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인시대의 명과 암 (상)

  • 정지규
  • 입력 : 2017.04.1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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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미 더 스포츠-39] KBO리그가 시작된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10개 팀이 팀별로 14경기씩 치렀으니 얼추 10분의 1이 지났다. 사실, 리그 개막전에는 KBO리그 흥행에 대한 걱정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올 시즌 흥행의 바로미터이자 경쟁력으로 전망했던 WBC에서 예선 탈락이라는 참담한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국제대회 경쟁력이 종목 흥행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걱정과 우려의 시선이 컸다. 하지만 다행히도 현시점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다. 관중 수는 소폭이지만 전년 동기 대비 늘었다. 전반적인 스포츠계 침체에도 불구하고 국내 최고 스포츠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고무적이다. 다만 커져가는 외형만큼이나 질적으로도 발전하고 있느냐의 문제는 지금 시점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1998년은 한국프로야구에서 매우 중요한 해였다. 외국인 선수가 도입된 첫 시즌이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공식적으로 한국프로야구 선수는 한국 이름을 쓰는 한국인이여만 했다. 16년간 순혈주의를 지켜온 한국프로야구에서 한국 이름이 아닌 다른 나라 이름을 쓰는 선수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외국인 선수 도입은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던 한국 야구를 한단계 발전시키고자 하는 KBO의 비장의 무기였다. 물론 한국프로야구가 100% 순혈주의였던 것은 아니다. 1982년 출범 직후 '재일동포' 선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던 시절이 있었다. '너구리' 장명부는 60경기에 출장했고, 30승을 거뒀다(그 당시 전체 경기 수는 팀장 100경기였다).

김일융 선수/삼성 라이온즈 제공
▲ 김일융 선수/삼성 라이온즈 제공
'황금박쥐' 김일융은 3년 동안 70승을 거두며 리그를 평정하고, 일본프로야구로 돌아갔다(이후 일본에서 6년 동안 그가 거둔 승수는 20승이었다). 따지고 보면 아직도 유일한 기록인 '4할 타자' 백인천이나, 24연승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운 박철순도 각각 일본과 미국의 선진 야구를 경험한 선수들이었다. 그만큼 한국 야구와 미국·일본 선진야구의 갭은 컸다.

한국프로야구가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변화를 시도한 결정적 계기는 한일프로야구 교류전(슈퍼게임) 영향 때문이었다. 1991년 일본의 한 언론사 주최로 시작된 슈퍼게임에서 한국 최정예 대표팀은 일본 1.5군 팀들에 무참하게 연전연패를 당했다. 비록 마지막 몇 경기는 이겼으나 이미 전체 시리즈 승부의 축이 기운 상태였다. 3회까지 열리던 이 대회는 스폰서 등의 문제로 인해 폐지했다. 한일전 축구만큼이나 일본인들에게 흥행 카드가 되지 못했던 게 기저에 깔린 원인이었다.

국가대표 간 경기가 빈번한 글로벌 스포츠 축구와 달리 야구는 로컬 스포츠 성격이 강하다. 프로야구를 하는 나라는 미국, 일본, 한국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각국이 명예를 걸고 최강팀끼리 붙는 대회도 거의 없었고 딱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선진 야구를 익히기엔 상당히 힘이 들었다. 스프링캠프 때를 이용해 교류를 하거나, 한정된 코치나 감독이 연수라는 명목하에 해당 리그를 탐방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스포츠는 결국 선수 개인이 하는 것이다. 한정적인 교류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이 같은 이유로 도입된 게 외국인 선수 영입과 드래프트 제도의 실시였다. 외국 선수 영입을 통한 한국프로야구의 한단계 도약의 시작이 바로 1998년이었고, 1998년은 한국프로야구사에서 매우 중요한 한 해가 됐다.

타이론 우즈/출처=연합뉴스
▲ 타이론 우즈/출처=연합뉴스

어느 정도 시각차는 있지만 외국인 선수 영입은 전반적으로 성공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다른 종목에 비해 실패한 선수 빈도가 다소 높은 것도 사실이나 전반적으로 투타에서 모두 한 수 위 기록으로 리그를 이끌었다. 가령 이승엽이라는 전설이 탄생하게 된 데는 타이론 우즈라는 외국인 타자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 1998년 경쟁 끝에 우즈에게 홈런왕 타이틀을 빼앗긴 그는 2003년 아시아 한 시즌 최다홈런 신기록을 세우며 우뚝 선다. 우즈와의 경쟁과 최고가 되기 위한 노력이 최고의 자리로 이끈 원동력 중 하나였다. 또한 최고령 MLB 선수로 유명했던 훌리오 프랑코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비롯해 프로야구선수의 선진자기관리기법을 전수해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검은 갈매기' 호세는 1992년 우승 이후 침체됐던 부산 야구의 부흥과 인기를 이끈 주인공으로 리그 흥행에 큰 영향을 끼쳤다. 외국인 선수 제도는 기술적·심리적으로 한국프로야구를 한 단계 도약시켰다.

2006 WBC, 2008 베이징올림픽, 2009 WBC는 한국프로야구사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들이다. 야구라는 종목의 특성상 이전까지 변변한 국가대항전이 없었기에 WBC대회 창설은 한국 야구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시험대였다. 한국 야구는 선전을 통해 세계 최고 수준에 있음을 입증했고 이는 KBO리그 흥행으로 이어졌다. 2000년대 초반에 200만~300만명 수준을 맴돌던 총관중 수는 800만명을 돌파했다.

1998년 도입 초기에 마이너리그 수준 선수들로만 선발되던 외국인 선수들은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선수들로 점차 격상됐다. 이제는 풀타임 메이저리거나 100승, 100홈런을 기록한 선수들도 한국 무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국인 영입이 성공을 반드시 보장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한국 야구 수준이 성장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스포츠경영박사 정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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