30분 정도 소요되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다. 난 에노덴을 탈 땐 맨 앞 칸에 타야 좋은 풍경을 많이 볼 수 있다는 정보를 미리 본 터라 맨 앞에 줄을 섰다. 하지만 이런 정보가 내게만 제공된 것일 리 없다. 에노덴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모두 맨 앞 칸에 몰려 있었고, 심지어 에노덴에서 바라본 멋진 풍경을 담기 위해 삼각대를 준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앞 칸에 탔건만 차량은 사람들로 가득해 앞 칸의 혜택은 전혀 누리지 못한 채 건너편 창밖만 바라보고 가야 했다. 하지만 아쉽지 않았다. 하나의 선로를 이용해서 달리기 때문에 좁은 골목길을 지나는 게 가능한 에노덴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풍경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빨래를 널어 놓은 집, 작은 화분을 늘어놓은 집, 아기 장난감이 보이는 집, 사람 사는 정겨운 풍경들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펼쳐졌다. 그동안 열차 안에서 바라보던 풍경이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느낌이었다면, 에노덴에서 보는 풍경은 마치 현미경으로 보는 듯했다.

분샤쇼쿠도 전경
▲ 분샤쇼쿠도 전경

창밖 풍경에 정신이 팔린 사이 종점인 가마쿠라에 도착했다. 역에 내리니 한겨울의 차갑고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도쿄에서 불과 50㎞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이런 고즈넉한 장소가 있다니 놀라웠다. 조금 전까지 도쿄의 최대 번화가 중 하나인 신주쿠에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먼 곳으로 온 느낌이다. 나는 큰 간판과 시끄러운 소음에서 벗어나 오래된 도시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도시를 걸었다.

가마쿠라에 왔다면 반드시 먹어봐야 할 음식은 역시 '시라스동'이다. 시라스동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많은 음식점이 입간판을 통해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곳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왕 먹을 거라면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배경이 된 '우미네코 식당'에서 시라스동을 먹고 싶었다. 영화 속에 '우미네코 식당'으로 등장한 곳은 가마쿠라에서 에노덴을 타고 10분 정도 가면 나오는 에노시마섬에 위치해 있다. 난 가마쿠라 구경을 서둘러 끝내고 에노시마로 이동했다.

에노시마는 '슬램덩크'의 오프닝에 등장하는 철길 건널목으로 유명한 역이다. 에노시마역이 바닷가에서 아주 가까운 터라 역에 내리자마자 바닷바람이 느껴졌다. 난 구글 지도의 도움을 받아 영화 속 '우미네코 식당'이자, 실제 장소인 '분사쇼쿠도(文佐食堂, 문좌식당)'를 찾기 시작했다. 찾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작은 공원을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 식당이 모습을 나타냈다.

영화
▲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속 소품들
영화
▲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포스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식당 문을 드르륵 열었다. 오래된 느낌의 가게엔 손님이 두 테이블에 있었다. 한 테이블은 중년 남자 넷이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다른 테이블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앉아 있었다. 우린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난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들어온 듯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물론 이 환상은 줄담배를 피우던 아저씨들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지만.)

내부는 영화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어떤 이유에서 이 장소를 선택하게 됐을까? 사실 이곳은 동네 사람들이 편히 들리는 동네 식당 정도일 것이다. 그 특별하지 않음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분샤쇼쿠도 내부
▲ 분샤쇼쿠도 내부
시라스동
▲ 시라스동


메뉴판은 볼 것도 없었다. 난 멀리서 시라스동을 먹으러 왔으니까!(물론 여기에 영화에서 언급된 '전갱이 튀김'이 있었다면 그걸 선택했겠지만 아쉽게도 없었다.) 함께 간 지인은 작은 멸치가 산처럼 쌓여있는 시라스동의 비주얼에 놀라서 무난한 메뉴인 탄멘을 주문했다. 가게의 내부 사진을 몇 장 찍고, 담배 냄새가 조금 불편하다고 느낄 무렵 시라스동이 나왔다.

일단 비주얼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다. 궁금한 건 맛이다.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맛이지? 내게 익숙한 잔멸치 조리법은 주로 '멸치볶음'이거나 '뱅어포구이' 정도인 탓에 약간 짭조름하고 딱딱한 식감을 예상했는데, 웬걸. 쪄서 올린 시라스가 부드럽게 씹히는 담백한 맛의 음식이었다.

고백하건대, 이 식당의 이 음식이 기대보다는 좋았지만 너무 맛있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이 슴슴한 맛은 누군가에겐 고향의 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영화 속 스즈에게 시라스동은 '아버지의 맛'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침에 차가웠던 바람은 오후가 되자 매섭게 변해 있었다. 난 에노시마를 서둘러 구경한 뒤 다시 에노덴을 타고 신주쿠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라스동을 먹으며 잠시나마 영화 속 장소로 여행을 떠난 시간이었다.

[정영선 요리연구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