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작품이 위대한 이유 삶을 느끼게 하는 정물화

  • 정여울
  • 입력 : 2017.01.0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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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로 가는 길-31] 구두, 해바라기, 아이리스, 그리고 의자. 모두 고흐가 즐겨 그렸던 사물들이다. 고흐는 정물화를 그릴 때조차도 마치 그 사물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렸다. 정물(靜物·still life)이라는 정의가 무색할 정도로. 고흐가 그린 사물들은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색조와 실루엣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고흐가 그린 구두에서 구두를 신었던 주인의 얼굴은 직접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바로 그 '주인의 부재' 때문에 이 구두들은 신비로운 매력을 뿜어낸다. 신발이 주는 느낌과 분위기를 통해 우리는 그림 저편에 있는 신발 주인의 삶을 상상하게 된다. 고흐가 그린 구두는 그리하여 '정물화'라기보다는 '초상화' 같은 느낌을 준다. 얼굴을 모델로 누군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모델로 누군가의 삶을 그리는 듯한 느낌. 바로 그 친밀함과 신비로움 때문에 고흐의 구두는 볼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자아낸다.

빈센트 반 고흐, <낡은 신발 한 켤레>, 1888
▲ 빈센트 반 고흐, <낡은 신발 한 켤레>, 1888
 의자, 꽃, 파이프, 촛대, 책 등 수많은 사물들을 열정적으로 그렸던 고흐의 그림들 중에서도 구두를 그린 9점의 그림은 수많은 평론가들과 철학자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림 속에서 '자신이 느끼고 싶은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사회적 본능에 가깝지만, 똑같은 그림을 보고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차이'는 매번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된다. 특히 철학자와 마르틴 하이데거와 미술사학자 메이어 샤피로의 의견 차이는 지금도 고흐의 구두 하면 빠짐없이 회자되는 기념비적인 논쟁이다. 두 사람이 직접 만나 논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미술사학자 샤피로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같은 그림, 다른 해석'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빈센트 반 고흐, <신발 한 켤레>, 1886
▲ 빈센트 반 고흐, <신발 한 켤레>, 1886
 하이데거는 고흐의 구두 그림을 1930년 암스테르담의 전시에서 보았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구두가 노동을 통해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는 농부의 고된 생의 흔적이 농축된 사물이라고 보았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Der Ursprung des Kunstwerks·1952)'이라는 글에서 고흐의 구두 그림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보았다. 닳고 닳아 발가락이 삐져나올 것만 같은 신발의 안쪽, 그 어두운 틈새 안에 농부의 힘겨운 발걸음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신발의 묵직한 무게감 속에는, 거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일직선으로 뻗은 밭고랑 사이를 묵묵히 걸어가는 농부의 끈질긴 걸음걸이가 담겨 있다고도 했다. 하이데거는 '눈에 보이는 구두'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구두의 주인'을 마치 자신이 직접 본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구두의 주인이 농부라고 가정하고, 그 구두 속에 과연 올해도 무사히 대지로부터 곡식을 얻어낼 수 있는지 근심하고 있는 농부의 마음이 서려 있다고 보았다.

 하이데거가 고흐의 구두를 아예 '농부의 것'으로 확정하다시피 하고 글을 쓴 것에 대해, 샤피로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샤피로는 '개별 오브제로서의 정물화'(1968)라는 글에서, 하이데거가 묘사한 구두는 고흐의 여러 편의 구두 그림 중에서도 1886~1887년 파리에서 그려진 것이라고 보고, 그 시기에 그려진 구두는 '농부의 것'이 아니라 '고흐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샤피로는 농부의 고된 삶과 대지의 무한한 은혜를 예찬하는 하이데거의 글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인지 조목조목 근거를 대며 반박한다. 철학자로서 나치에 동조한 하이데거의 파시즘적 행보에 대한 반발심도 작용하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해지고, 닳아빠진 구두는 분명 '가난한 농부의 것'이라는 감정적 전제 위에서 글을 시작하고 있었고, 하이데거의 바로 그 낭만적인 상상과 비장미로 넘치는 문체는 파시즘의 대중 선동과도 닮은 데가 있다. 구두 한 켤레를 그린 그림을 보고 농부의 성스러운 노동과 대지의 신성함을 예찬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철학자의 상상력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그림을 연구하는 미술사가의 세계관으로는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신발 한 켤레>, 1887
▲ 빈센트 반 고흐, <신발 한 켤레>, 1887
 고흐가 하이데거의 글과 샤피로의 글을 읽었다면, 그는 과연 누구의 편을 들어주었을까. 고흐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을 것 같다. 물론 고흐도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농부의 성스러운 노동과 대지의 신성함을 예찬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이 구두가 꼭 '농부의 노동'과 '대지의 신비'를 예찬하는 그림이라고 확증할 수는 없다. 그림을 통해 '무엇을 느낄 것인가'는 물론 감상자의 자유이지만, 그 느낌을 모두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샤피로의 말대로 이 신발이 '고흐의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고흐의 삶 자체에 노동의 신성함과 자연의 신비에 감사하는 정신이 살아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신발이라는 오브제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그림 속에 고흐가 무엇을 담으려 했는가 하는 점이다. 샤피로는 이 그림이 단지 구두를 그린 정물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 고흐의 자화상'이라고 보았다. 고흐가 고갱의 의자를 그릴 때 '의자'라는 정물을 넘어 고갱이라는 한 인물의 정신을 그렸듯이, 이 구두 그림 또한 구두라는 사물을 빌려 고흐의 인생과 정신을 담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농부의 삶'과 '화가의 삶' 사이에도 '끊임없는 노동과 자연에 대한 감사'라는 교집합이 있듯이, 하이데거가 말한 '농부의 노동'과 샤피로가 말한 '화가의 자화상' 사이에도 본의 아니게 교집합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고흐는 농부가 밭에 쟁기질을 하듯 캔버스에 붓질을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우리가 고흐가 그린 구두를 농부의 인생으로, 화가의 인생으로,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의 인생'으로 은유하는 까닭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강렬한 끌림이 그 안에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흐는 신발이라는 사물을 통해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도록 손짓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신발에는 무엇이 묻어 있는가. 어느 장소의 흙먼지가 묻어 있을까. 누구와 함께 걸었던 흔적이 묻어 있을까. 이력서(履歷書)가 말 그대로 '신발이 지나간 내력'을 가리키는 것처럼, 화가의 그림 또한 자신이 밟아온 인생의 발자취를 담아낸다.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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