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을 지나니 설국이었다' 첫 문장 속으로 들어가다

  • 허연
  • 입력 : 2017.01.12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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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국'이 영화로 만들어질 무렵 에치코 유자와를 방문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허연의 일본문학 기행-6] 너무나 유명한 소설의 첫문장을 다시 떠올려보자.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니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췄다."

 이 문장에는 주어가 없다. 독자들은 이 문장을 읽으며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얻는다. 흡사 자기가 터널을 지나 설국을 마주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내가 기차에 타고 있는 듯한 착각. 이것이 소설의 시작 부분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묘한 매력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내가 탄 기차는 군마현을 내달리고 있었다. 일본 시골 특유의 가지런한 기와집과 가지런한 농경지가 보이고 멀리로는 꽤 높아보이는 산등성이들이 보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눈은 보이지 않았다. 설국이 불과 20여 분 거리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 눈은 없었다.

 에치코 산맥의 동쪽인 군마현은 도쿄와 기후대가 비슷했다. 섬나라 일본에서는 아주 드물게 바다와 접하지 않은 현이었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 기차는 현실 속을 달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소설에서 주인공 시마무라는 에치코 유자와를 세 번 방문한다.

 첫 번째 방문에서 시마무라는 코마코를 처음 만난다. 그는 에치코 유자와 인근의 산을 등반한다. 도쿄라는 대도시 생활에 지친 그가 "자연과 자신에 대한 진지함마저 곧잘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회복하는 데는 산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시마무라에게 에치코 유자와는 '치유'의 상징이기도 한 곳이다. 산업화의 상징인 도쿄와 대비되는 치유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그해 푸르른 5월 어느 날 일주일 만에 산에서 내려온 그는 온천장에 도착해 게이샤를 불렀다. 그때 나타난 여인이 코마코였다.

 "여자의 인상은 이상하리만큼 청결했다. 발가락 사이의 오목한 부분까지도 깨끗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여름의 산을 보고 온 자신의 시각 탓인가 생각할 정도였다."

 코마코의 첫 인상을 묘사하는 부분은 흥미롭다. 소설의 흐름으로 보면 시마무라가 처음 코마코를 만났을 당시 그녀는 아직 게이샤가 아니었다. 샤미센 연주와 춤을 배우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견습생 정도에 불과했다.

 코마코는 에치코 유자와 태생으로 도쿄에서 일을 한 적이 있는 여인으로 약혼자 유키오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온천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비련의 주인공이다.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사랑할 생각이라곤 없는 허무한 한량 시마무라와 남편도 아닌 약혼자를 위해 게이샤의 길을 걷는 이상한 숙명에 처한 여인 코마코. 이 두 사람은 에치코 유자와라는 환상의 공간에서 흡사 '산문시'와 같은 대화를 주고 받으며 서로에 끌리기 시작한다.

 시마무라가 설국을 두 번째 방문한 것은 12월이었다. 소설의 시작되는 첫 부분에 나오는 묘사들이 모두 두 번째 방문 때 이야기들이다. 다다미 방에 다시 마주 앉은 시마무라와 코마코는 이런 대화를 주고 받는다.

 시마무라가 쳐다보는 앞에서 여자는 고다쓰 위에서 손을 꼽기 시작했다. 그것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무슨 셈을 하고 있지?" 하고 물어도 대답도 없이 한동안 그렇게 손을 꼽고 있었다.

 "5월 23일이었죠."

 "그렇군 날짜를 세고 있었군. 7월 8월은 둘 다 큰 달이야."

 "보세요. 199일 만이네요. 꼭 199일 만이에요."

 코마코는 처음 만났다 헤어진 날 이후 다시 만나게 된 이날까지 하루 하루 시마무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마무라는 자신에 대한 코마코의 열정이 애틋하고 좋으면서도 이내 부질없는 '헛수고'라고 생각을 해버린다. 그에게 설국에서의 일은 어차피 환상이니까.

 둘의 관계는 꼭 뭘 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다. 그래서 부질없고 한심해보이기까지 한다. 섹스도 약속도 의미가 없다. 꼭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그 무미함에 압도되어 버린다. 뭐지. 도대체 이들은 무얼 하는 거지. 도무지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주인공들의 행태를 보면서 눈치 빠른 독자들은 '어떤 낯설음의 세계'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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