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雪) 속에 새빨간 볼이 떠있다"…설국은 거울이 쓴 소설이다

  • 허연
  • 입력 : 2017.04.06 06:01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설국관에 전시된 코마코를 모델로 만든 작품.
▲ 설국관에 전시된 코마코를 모델로 만든 작품.
[허연의 일본문학 기행-18] 영화 '설국'에서도 '거울'은 작품 전체의 주제와 분위기를 드러내 보여주는 상징물로 쓰인다.

 사실 거울 없이 '설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장편소설 '설국'이 탄생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이 소설이 창작 초기부터 거울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야스나리는 애초 장편을 쓰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소설 '설국'은 한 번에 완성된 소설이 아니라 각기 다른 시기에 쓰인 여러 중단편들이 합쳐진 소설이다. '설국'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장편에는 야스나리가 1935년부터 1947년 사이에 써서 각기 다른 제목으로 발표했던 작품들이 한데 모여 있다. 이렇게 장편 '설국'의 일부가 된 작품들 중에는 처음 발표했을 때 제목이 '거울'이라는 단어로 끝나는 소설이 있었다. '저녁 풍경의 겨울(夕景色の鏡)'과 '하얀 아침의 거울(白い朝の鏡)' 등이 대표적이다. 이 두 작품은 훗날 장편 '설국'의 가장 중요한 뼈대가 된다. 이 두 작품의 제목만 봐도 야스나리가 얼마나 거울이라는 상징물을 의식한 채 작품을 쓰기 시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거울은 소설 설국의 전부였던 것이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비현실의 아름다움은 거울이라고 하는 신비한 도구를 통해 '상(像)'으로 완성된다.

 두 여자 주인공 요코와 코마코는 거울에 의해 독자들 앞에 나타나고, 또 거울을 통해 독자들의 눈에서 사라진다. 정향재의 논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론'은 거울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설국'의 내면을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 논문은 두 여자 주인공 요코와 코마코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거울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완성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소설에서 처음 거울에 비치는 인물은 요코다. 시마무라는 기차 안에서 코마코를 떠올리며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닦다가 창에 비친 요코를 발견한다. 야스나리는 친절하게도 왜 기차 유리창이 거울이 되는지를 설명까지 하면서 '거울의 소설'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한다.

 "바깥은 저녁 어스름이 내려져 있었고, 기차 안은 불이 켜져 있다. 그래서 창문이 거울이 되는 것이다."

 곧이어 책의 앞부분에서 인용한 '이중노출' 운운하는 장면이 나오고, 이중노출 장면은 요코의 비현실적인 매력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한다.

 "두 사람의 모습은 끝없이 먼 데로 가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기에 시마무라는 슬픔을 보고 있다는 괴로움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저 꿈의 편린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마음이었다. 신기한 거울 속의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이 구절로 충분히 설명이 된다. 현실로 봤다면 '슬픔'이었을 일이 거울을 통해 봤기 때문에 '꿈'처럼 다가왔다는 말이다. 요코는 유리창에 비친 첫 순간부터 화재로 죽는 순간까지 시종일관 이 같은 신비함을 바탕에 깔고 등장한다.

 코마코는 좀 다르다. 코마코가 처음 거울에 등장한 이미지는 요코와는 확연히 다르다.

 "시마무라는 그쪽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움츠렸다. 거울 속에서 새하얗게 빛나고 있는 것은 눈(雪)이었다. 그 눈 속에 여자의 새빨간 볼이 떠 있다.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청결한 아름다움이었다."

 거울 속에서 코마코는 '빨간 볼'로 다가온다. 요코보다 훨씬 선명하고 생명력이 드러나보이는 이미지를 만들어 넣은 것이다. 시마무라가 두 번째 방문을 끝내고 도쿄로 돌아가려고 할 때 그를 배웅하는 코마코를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거울은 등장한다. 유키오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달려온 요코의 재촉을 거부하고 끝까지 시마무라를 배웅했던 그 장면이다.

 "'플랫폼에는 들어가지 않을래요. 안녕히 가세요'라며 코마코는 대합실 창 안에 서 있었다. 유리창문은 닫혀 있었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니 초라한 시골가게의 뿌연 진열장 속에 이상한 과일 하나가 달랑 잊혀진 채 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기차가 움직이자 대합실 유리가 빛나고 코마코의 얼굴은 그 빛 속에서 확 타오르는가 싶더니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눈 온 아침 거울 속에서 봤던 것과 같은 새빨간 볼이었다. 또 한 번 현실과의 이별을 알리는 색이었다."

 이 상황은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지는 듯 선명하다.

 약혼자는 임종을 맞고 있고, 시마무라는 도쿄로 떠난다. 그 순간 대합실에 남겨진 코마코는 시골 가게 진열장에 남겨진 이상한 과일 같다. 코마코의 슬픈 운명을 달랑 한 개만 남은 과일로 묘사한 부분은 너무 적절한 비유여서 오히려 냉혹하게 느껴진다.

 늦가을 시마무라의 세 번째 유자와 방문 때도 거울은 어김없이 코마코를 비춘다.

 "창가로 꺼낸 경대에는 단풍 든 산이 비춰지고 있었다. 거울 속에도 가을 햇살이 환했다."

 야스나리는 거울을 통해 주인공의 성격을 말하고, 거울을 통해 계절과 배경을 말하며, 거울을 통해 두 여주인공을 바라보는 자신의 입장을 말한다. 거울 없이 설국은 없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